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가난과 인간의 욕망을 지나, 상실 뒤에도 남아 있는 온기로
드뷔시의 ‘달빛’과 함께 읽는 배창호의 영화 인생과 침묵의 미학

 

[KtN 임우경·박준식 기자] 배창호 감독의 유년기에는 장면보다 오래 남은 선율이 있다. 어머니와 극장을 다니던 시절 만난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이다. K trendy NEWS와의 인터뷰에서 배 감독은 꿈처럼 희미해진 장면의 기억을 더듬으면서도 주제 선율을 떠올렸다. 니노 로타가 음악을 맡은 1954년 작품이다.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기 전부터 영화의 감정은 어린 관객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

훗날 배창호의 영화에도 줄거리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남았다. ‘꼬방동네 사람들’의 가난한 이웃들, ‘깊고 푸른 밤’의 욕망에 사로잡힌 남녀,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아내를 떠나보낸 영민은 서로 다른 삶을 산다. 관객의 기억에는 사건의 결말과 함께 외로움과 그리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무게가 쌓인다. 화면이 사라진 뒤에도 인물의 삶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배창호의 영화에서 클로드 드뷔시의 ‘달빛(Clair de lune)’을 연상하게 하는 대목도 감정의 지속에 있다. 다음 음을 듣는 동안에도 앞선 소리의 울림은 겹쳐 흐른다. 배창호의 인물들 역시 지나간 만남과 상처를 품은 채 살아간다. 과거는 회상 장면에 머물지 않고 현재의 표정과 선택에 스며든다.

‘달빛’의 문학적 배경인 폴 베를렌의 동명 시에는 행복을 노래하면서도 자신의 행복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듯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가면 아래 감춰진 슬픔과 달빛의 아름다움이 한 풍경 안에 공존한다. 드뷔시는 베를렌의 시 제목을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의 세 번째 곡에 붙였다. 모음곡은 1890년 무렵 쓰이기 시작해 수정을 거쳐 1905년 출판됐다.

슬픔과 아름다움을 함께 받아들이는 감각은 배창호의 영화를 읽는 실마리가 된다. 인물이 웃는 순간에도 가난은 남아 있고, 사랑을 시작한 뒤에도 불안은 계속된다. 생활의 조건과 마음이 바라는 삶 사이에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있다. 배창호는 고단한 현실을 담으면서도 타인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사람들의 행동을 놓치지 않았다.

영화 인생에도 여러 갈래의 경험이 쌓였다. 배우를 꿈꾸던 소년은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며 연극 무대에 섰다. 현대종합상사에 입사해 케냐에서 근무한 뒤에는 이장호 감독의 연출부에 합류했다. 본지 인터뷰에서는 대학 졸업 무렵 시나리오를 들고 영화사를 찾아다녔던 일부터 해외 근무와 충무로 입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돌아봤다. 영화에 대한 동경은 직장생활과 제작 현장을 거치며 구체적인 직업이 됐다.

1982년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에서 도시 빈민의 삶을 다루는 일은 검열과 맞닿아 있었다. 사전 시나리오 심의 과정에서 60여 군데를 수정해야 했다. 도시화가 남긴 가난을 화면에 담는 작업부터 제약을 받던 시절이었다. 배창호는 명숙과 주석, 태섭의 얽힌 관계 속에 가족과 생계, 이웃 사이의 갈등을 담았다.

공동화장실 앞에 줄을 서고 빨래터에서 다투던 주민들은 홀로 지내는 이웃의 환갑잔치도 함께 준비한다. 궁핍은 생활을 제한하지만 감정 전체를 결정하지는 못한다. 주민들에게는 질투와 분노, 체면과 자존심이 있고, 다른 사람의 사정에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도 있다. 가난이라는 말로 묶이기 쉬운 사람들이 저마다의 성격과 사연을 지닌 인물로 살아난다.

