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푸른 물속에 떠오른 물고기와 낯선 생명체, 소용돌이치는 색채…1986년 대형 유화에서 자연의 재현을 넘어 생명의 관계와 상상력을 확장한 쉬가예프
[KtN 박준식기자]짙은 남색의 물속에 붉은 머리를 가진 물고기가 떠 있다. 노란 몸통의 물고기는 왼쪽에서 중앙으로 헤엄치고, 아래쪽에는 검은 몸과 붉은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가 방향을 틀고 있다. 물고기 사이로 흰 물줄기와 녹색 수초가 뒤엉키며 작은 생명체와 둥근 형상들이 곳곳에 흩어진다.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Yuristanbek Shygaev)의 1986년작 ‘수중 세계(Undersea World)’는 바닷속 생태를 사실적으로 재현한 풍경보다 현실의 생명체와 상상 속 형상이 함께 움직이는 공간에 가깝다. 물고기의 몸은 선명하지만 물의 흐름은 일정하지 않고,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푸른 공간에서는 생명과 색채가 서로의 경계를 넘나든다.
작품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짙은 청색과 보라색이다. 상단에는 거의 검정에 가까운 어두운 색이 놓이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청색과 녹색, 자주색이 서로 뒤섞인다. 바닷속의 깊이를 명암과 원근법으로 설명하기보다 색의 농도와 움직임으로 공간을 만든다. 물고기들은 서로 다른 높이에 떠 있지만 크기의 차이가 실제 거리와 정확하게 대응하지 않는다. 가까운 물고기와 먼 물고기를 구별하는 기준도 일정하지 않다. 깊은 물속을 들여다보는 시점과 물고기들을 정면에서 마주하는 시점이 한 작품에 공존한다.
상단 오른쪽의 붉은 물고기는 흰색의 거친 흔적에 둘러싸여 있다. 둥근 머리와 커다란 눈은 분명하지만 몸통은 흰 선과 푸른 물결 사이에서 흐려진다. 물고기의 형태를 완결된 윤곽으로 닫지 않고 주변의 물과 연결한 구성이다. 반대로 왼쪽의 노란 물고기는 몸통과 꼬리, 지느러미가 비교적 또렷하다. 노란색과 붉은색의 강한 대비가 어두운 배경에서 물고기를 앞으로 끌어낸다. 같은 물속에 있지만 두 물고기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노란 물고기의 몸에는 짙은 청색의 선이 지나간다. 몸통을 가로지르는 선은 단순한 무늬처럼 보이면서도 주변의 물과 연결된다. 물고기와 물을 완전히 분리하지 않은 것이다. 쉬가예프는 물속의 생명체를 배경 앞에 따로 놓지 않는다. 물고기의 몸을 구성하는 색과 선이 주변으로 흘러가고, 물의 움직임이 다시 물고기의 형태를 침범한다. 생명체와 환경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색채를 통해 만들어진다.
작품 하단의 검은 물고기는 앞선 두 물고기보다 훨씬 무겁다. 검은 몸통에는 작은 노란색 무늬가 흩어져 있고 머리에는 붉은색이 들어간다. 등과 꼬리에서 뻗은 지느러미는 가늘고 긴 선으로 갈라지며 주변의 푸른 공간을 가른다. 몸통을 감싸는 밝은 띠는 검은색과 강하게 대비돼 물고기의 부피를 강조한다. 커다란 눈은 관람자 쪽을 향하지만 몸은 왼쪽 아래로 기울어져 있다. 정지한 초상처럼 얼굴을 드러내면서도 지느러미와 몸의 방향에서는 이동감이 생긴다.
세 물고기의 배치는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상단의 붉은 물고기는 왼쪽을 향하고, 중앙의 노란 물고기는 오른쪽을 향하며, 하단의 검은 물고기는 다시 왼쪽으로 몸을 돌린다. 서로 다른 방향의 움직임이 작품 전체에 반복된다. 물고기들이 한곳을 향해 이동하거나 하나의 사건을 구성하지 않기 때문에 관람자의 시선도 어느 한 지점에 고정되지 않는다.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다가 다시 중앙의 물줄기와 수초를 따라 돌아오게 된다.
물고기 사이에 들어간 둥근 형상들은 작품을 더욱 낯설게 만든다. 오른쪽 중앙의 원형에는 녹색과 청색, 노란색이 작은 구획으로 나뉘어 있다. 외곽은 짙은 선으로 둘러싸였고 내부에는 눈처럼 보이는 작은 원들이 반복된다. 바닷속 생물을 연상시키면서도 하나의 기호나 문양처럼 읽힌다. 아래쪽의 작은 노란 원형 역시 방사형의 선을 지니고 있다. 주변에 떠 있는 물고기와 달리 둥근 형상들은 일정한 방향으로 헤엄치지 않는다. 물속에 정지한 표식처럼 놓이면서 작품의 움직임에 다른 리듬을 더한다.
