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비의 기억과 무홀리의 응시, 웨이언트의 장미와 무르니아시의 신체…2027년을 앞두고 다시 깊어지는 예술의 감각

[KtN 박준식기자]2025년 12월 벨기에 앤트워프에서 꽃으로 가득한 실내를 그린 회화가 31만1046달러에 낙찰됐다. 한 달여 뒤 미국 뉴저지에서는 장미 네 송이를 그린 정물화가 30만4800달러에 거래됐다. 한 작품에는 꽃과 식물, 화병과 사람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고, 다른 작품에는 어두운 벽과 금속 화병, 흰색 테이블만 남아 있다. 같은 꽃을 소재로 삼았지만 색채와 공간, 빛을 다루는 방식은 전혀 달랐다.

벨기에 화가 벤 슬레드센스(Ben Sledsens·1991년생)의 'The Flower Store'(2015)와 캐나다 출신 애나 웨이언트(Anna Weyant·1995년생)의 'Josephine'(2020)이다. 슬레드센스는 선명한 색채와 장식적인 형태로 실내를 채웠고, 웨이언트는 꽃잎에 닿는 빛과 어둠을 세밀하게 구분했다. 두 화가가 같은 소재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은 서로 다른 회화적 질서로 완성됐다.

2025년 7월부터 2026년 6월까지 세계 현대미술 경매시장에 등장한 여덟 작품은 2003년부터 2023년 사이에 제작됐다. 나이지리아 출신 은지데카 아쿠닐리 크로스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자넬레 무홀리, 인도네시아의 무르니아시, 인도의 레카 로드위티야, 미국의 루이스 프라티노, 중국의 류웨이까지 작가의 출신 지역과 세대도 폭넓다. 회화와 판화, 드로잉과 사진에 담긴 것은 각자가 경험한 삶의 시간과 인간의 몸, 자연과 일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이다.

인공지능이 이미지를 빠르게 생산하고 디지털 기록이 일상의 일부가 된 시대에도 예술은 한 사람의 경험이 특정한 형태와 색채로 남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오랫동안 쌓인 기억과 신체에 새겨진 감각,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는 작가마다 다르다. 여덟 작품에는 기술이 대신하기 어려운 개인의 역사와 조형적 선택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담겨 있다.

슬레드센스의 'The Flower Store'에는 흰색 상의와 푸른색 바지를 입은 인물이 꽃들 사이에 서 있다. 붉은 바닥에는 파란 화병과 노란 항아리가 놓여 있고, 작은 꽃과 넓은 잎들이 실내를 채운다. 오른쪽에는 검은 창틀이, 왼쪽에는 화분을 올려놓은 선반이 있다. 수직으로 솟은 식물과 아래로 늘어진 잎, 둥글게 펼쳐진 꽃잎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어지며 밀도 높은 구성을 이룬다.

벤 슬레드센스(Ben Sledsens), 'The Flower Store'(2015). 회화, 200×180㎝. 2025년 12월 3일 벨기에 앤트워프 베르나르츠 경매에서 추정가 17만5072~23만3429달러, 수수료 포함 31만1046달러에 낙찰됐다. 이미지 출처=Artprice by Artmarket, 'The 2026 Contemporary Art Market Report'
벤 슬레드센스(Ben Sledsens), 'The Flower Store'(2015). 회화, 200×180㎝. 2025년 12월 3일 벨기에 앤트워프 베르나르츠 경매에서 추정가 17만5072~23만3429달러, 수수료 포함 31만1046달러에 낙찰됐다. 이미지 출처=Artprice by Artmarket, 'The 2026 Contemporary Art Market Report'

꽃과 잎은 실제 식물의 형태보다 단순하고 장식적으로 표현됐다. 짙은 녹색의 잎은 붉은 꽃과 맞닿고, 푸른 화병은 노란 항아리와 대비된다. 중앙의 인물은 주변 식물보다 간결하게 그려져 여러 색채 사이에서 시선을 모은다. 화병과 식물의 크기, 벽과 창문의 깊이도 일정한 원근법에 얽매이지 않는다. 앙리 마티스와 앙리 루소의 회화를 연상시키는 강한 색채와 평면적인 구성이 익숙한 꽃가게를 독자적인 회화의 공간으로 바꿨다.