배 감독은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공유하고 소통할 수 있는 정서를 이야기하며 “정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했다. ‘꼬방동네 사람들’의 공동체에도 갈등과 돌봄이 함께 있다. 상대의 흠을 알면서도 잔칫상을 마련하고 같은 자리에 앉는 관계다. 배창호가 포착한 온기는 생활 속에서 마음을 쓰는 작은 행동으로 드러난다.

서정이 깊어질수록 현실을 얼마나 남겨둘 것인지도 중요해진다. 공동체의 정겨움만 강조하면 궁핍이 견딜 만한 풍경으로 바뀌고, 비참함만 부각하면 사람은 불행의 사례로 굳어진다. ‘꼬방동네 사람들’은 웃음과 다툼, 돌봄을 함께 담으며 양쪽의 위험 사이를 지난다. 사회적 조건과 개인의 내면을 동시에 살피는 배창호의 리얼리즘이 출발한 자리다.

사랑에 대한 시선도 낙관으로만 채워지지 않았다. 배 감독은 인터뷰에서 집착과 소유, 질투를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혼동을 경계했다. 자신 역시 영화를 보며 욕망을 사랑으로 이해했던 경험을 돌아봤다. 관객으로서 받아들인 감정을 창작자의 자리에서 다시 헤아리게 된 것이다.

‘깊고 푸른 밤’(1985)의 백호빈과 제인은 같은 결혼생활 안에서 다른 미래를 꿈꾼다. 영주권을 얻으려는 호빈에게 계약결혼은 미국에서 원하는 삶을 시작하기 위한 수단이다. 제인에게는 함께 지내는 동안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계약의 종료를 기다리는 남자와 사랑의 지속을 바라는 여자의 기대가 어긋난다.

외로움 때문에 누군가를 찾았다는 사실만으로 상대를 이해하게 되지는 않는다. 성공을 향한 절박함은 다른 사람의 삶을 자신의 계획에 필요한 조건으로 바꿔놓는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 역시 상대를 붙잡으려는 집착과 뒤섞인다. ‘깊고 푸른 밤’의 냉혹함은 배창호의 영화 전체를 따뜻한 위로로 묶기 어렵게 한다.

배창호의 ‘달빛’도 상처와 폭력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찾아야 한다. 아름다운 풍경이 인물의 잘못을 덮거나 비극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포장하면 현실의 무게는 가벼워진다. 사랑과 소유를 구분하고,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감정만으로 설명하지 않으려는 태도까지 살필 때 배창호의 서정은 깊이를 얻는다. 인간에 대한 연민에는 인간이 저지르는 잘못을 바라보는 냉정함도 필요하다.

‘황진이’(1986)에서는 인물을 바라보는 거리와 호흡이 달라졌다. 배창호와 촬영감독 정일성은 인물을 화면 한쪽에 배치하고 주변의 여백을 드러냈다. 절제된 리듬의 롱테이크 안에서 얼굴뿐 아니라 몸의 움직임과 풍경도 시선을 받는다. 감정은 표정에 응축되면서 주변 공간으로 번진다.

대사가 끝난 뒤에도 화면이 이어지면 관객은 인물의 자세와 사람 사이의 거리를 살피게 된다. 말로 전달되지 않은 감정을 헤아리는 시간이 생긴다. ‘황진이’의 침묵은 관객에게 기다림을 요구한다. 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까지 필요한 시간을 영화의 호흡 안에 담은 셈이다.

배 감독은 본지 인터뷰에서 “자연스럽다는 거하고 사실적이라는 거하고 다릅니다”라고 말했다. 카메라와 배우가 개입한 영화는 선택과 구성을 거친 세계라는 설명이었다. 무엇을 남기고 덜어낼지, 어느 거리에서 얼마나 오래 바라볼지에 따라 같은 대상도 다르게 다가온다. 자연스러운 표현은 세심한 판단과 절제 속에서 만들어진다.

