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불어 좋은날’·‘어둠의 자식들’ 조감독 뒤 첫 연출…완성작 무수정 통과에도 내려진 해외 수출금지
[KtN 임우경 · 박준식기자] 1982년 문화공보부의 사전심의 과정에서 신인 감독 배창호의 첫 영화 시나리오에 60여 곳이 넘는 수정 지시가 내려졌다. 도시 빈민의 생활을 다룬 내용뿐 아니라 ‘꼬방동네 사람들’이라는 제목도 사용할 수 없다는 조건이 붙었다. 스물아홉 살 감독이 처음 마주한 한국영화의 제작 현장은 카메라보다 검열이 앞서는 곳이었다.
“‘꼬방’이라는 말은 가난한 동네를 뜻하는 은어였습니다. 판잣집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룬다는 이유로 시나리오가 여러 차례 반려됐어요.”
배창호 감독은 K-trendy NEWS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검열 과정을 이렇게 기억했다. ‘꼬방’은 판잣집이 모여 있던 도시 변두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경제성장과 도시개발이 국가의 성과로 강조되던 시절, 철거와 빈곤을 영화에 담는 일은 제작 허가 단계부터 제동이 걸렸다.
1980년대 초 한국영화에는 개발의 중심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생활이 잇따라 등장했다.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날’(1980)은 서울 강남 개발지역에서 일하는 세 청년을 따라갔다. 중국집 배달부와 여관 종업원, 이발소 조수의 노동과 사랑이 부동산 개발로 빠르게 변하는 서울 변두리와 겹쳤다.
이원세 감독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1981)은 조세희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재개발 과정에서 삶의 터전을 잃는 가족을 다뤘다. 이장호 감독의 ‘어둠의 자식들’(1981)은 윤락가 여성의 생존과 모성을 전면에 놓았다. 산업화가 남긴 빈곤과 철거, 도시 하층민의 생활이 한국영화의 주요 소재로 들어오기 시작한 시기였다.
배창호 감독은 ‘바람불어 좋은날’과 ‘어둠의 자식들’에서 이장호 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했다. 도시 변두리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까이서 촬영한 경험은 첫 연출작으로 이어졌다. 선택한 원작도 ‘어둠의 자식들’을 쓴 이동철의 동명 소설이었다.
‘꼬방동네 사람들’은 검은 장갑을 끼고 다녀 ‘검은 장갑’으로 불리는 명숙과 두 남자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명숙의 현재 남편 태섭은 살인사건에 연루돼 공소시효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교도소에서 나온 전남편 주석은 아들 준일을 찾아 꼬방동네로 돌아온다. 김보연이 명숙을, 김희라가 태섭을, 안성기가 주석을 맡았다.
영화는 세 사람의 관계에만 머물지 않았다. 아침마다 공용화장실 앞에 길게 늘어선 주민들, 한데 모여 빨래하다가 다투는 아낙들, 홀로 사는 마 영감의 환갑잔치를 함께 준비하는 이웃들이 꼬방동네의 생활을 채웠다. 가난은 배경으로 물러나지 않았고, 주민들도 동정의 대상으로만 남지 않았다. 다투고 웃고 춤추며 서로의 생활을 떠받치는 공동체가 작품의 중심에 놓였다.
사전심의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인물과 공간을 흔들었다. 제목을 바꾸라는 요구까지 나오면서 명숙의 별명인 ‘검은 장갑’이 대체 제목으로 거론됐다. 주민 전체의 삶을 가리키던 제목이 한 인물의 별명으로 좁아질 상황이었다.
“삭제·수정 조항이 60여 군데였습니다. 제가 직접 문공부 담당자를 찾아가 담판을 지었어요.”
배창호 감독은 수정 지시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원작과 영화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뜻을 담당자에게 전달했다. 시나리오 심의를 통과한 뒤에도 검열은 끝나지 않았다. 촬영과 편집을 마친 필름을 대상으로 다시 심의가 진행됐다. 배 감독은 치안본부와 국가안전기획부 관계자, 감독과 평론가 등 민간위원들이 완성작을 함께 봤다고 회고했다.
완성된 영화 앞에서 심의 결과는 달라졌다. 도시 빈민의 열악한 생활을 문제 삼았던 사전심의와 달리 완성작은 한 곳도 잘리지 않고 통과했다. 주민들의 가난과 폭력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삶의 온기와 연대를 함께 담아낸 연출이 심사위원들의 반응을 바꿨다.
무수정 통과 뒤에도 제약은 남았다.
“심사위원들이 영화를 보고 감동해서 무수정으로 통과시켰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은 해외 수출 불가였어요.”
국내에서는 원래 제목으로 영화를 상영할 수 있었지만 해외 수출과 국제영화제 출품은 허용되지 않았다. 한 편의 영화가 국내 관객에게 공개되는 절차와 국외에서 상영되는 절차가 따로 움직이던 시절이었다. 수정 없이 살아남은 필름도 국경을 넘지는 못했다.
‘꼬방동네 사람들’은 1982년 7월 서울 푸른극장에서 개봉했다. 명보극장이나 단성사 같은 대표적인 개봉관이 아니었다. 배창호 감독은 냉방시설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극장에서 첫 작품을 관객에게 내놓았다고 말했다.
개봉 전 시사회가 열린 남산 드라마센터 맞은편 시사실에는 영화인과 관객이 몰렸다. 여름철 냉방이 충분하지 않은 공간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열기로 시사실 안에 습기가 찰 정도였다. 신인 감독에게 쏠린 관심보다 먼저 다가온 감정은 흥행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첫 평가를 기다리는 긴장이었다.
입소문은 시사회 이후 퍼졌다. 도시 빈민의 생활을 신파에 기대지 않고 사실적으로 담은 작품이라는 평가가 이어졌다. 데뷔작은 제21회 대종상영화제에서 김보연의 여우주연상과 배창호의 신인부문 특별상을 받았다. 제1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는 최우수작품상과 감독상, 촬영상을 수상했고, 배창호 감독은 제19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신인상도 받았다.
첫 영화의 성과는 곧바로 흥행감독의 지위를 보장하지 않았다. 리얼리즘 영화로 평가받은 작품이었고, 당시 충무로에서 흥행성이 높다고 판단하던 소재와도 거리가 있었다. 배창호 감독은 데뷔작 이후 들어온 상업영화 제안 가운데 연출 방향이 맞지 않는 작품을 거절했다. 첫 작품의 성공보다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 먼저였다.
제작비와 촬영 장비는 부족했지만 감독에게 주어진 창작의 범위는 지금보다 넓었다는 것이 배창호 감독의 설명이다. 검열이라는 국가의 통제와 제작 과정에서의 감독 자율권이 한 현장 안에 함께 존재했다. ‘꼬방동네 사람들’은 두 조건 사이에서 제목과 인물, 공동체의 생활을 지켜낸 첫 결과였다.
한국영상자료원은 2017년 디지털 보정을 거친 ‘꼬방동네 사람들’ 블루레이를 출시했다. 1982년 해외 수출금지 조치를 받았던 영화에 영어와 일본어 자막이 실렸다. 검열은 영화의 국외 상영을 막았지만, 배창호 감독이 지킨 제목과 꼬방동네 주민들의 삶은 35년 뒤 다른 언어의 관객을 만날 수 있는 기록으로 남았다.
후원=NH농협 302-1678-6497-21 위대한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