웨이언트의 'Josephine'에는 크림색 장미 네 송이가 좁고 긴 금속 화병에 꽂혀 있다. 꽃잎은 짙은 갈색 벽 앞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펼쳐져 있고, 아래쪽의 흰색 테이블에는 길게 뻗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벽면에 반복되는 작은 무늬는 어두운 색조에 묻혀 가까이 살펴볼 때 드러난다.

애나 웨이언트(Anna Weyant), 'Josephine'(2020). 아마포에 유채, 91×61㎝. 2026년 1월 28일 미국 뉴저지주 램버트빌 라고(Rago) 경매에서 추정가 15만~25만 달러, 수수료 포함 30만4800달러에 낙찰됐다. 이미지 출처=Artprice by Artmarket, 'The 2026 Contemporary Art Market Report'.
애나 웨이언트(Anna Weyant), 'Josephine'(2020). 아마포에 유채, 91×61㎝. 2026년 1월 28일 미국 뉴저지주 램버트빌 라고(Rago) 경매에서 추정가 15만~25만 달러, 수수료 포함 30만4800달러에 낙찰됐다. 이미지 출처=Artprice by Artmarket, 'The 2026 Contemporary Art Market Report'.

장미의 꽃잎은 밝은 가장자리에서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갈색 그림자가 깊어진다. 접히거나 말린 부분에는 좁은 반사광이 남아 꽃잎의 두께와 굴곡을 드러낸다. 금속 화병의 매끄러운 표면과 부드러운 꽃잎, 흰색 테이블의 질감도 빛의 차이로 구분된다. 17세기 유럽 정물화에서 발전한 명암과 사물의 배치를 활용하면서 색채는 크림색과 갈색, 회색으로 제한했다.

슬레드센스의 꽃가게가 강한 색채와 식물의 형태로 공간을 넓게 펼쳐 보인다면 웨이언트의 정물은 제한된 사물 사이에 깊이를 만든다. 화병의 반사광과 꽃잎의 그림자는 아주 작은 밝기의 차이로 분리된다. 꽃의 수가 적어도 형태와 질감은 더욱 세밀하게 구분된다. 같은 식물을 그리면서도 한쪽은 색채의 풍요로움을, 다른 한쪽은 빛이 머무는 시간을 강조했다.

중국 화가 류웨이(Liu Wei·1965년생)의 'Landscape'(2004)에는 자연의 또 다른 모습이 담겨 있다. 위쪽에는 짙은 녹색의 나무들이 모여 있고, 가운데에는 붉은 갈색의 흙과 바위 사이로 밝은 물길이 이어진다. 아래쪽에서는 녹색과 청록색, 옅은 노란색이 서로 스며들어 물과 식물의 경계가 흐려진다. 세로 28㎝, 가로 24㎝의 작은 종이에 숲과 흙, 물의 흐름이 담겼다.

류웨이(Liu Wei), 'Landscape'(2004). 종이에 수채, 28×24㎝. 2026년 4월 8일 홍콩 차이나가디언 경매에서 추정가 1만9152~3만1920달러, 수수료 포함 3만8304달러에 낙찰됐다. 이미지 출처=Artprice by Artmarket, 'The 2026 Contemporary Art Market Report'.
류웨이(Liu Wei), 'Landscape'(2004). 종이에 수채, 28×24㎝. 2026년 4월 8일 홍콩 차이나가디언 경매에서 추정가 1만9152~3만1920달러, 수수료 포함 3만8304달러에 낙찰됐다. 이미지 출처=Artprice by Artmarket, 'The 2026 Contemporary Art Market Report'.

1990년대 중국 현대미술에서 풍자적인 인물화로 알려진 류웨이는 이후 자연과 풍경으로 작업의 폭을 넓혔다. 'Landscape'에서는 물감이 종이에 스며들며 남긴 자국이 나무와 흙, 물의 형태를 만든다. 작은 녹색 얼룩은 식물의 잎을, 붉은 갈색이 겹친 부분은 바위와 흙의 질감을 떠올리게 한다. 자연의 윤곽보다 물감의 농도와 번짐이 두드러지는 수채화다.

슬레드센스가 선명한 색채로 식물의 형태를 구분하고 웨이언트가 명암으로 장미의 부피를 표현했다면 류웨이는 물감이 스며드는 과정에 자연의 모습을 맡겼다. 붓질과 물의 흔적이 남은 자리에 풍경이 생겨났다. 자연이라는 오래된 회화의 소재는 세 작가의 서로 다른 감각을 거치며 각기 다른 밀도와 시간으로 나타난다.

