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격리와 죄수들의 자치가 겹친 무법지대…자유를 대가로 염왕 제거에 투입된 유성

연옥: 살인마들의 자치구역, 사진=영화스틸,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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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박준식기자]높은 담장과 쇠창살은 감옥의 경계를 눈에 보이게 만든다. 안과 밖을 나누고 수감자의 움직임을 제한하며 국가가 형벌을 집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연옥: 살인마들의 자치구역’은 익숙한 감옥의 형태를 걷어낸다. 극악무도한 1급 흉악범들을 거대한 격리구역에 풀어놓고 스스로 살아남도록 한다. 죄수들은 감방 밖으로 나왔지만 국가가 정한 경계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연옥은 과거 죄인을 외딴 지역으로 보냈던 유배 제도에서 착안했다. 죄수를 사회로부터 분리하되 폐쇄된 건물에 가두지 않는 방식이다. 수용자에게 일정한 이동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돌아갈 수 없는 경계를 설정한다. 감시는 약해진 듯하지만 추방은 지속되고, 생활의 자율성은 커진 듯하지만 생존의 책임도 개인에게 넘어간다.

제1연옥부터 제4연옥까지 나뉜 네 구역에는 저마다의 세력과 우두머리인 연옥장이 존재한다. 국가가 수용자들을 격리한 뒤 물러난 공간에서 죄수들은 새로운 집단을 만들고 권력을 나눈다. 법률과 재판 절차가 사라진 자리에는 힘의 우열과 소속 집단의 규모, 생필품을 확보하는 능력이 들어선다.

‘자치구역’이라는 이름은 연옥의 모순을 압축한다. 자치는 구성원들이 공동의 규칙을 만들고 운영하는 정치적 행위지만 연옥의 규칙은 동등한 합의에서 나오지 않는다.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과 생존 물자를 차지한 세력이 명령하고 나머지는 복종한다. 국가의 법에서 벗어난 자유가 새로운 공동체로 이어지지 않고 더 직접적인 지배를 불러온다.

연옥: 살인마들의 자치구역, 사진=영화스틸,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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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구역 위에는 김재현이 맡은 ‘염왕’이 군림한다. 염왕은 식량과 생필품을 장악해 수용자들의 생사를 좌우한다. 죄수를 물리적으로 가두지 않아도 먹을 것과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통제하면 행동의 범위를 제한할 수 있다. 연옥의 통치는 감방과 간수보다 배급과 결핍을 통해 작동한다.

식량은 돈이나 명예보다 앞선 권력이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물자를 가진 사람은 타인의 노동과 충성, 침묵까지 요구할 수 있다. 굶주림의 가능성이 계속되는 공간에서는 명령을 거부할 자유도 약해진다. 염왕의 권력은 가장 강한 주먹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누가 먹고 살아남을지를 결정하는 위치에서 완성된다.

제3연옥장 ‘조황도’는 네 구역 가운데 하나를 장악한다. 조재윤이 맡은 조황도를 비롯한 연옥장들은 각자의 세력을 거느리며 구역별 질서를 유지한다. 염왕이 연옥 전체의 생존 물자를 통제하는 권력이라면 연옥장은 수용자와 직접 맞닿은 구역 권력에 가깝다. 하나의 격리구역 안에 전체를 지배하는 염왕과 각 구역을 장악한 연옥장이 겹쳐 있다.

권력이 여러 층으로 나뉘어도 수용자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국가의 법과 염왕의 명령, 연옥장의 규칙이 차례로 수용자를 둘러싼다. 국가가 직접 관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통제의 부재가 아니라 책임의 거리만 넓힌다. 연옥 내부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수용자들의 자치라는 이름 아래 처리되고, 국가는 경계 밖에서 격리 체계를 유지한다.

최근 장르영화는 폐쇄된 공간에 작은 사회를 만들고 현실의 권력 구조를 압축하는 방식을 자주 활용해 왔다. 감옥과 섬, 지하 시설, 고립된 건물은 인물을 가두는 배경에 머물지 않는다. 물자가 부족해지고 공적 제도가 약해졌을 때 누가 규칙을 만들고 누가 희생되는지를 짧은 시간 안에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연옥: 살인마들의 자치구역’도 거대한 사회의 권력관계를 네 개의 구역 안으로 옮긴다. 식량을 공급하는 사람, 구역을 관리하는 사람, 폭력을 수행하는 사람, 살아남기 위해 복종하는 사람이 분리된다. 사회에서 사용되던 직함과 제도는 사라졌지만 자원을 가진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구조는 남는다.

연옥의 질서는 국가와 무관하게 생겨난 별개의 세계도 아니다. 국가가 죄수들을 격리했고, 외부 관리자가 연옥을 지켜보고 있으며, 내부의 권력을 제거할 사람도 국가가 선택한다. 통제하지 않는 것처럼 물러서면서 필요한 순간에는 개입하는 방식이다. 방치와 관리가 동시에 작동한다.