쉬가예프의 후기 작품에서 전통 문양과 기호, 신화적 동물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수중 세계’의 둥근 형상들은 흥미롭다. 구체적인 생명체와 추상적인 기호가 하나의 공간에 놓이는 방식이 이미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만 작품의 중심은 특정 신화의 내용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다. 물고기의 눈과 지느러미, 둥근 형상의 반복, 물속을 가로지르는 선이 서로 연결되면서 현실에서 출발한 자연이 새로운 조형적 질서로 바뀐다.
수초의 표현도 물고기만큼 중요하다. 왼쪽에서는 짙은 녹색과 검은색의 가느다란 선이 위로 솟고, 오른쪽에는 밝은 녹색과 흰색이 뒤섞인 긴 줄기들이 수직으로 뻗는다. 하단에는 붉은색과 노란색, 녹색의 짧은 붓질이 밀집돼 있다. 물속 식물의 형태를 정밀하게 구별하기보다 선의 방향과 색의 차이로 다양한 움직임을 만든다. 긴 선은 위로 자라고 짧은 붓질은 좌우로 흩어진다. 물고기의 곡선과 수초의 수직선이 겹치면서 물속은 정적인 배경에서 벗어난다.
작품 중앙을 지나 아래로 퍼지는 흰색과 옅은 청색의 흐름은 물고기와 수초를 하나의 공간으로 묶는다. 상단에서 내려온 밝은 흔적은 중앙에서 여러 방향으로 갈라지고 하단에서는 청색과 녹색에 섞인다. 물의 흐름을 일정한 선으로 설명하지 않고 밝은 색이 어두운 바탕을 뚫고 지나가는 방식으로 표현했다. 물고기의 몸과 수초의 윤곽도 이 흐름에 부분적으로 가려진다. 생명체가 물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보다 물과 생명체가 같은 움직임에 참여하고 있다는 인상이 강해진다.
‘수중 세계’의 색채는 쉬가예프가 1980년대 판화에서 실험했던 방식과도 연결된다. ‘해가 진다’에서는 넓은 하늘과 비탈을 큰 색면으로 나눴고, ‘비둘기를 든 소녀’에서는 짙은 청색의 말과 밝은 인물을 한 공간에 배치하면서 자연스러운 색채와 원근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에티오피아의 거리 풍경에서는 붉은 하늘과 노란 벽이 실제 장소를 강렬한 색의 구조로 바꿨다. ‘수중 세계’에서는 이러한 색채의 자유가 캔버스 전체로 확장된다. 청색과 보라색은 물의 깊이를 만드는 동시에 다른 색을 받아들이는 넓은 바탕이 되고, 노란색과 붉은색은 물고기의 몸을 이루면서 작품 곳곳에 시각적 중심을 만든다.
판화와 유화의 차이도 작품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색채 리놀륨 판화에서는 선과 색면의 경계가 상대적으로 또렷하게 남는 경우가 많지만, ‘수중 세계’에서는 붓질이 서로 겹치고 색이 섞인다. 물고기의 몸에는 비교적 강한 윤곽이 남아 있는 반면 주변의 물과 수초는 자유로운 붓질로 퍼진다. 선명한 형상과 불규칙한 색의 흔적이 한 캔버스에서 만나는 방식이다. 쉬가예프는 물고기를 알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 남겨두면서도 주변의 물을 일정한 형태로 고정하지 않았다.
1987년 ‘지진’에서 쉬가예프는 검은 선을 사방으로 교차시키며 현실의 형상을 해체했다. ‘수중 세계’는 그보다 한 해 앞선 작품이지만 구상과 추상이 동시에 작동하는 조형적 탐색을 이미 보여준다. 물고기의 눈과 몸통은 구체적이고 물의 흐름과 바닥의 붓질은 추상적이다. 생명체의 형태가 명확해지는 부분과 색채가 자유롭게 움직이는 부분이 반복되면서 작품은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지 않는다.
1986년 ‘비둘기를 든 소녀’와 비교하면 인간과 동물을 다루는 방식의 차이도 드러난다. ‘비둘기를 든 소녀’에서는 소녀와 말, 비둘기가 한 공간에 놓였고 서로 다른 크기와 방향이 작품의 긴장을 만들었다. ‘수중 세계’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물고기와 수초, 둥근 형상들이 서로 다른 위치에서 관계를 맺는다. 쉬가예프가 관심을 기울인 것은 동물의 정확한 생태를 설명하는 일이 아니라 생명체들이 함께 존재하는 공간의 질서를 만드는 일이었다.
