소더비 파리 최종 경매 270개 로트 전량 낙찰
메르켈 캐리커처 최고 추정가 57.6배…완성품 밖으로 넓어진 디자인 가치
[KtN 임민정기자]추정가 200∼400유로였던 종이 한 장이 2만3040유로에 팔렸다.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가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전 독일 총리를 잉크와 파란색 펠트펜으로 그린 캐리커처다. 가로 21㎝, 세로 29.7㎝에 불과한 작품은 최고 추정가의 57.6배까지 오르며 경매 최고가를 기록했다. 패션 거장의 마지막 유품 경매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물건은 드레스나 가구가 아니라 정치인을 풍자한 작은 그림이었다.
소더비 파리는 6월 30일부터 7월 8일까지 ‘칼, 칼 라거펠트의 유산 Ⅵ: 영감(KARL, Karl Lagerfeld’s Estate VI, Inspirations)’을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2019년 세상을 떠난 라거펠트의 유품을 다룬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경매다. 270개 로트가 모두 주인을 찾았고 총낙찰액은 73만1008유로를 기록했다. 낙찰총액은 경매 전 최고 추정가 합계의 세 배에 달했다. 소더비가 공개한 낙찰가는 구매자 프리미엄을 포함하고 세금과 기타 비용은 제외한 금액이다.
경매 목록은 라거펠트가 완성한 디자인에 머물지 않았다. 패션 스케치 1000여 점과 작업 문서, 약 200대의 아이팟, 핑거리스 장갑, 가구와 생활용품이 함께 나왔다. 1970년대 패션 드로잉부터 2000년대 전자기기까지 제작 시기와 쓰임도 넓게 퍼졌다. 디자인 결과물뿐 아니라 아이디어를 다듬은 과정과 물건을 고르고 사용한 습관까지 거래 대상이 됐다.
메르켈 캐리커처에는 유명 디자이너의 서명 외에도 가격을 끌어올릴 요소가 겹쳤다. 국제적으로 알려진 정치인을 소재로 삼았고, 그림의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으며, 라거펠트 개인 소장품에서 나왔다는 이력도 분명했다. 200∼400유로로 책정된 낮은 추정가는 입찰 문턱을 낮췄다. 패션 수집가뿐 아니라 정치 풍자화와 유명 인사 관련 자료를 찾는 구매자까지 경쟁에 들어올 수 있는 조건이었다.
1923년경 제작된 스웨덴 벤치 6점은 1만9200유로에 낙찰됐다. 추정가는 5000∼8000유로였다. 스웨덴 디자이너 폴케 벤소우(Folke Bensow)가 설계하고 네프베크반(Näfveqvarn) 주조소가 주철과 도장 목재로 만든 가구다. 라거펠트의 이름을 빼더라도 스웨덴 근대 디자인사 안에서 다룰 수 있는 물건이다. 기존 가구 가치에 라거펠트가 선택해 소장했다는 이력이 더해지면서 최고 추정가의 2.4배까지 가격이 올랐다.
벤치 낙찰가는 유명인 유품의 가격이 소유자 이름 하나로만 형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낸다. 제작자와 제작 시기, 주조소, 보존 상태가 먼저 평가되고 소장 이력이 뒤에 붙었다. 유명인의 집에서 사용됐다는 사실은 기존 디자인 가치를 대신하지 않고 가격을 한 단계 높이는 요소로 작용했다.
1982년 클로에(Chloé) 작업 폴더도 추정가 1500∼2000유로를 크게 넘어 1만4000유로 이상에 팔렸다. 폴더에는 검은 잉크와 연필로 그린 패션 스케치, 트레이싱지, 잡지 스크랩, 원단 조각, 복사한 디자인과 장식 무늬 등 119점이 담겨 있었다. 겉면에는 ‘ébauches Chloé été 82’라는 표기가 남아 있었다. 소더비는 라거펠트의 작업실에서 발견된 배열을 바꾸지 않고 한 묶음으로 출품했다.
119점을 낱장으로 나눴다면 각각의 스케치가 별도 상품이 될 수 있었다. 한 폴더에 그대로 담아 내놓으면서 가격의 기준은 그림 한 장의 완성도에서 작업 과정 전체로 옮겨갔다. 잡지에서 고른 이미지와 원단 조각, 선을 고치고 덧그린 흔적이 한 시기의 디자인이 만들어지는 순서를 전한다. 패션 스케치가 옷을 만들기 위한 중간 자료를 넘어 독립적인 아카이브로 거래된 결과다.