정부 관리자 ‘신상현’은 무기수 ‘유성’에게 염왕을 제거하면 자유를 주겠다고 제안한다. 조성하가 연기하는 신상현은 직접 연옥에 들어가 내부 질서를 바꾸지 않는다. 염왕을 쓰러뜨리는 위험과 폭력을 유성에게 맡긴다. 국가는 공적 절차 대신 죄수 한 사람의 육체를 이용해 또 다른 죄수의 권력을 제거하려 한다.

유성에게 자유는 형기를 마친 뒤 얻는 권리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로 주어지지 않는다. 목숨을 건 임무를 완수해야 받을 수 있는 대가다. 제안을 거부하면 무기수로 남고, 받아들이면 연옥의 절대 권력자와 싸워야 한다.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형식은 갖췄지만 어느 쪽도 유성이 원하는 삶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조건부 자유는 연옥의 배급 체계와 닮았다. 염왕은 식량과 생필품을 나눠주며 복종을 요구하고, 신상현은 사면을 제시하며 염왕 제거를 요구한다. 한 사람은 생명을 유지할 물자를 쥐고 있고 다른 사람은 연옥 밖으로 나갈 권한을 쥐고 있다. 유성은 내부와 외부의 권력이 제시한 조건 사이에서 몸을 담보로 내놓는다.

연옥: 살인마들의 자치구역, 사진=영화스틸,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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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이 연옥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싸움은 개인적인 생존과 국가의 목적을 동시에 수행한다. 유성이 주먹을 휘두르는 이유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지만 결과적으로는 국가가 다루지 못한 내부 권력을 제거하는 일이 된다. 한 개인의 절박함이 공적 권력의 수단으로 바뀐다.

이채영이 맡은 ‘화선’은 유성과 다른 이유로 연옥에 들어온다. 가족을 잃은 뒤 복수를 위해 스스로 격리구역을 선택한다. 유성이 연옥 밖으로 나갈 가능성을 좇는다면 화선은 연옥 안에 있는 목표를 향해 들어간다. 사면과 복수라는 서로 다른 목적은 두 사람을 같은 공간에 세우면서도 움직이는 방향을 갈라놓는다.

화선의 선택도 완전한 자유와는 거리가 있다. 가족을 잃은 과거가 현재의 행동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유성이 국가가 제시한 조건에 따라 움직인다면 화선은 상실이 남긴 명령을 따른다. 두 인물 모두 스스로 연옥에 들어가지만 선택을 밀어붙이는 힘은 각자의 바깥에 있다.

박철민이 맡은 스님 ‘남선’과 예수정이 연기하는 주민 ‘금녀’는 연옥을 죄수들의 전투장만으로 설명하기 어렵게 만든다. 남선은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고, 금녀는 알려지지 않은 사연을 지닌 채 살아간다. 죄수와 관리자, 연옥장뿐 아니라 오랜 시간 공간에 머문 주민이 존재하면서 연옥은 형벌 시설을 넘어 하나의 생활권으로 확장된다.

사람이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지면 임시로 만들어진 규칙도 관습이 된다. 권력은 폭력만으로 유지되지 않고 구성원들이 현재의 질서를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단단해진다. 연옥의 주민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내부 질서에 편입됐는지는 공개 전이지만, 남선과 금녀의 존재는 염왕의 권력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방향을 남긴다.

‘연옥’이라는 말은 죽은 사람이 최종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죄를 씻는 중간 상태를 가리켜 왔다. 영화 속 연옥에도 기다림이 깔려 있다. 수용자들은 형벌의 끝이나 탈출, 권력의 교체를 기다리며 살아간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대기는 현재의 삶을 잠정적인 것으로 만들고, 잠정적인 상태가 길어질수록 폭력적인 질서는 일상이 된다.

죄를 지은 사람을 사회와 분리하는 일과 인간으로서 살아갈 최소한의 조건을 보장하는 일은 서로 다른 책임이다. 연옥에서는 첫 번째 조치만 남고 두 번째 책임은 내부 권력에 넘겨진다. 죄수들이 저지른 과거의 범죄가 현재의 모든 폭력을 허용하는 근거로 사용되면서 처벌의 범위도 끝없이 넓어진다.

염왕을 제거한다고 연옥의 구조가 곧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식량과 생필품을 한 사람이 독점할 수 있는 조건, 네 구역을 세력별로 나누는 방식, 국가가 내부의 폭력을 죄수들에게 맡기는 관리 체계가 남아 있다면 다른 권력자가 같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악행과 권력자를 만들어내는 구조는 구분해서 바라봐야 한다.

‘연옥: 살인마들의 자치구역’은 법이 사라진 무법지대보다 법이 물러난 뒤에도 남는 권력을 앞세운다. 쇠창살을 없애도 격리는 지속되고, 이동을 허용해도 생존 물자를 통제하면 자유는 완성되지 않는다. 국가와 염왕은 서로 다른 위치에서 유성의 선택 범위를 제한한다.

유성이 염왕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은 절대 권력자를 쓰러뜨리는 액션 서사인 동시에 자유를 거래한 사람이 치르는 대가와 맞물린다. 9월 9일 개봉하는 영화는 네 개 구역의 세부 질서와 연옥장들의 관계, 염왕이 구축한 배급 체계, 유성과 화선의 충돌을 통해 자치라는 이름 아래 굳어진 지배의 실체를 펼쳐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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