물고기들은 서로를 직접 바라보지 않는다. 상단의 붉은 물고기와 중앙의 노란 물고기, 하단의 검은 물고기는 각자의 방향을 유지한다. 그러나 색채는 서로 연결된다. 붉은색은 물고기의 머리와 지느러미뿐 아니라 작품 아래쪽의 붓질에도 나타나고, 노란색은 중앙의 물고기에서 작은 원형과 수초의 끝부분으로 퍼진다. 청색과 보라색은 물고기 사이를 채우면서 생명체들을 하나의 공간 안에 묶는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형태보다 색을 통해 연결되는 구성이다.
물고기의 눈이 유난히 크게 강조된 점도 눈에 띈다. 중앙의 노란 물고기와 하단의 검은 물고기는 둥근 눈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상단의 붉은 물고기 역시 눈이 얼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눈은 생명체를 알아보게 하는 특징이면서 주변의 추상적인 붓질과 구별되는 강한 시각적 중심이다. 물고기들은 실제 생물의 비례보다 눈과 머리의 형태가 강조되면서 친숙하면서도 낯선 존재가 된다.
이러한 변형은 쉬가예프가 이후 신화적 동물을 다루는 방식과 연결된다. 후기 작품에서 동물은 자연의 일부이면서 인간의 기억과 신화적 상상력을 담는 형상으로 확장된다. ‘수중 세계’에서는 물고기가 아직 구체적인 생물의 모습을 유지하지만 현실의 공간과 비례에서 벗어난 색채와 구성 속에 놓인다. 생명체를 실제 모습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형태와 색을 조절해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방식이 이미 자리 잡고 있다.
작품의 규모 역시 물속 공간을 경험하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세로로 긴 대형 캔버스는 물고기들을 한눈에 나열하기보다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여러 층에 배치한다. 상단의 어두운 영역에서 중앙의 푸른 공간을 지나 하단의 복잡한 수초와 물고기까지 시선이 이동한다.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색과 선의 밀도가 높아지고, 물고기의 지느러미와 수초, 짧은 붓질이 서로 겹친다. 넓은 캔버스 안에서 관람자는 한 마리의 물고기를 보는 데 머물지 않고 물속의 여러 움직임을 따라가게 된다.
상단의 검은색과 남색은 작품의 깊이를 만들지만 아래쪽의 밝은 색들이 반드시 얕은 물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쉬가예프는 물의 깊이를 실제 수심에 맞춰 단계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을 불규칙하게 섞으면서 물속 공간을 하나의 유동적인 구조로 만들었다. 물고기들의 위치도 현실적인 원근에 종속되지 않는다. 깊이와 거리보다 색채와 형상의 관계가 우선하는 공간이다.
쉬가예프의 후기 작업을 특징짓는 신화적 상상력은 현실에서 출발한 형상을 완전히 버리는 방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사람과 동물, 산과 자연을 관찰하면서 형태를 압축하고 색을 바꾸고 서로 다른 존재들을 새로운 관계 안에 놓는 과정이 이어졌다. ‘수중 세계’에서는 인간의 형상이 빠진 자리를 물고기와 수초, 기호처럼 읽히는 둥근 형상들이 채운다. 자연의 생명체는 알아볼 수 있는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현실의 질서에 묶이지 않는다.
1986년의 ‘수중 세계’는 쉬가예프의 작업에서 자연이 단순한 풍경을 넘어 독립적인 상상력의 공간으로 넓어지는 흐름을 담고 있다. 짙은 청색과 보라색 속에서 물고기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수초는 위로 뻗으며, 작은 원형들은 생명체와 기호의 경계에 머문다. 붉은색과 노란색은 어두운 물속을 가로질러 반복되고, 흰색의 흐름은 서로 떨어진 형상들을 연결한다.
물고기와 수초를 이루는 구체적인 형태는 끝까지 남아 있다. 동시에 물의 흐름과 색채는 현실의 경계를 넘어선다. 쉬가예프는 바닷속을 있는 그대로 옮기기보다 생명체들이 서로 다른 방향과 속도로 존재하는 세계를 만들었다. ‘수중 세계’에서 시작된 구상과 추상의 공존, 자연의 생명체를 낯선 형상으로 바꾸는 조형적 실험은 이후 인간과 동물, 신화와 기억이 함께 등장하는 쉬가예프의 회화로 이어지는 중요한 흐름을 이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