[영상] 배창호의 Clair de lune.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영상] 배창호의 Clair de lune.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드뷔시의 ‘달빛’에도 정교한 조절이 있다. 부드럽게 시작한 음악은 중간부의 활발한 분산화음을 거쳐 처음의 선율을 변형해 되돌려놓는다. 마지막 고요에는 앞서 지나온 고조와 흔들림의 기억이 남는다. 비슷한 선율을 다시 듣더라도 처음의 감정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배창호의 영화에서 사랑도 지나온 경험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의 영민은 오랜 기다림 끝에 혜린과 결혼하지만, 출산 직후 아내를 잃는다. 마지막 장면에는 시간이 흐른 뒤 딸과 함께 덕수궁을 찾은 영민이 등장한다. 평범한 나들이에도 혜린의 부재가 함께한다.

영민에게 사랑은 기다림과 결혼을 거쳐 아이를 돌보는 생활로 이어진다. 혜린을 잃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상실 이후의 일상에는 슬픔과 기쁨이 함께 남는다. 영화 제목에 놓인 ‘기쁜’이라는 말도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처음보다 복잡하고 깊은 감정으로 다가온다.

자신과 아내 김유미가 주연을 맡은 ‘러브스토리’(1996)에서 배창호는 생활의 차이로 부딪치는 남녀를 연기했다. 성격과 습관이 다른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가 다투고 헤어진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있어도 함께 살아가는 법은 따로 배워야 한다. 사랑의 어려움은 특별한 비극뿐 아니라 일상의 작은 마찰 속에서도 드러난다.

2004년 완성돼 2006년 개봉한 ‘길’에서는 떠돌이 대장장이 태석을 직접 연기했다. 태석은 여정에서 만난 신영이 오랫동안 원망해온 친구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과거의 배신과 눈앞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맞물린다. 오래된 상처를 품은 채 타인에게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가 여정의 방향을 결정한다.

도시의 가난, 성공을 향한 욕망, 사랑 이후의 상실, 원망을 안고 이어가는 동행은 서로 다른 이야기다. 배창호는 작품마다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정을 들여다봤다. 사건이 끝난 뒤에도 관계의 흔적은 남는다. 누군가 떠난 뒤에도 함께한 경험은 남은 사람의 삶을 바꾼다.

배 감독은 인터뷰에서 창작자에게 저마다의 ‘매장량’이 있다고 말했다. 오래 알고 지낸 세계의 세부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작품의 바탕이 된다는 취지였다. 깊이를 갖추는 데 필요한 시간, 감독이 계속 작업할 수 있는 환경도 함께 언급했다. 삶의 경험을 작품으로 옮기려면 축적뿐 아니라 다시 생각하고 표현할 기회가 필요하다.

2025년 박장춘 감독과 공동연출한 다큐멘터리 ‘배창호의 클로즈 업’에서는 자신의 영화 촬영지를 다시 찾았다. ‘꼬방동네 사람들’의 서울과 ‘고래사냥’의 동해, ‘깊고 푸른 밤’의 미국을 돌아보며 공간과 작품, 삶의 관계를 이야기했다. 어린 시절 영화의 선율을 간직했던 관객은 감독이 돼 남겨둔 장소로 돌아가, 지난 경험을 새로운 영화에 담았다.

배창호의 영화에 남는 빛은 상실을 겪고도 누군가의 곁을 지키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가난한 이웃의 잔칫상을 함께 차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뒤에도 아이와 하루를 살아가는 마음이다. 드뷔시의 아르페지오가 음을 하나씩 이어 울림을 넓히듯, 배창호는 평범한 사람들의 사연을 쌓아 삶의 어두운 곳까지 감정이 닿게 했다.

빛을 품은 달처럼, 배창호의 영화 인생에는 어둠을 오래 바라본 눈과 사람을 향한 온기가 함께 있다. 실패와 이별 앞에서 방황하는 관객에게 화면 속 얼굴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볼 시간을 건넨다. 영화가 끝나도 마음에 스치우는 표정과 침묵, 문득 떠오르는 선율은 일상으로 돌아간 뒤에도 희미하게 빛난다. 배창호의 ‘Clair de lune’은 관객의 기억 속에서 이어진다. 고단한 삶에 스며들어 오래 머무는 예술의 향기처럼. 배창호의 영화의 길... 달빛 머문 그 남자의 영화 향기가 달빛에 새기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