라거펠트가 모은 아이팟은 여러 대씩 묶여 출품됐다. 2003년 출시된 3세대 아이팟 4대 한 묶음에는 200∼400유로의 추정가가 붙었다. 흰색 본체 뒷면에는 라거펠트가 붙인 라벨과 손글씨 메모가 남아 있었다. 기기는 작동하지 않았고 배터리 교체도 필요했다. 소더비 역시 전자기기의 기능보다 장식적 가치를 기준으로 판매한다고 고지했다.
작동하지 않는 대량생산 제품이 경매 물건으로 바뀐 배경에는 사용 흔적이 있다. 같은 기종의 아이팟이라도 어떤 음악을 담아 어떻게 나눴는지, 어느 기기에 어떤 라벨을 붙였는지가 라거펠트의 취향과 생활 방식을 기록한다. 애플의 산업디자인에 라거펠트의 분류 습관이 더해지면서 오래된 전자기기는 개인 아카이브로 성격이 바뀌었다.
손가락을 드러낸 가죽 장갑도 비슷한 흐름에 놓였다. 장갑은 라거펠트가 흰 머리와 검은 선글라스, 높은 셔츠 칼라와 함께 반복해서 착용한 물건이다. 가죽의 종류와 제작 브랜드뿐 아니라 라거펠트를 알아보게 하는 외형의 일부라는 점이 수집 가치를 만들었다. 소더비의 경매 목록에는 샤넬(Chanel)과 코스(Causse)가 제작한 여러 색상의 핑거리스 장갑이 각각 별도 로트로 편성됐다.
소더비는 라거펠트의 유품을 한꺼번에 시장에 내놓지 않았다. 2021년 모나코와 파리에서 시작한 경매는 2022년 쾰른으로 이어졌고, 2025년 파리의 ‘르 스튜디오(Le Studio)’를 거쳐 올해 ‘영감’으로 마무리됐다. 가구와 미술품, 의상, 작업실 자료, 개인용품을 회차마다 다르게 묶으면서 한 사람의 유산을 여러 수집 분야에 나눠 소개했다.
판매 시기를 나누면 대량 출품에 따른 가격 부담을 줄일 수 있다. 회차마다 새로운 주제를 내세워 라거펠트의 이름을 시장에 다시 불러내는 효과도 생긴다. 가구 수집가는 스웨덴 벤치를 통해, 패션 연구자와 기관은 작업 폴더를 통해, 전자기기 수집가는 아이팟을 통해 같은 경매에 들어왔다. 한 사람의 집과 작업실을 여러 수집 시장에 맞춰 다시 구성한 셈이다.
단일 소장자 컬렉션은 최근 소더비가 힘을 싣는 분야이기도 하다. 소더비가 집계한 2025년 통합 매출은 70억달러였다. 회사는 주요 단일 소장자 컬렉션과 미술·럭셔리 부문의 수요를 성장 배경으로 꼽았다. 한 소장자의 취향과 생애를 중심으로 미술품, 가구, 패션, 장신구와 생활용품을 함께 판매하면 기존 부문별 경계를 넘어 구매자를 모을 수 있다.
세계 공개 경매시장도 2025년 반등했다. 공개 경매 매출은 전년보다 9% 증가한 207억달러를 기록했다. 세계 미술시장 전체 매출은 4% 늘어난 596억달러로 집계됐다. 다만 라거펠트 유품 경매는 초고가 회화 시장의 회복과는 가격 구조가 달랐다. 수백 유로대 추정가의 스케치와 전자기기를 넓게 배치해 고가 미술품 경매에 참여하지 않던 구매자도 입찰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73만1008유로의 결과에는 세 종류의 가치가 함께 반영됐다. 스웨덴 벤치에는 제작자와 디자인사적 가치가 있었고, 클로에 폴더에는 창작 과정이 남아 있었다. 아이팟과 장갑에는 라거펠트가 직접 사용하고 분류한 흔적이 축적됐다. 물건 자체의 디자인, 소유자의 이력, 사용 과정이 함께 보존될수록 경매 가격도 높아지는 구조다.
유품의 시장 가치가 커질수록 자료 보존을 둘러싼 부담도 뒤따른다. 스케치 1000여 점이 여러 로트로 나뉘어 민간 소장자에게 흩어지면 개별 작품의 거래는 활발해지지만 전체 작업 흐름을 한곳에서 살피기는 어려워진다. 클로에 폴더처럼 발견 당시 구성을 유지한 자료가 앞으로도 전시와 연구에 공개될지는 새 소장자의 결정에 달려 있다. 최종 경매가 끝난 뒤에는 작품의 재판매 가격과 소장 이력, 박물관·연구기관의 접근 가능성이 라거펠트 아카이브의 다음 흐름을 가르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