은지데카 아쿠닐리 크로스비(Njideka Akunyili Crosby·1983년생)의 'The Beautyful Ones May Have Arrived'(2023)에는 기하학적 무늬의 옷을 입은 여성이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다. 왼쪽에는 금속 난방기가 있고, 오른쪽의 둥근 탁자에는 그릇과 유리컵, 푸른색 석유등이 놓여 있다. 바닥과 사물의 일부에는 오래된 사진과 인쇄 이미지가 촘촘하게 겹쳐 있다. 여성이 바라보는 오른쪽 벽면에는 넓은 빈 공간이 남아 있다.

은지데카 아쿠닐리 크로스비(Njideka Akunyili Crosby), 'The Beautyful Ones May Have Arrived'(2023). 컬러 실크스크린 판화, 75.9×101.3㎝, 에디션 60점 중 41번. 2026년 4월 13일 미국 뉴욕 본햄스 경매에서 추정가 2만5000~3만5000달러, 수수료 포함 2만8160달러에 거래됐다. 이미지 출처=Artprice by Artmarket, 'The 2026 Contemporary Art Market Report'.
은지데카 아쿠닐리 크로스비(Njideka Akunyili Crosby), 'The Beautyful Ones May Have Arrived'(2023). 컬러 실크스크린 판화, 75.9×101.3㎝, 에디션 60점 중 41번. 2026년 4월 13일 미국 뉴욕 본햄스 경매에서 추정가 2만5000~3만5000달러, 수수료 포함 2만8160달러에 거래됐다. 이미지 출처=Artprice by Artmarket, 'The 2026 Contemporary Art Market Report'.

크로스비는 나이지리아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미국에서 이어진 생활을 가족사진과 대중매체의 이미지, 아프리카 직물의 무늬에 결합해 왔다. 여성의 드레스에는 여러 색의 기하학적 무늬가 반복되고, 바닥과 난방기의 일부에는 인쇄 이미지가 옮겨져 있다.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비롯된 사진들이 하나의 실내에 모이면서 개인의 역사가 공간의 표면에 남는다.

여성의 등 뒤와 발밑에는 오래된 기록이 쌓여 있지만 얼굴은 밝고 비어 있는 벽을 향한다. 과거의 이미지는 인물을 둘러싸고 있고, 시선은 아직 구체적인 형상이 없는 곳에 머문다. 크로스비는 2013년 제작한 회화를 바탕으로 2023년 판화를 만들면서 수십 가지 색을 이용한 실크스크린 인쇄로 이미지와 직물, 사물의 질감을 다시 구성했다. 축적된 기억은 작품 안에서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이루는 재료가 됐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진가 자넬레 무홀리(Zanele Muholi·1972년생)는 자신의 신체를 기록의 대상으로 삼았다. 'Qiniso I, The Sails, Durban'(2019)에서 검은 머리카락 위에는 흰색과 회색의 아프로 빗이 여러 개 꽂혀 있다. 빗의 손잡이는 왕관처럼 솟아 있고, 가느다란 빗살은 머리카락과 겹쳐진다. 어깨를 옆으로 돌린 인물은 얼굴만 정면을 향한다. 짙은 피부 사이에서 두 눈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자넬레 무홀리(Zanele Muholi), 'Qiniso I, The Sails, Durban'(2019). 'Somnyama Ngonyama' 연작, 젤라틴 실버 프린트, 49×33㎝, 에디션 3/8 및 작가용 에디션 2점. 2026년 4월 15일 프랑스 파리 피아사(Piasa) 경매에서 추정가 1만7703~2만3603달러, 수수료 포함 2만6670달러에 낙찰됐다. 작품 ©Zanele Muholi. 이미지 출처=Artprice by Artmarket, 'The 2026 Contemporary Art Market Report'.
자넬레 무홀리(Zanele Muholi), 'Qiniso I, The Sails, Durban'(2019). 'Somnyama Ngonyama' 연작, 젤라틴 실버 프린트, 49×33㎝, 에디션 3/8 및 작가용 에디션 2점. 2026년 4월 15일 프랑스 파리 피아사(Piasa) 경매에서 추정가 1만7703~2만3603달러, 수수료 포함 2만6670달러에 낙찰됐다. 작품 ©Zanele Muholi. 이미지 출처=Artprice by Artmarket, 'The 2026 Contemporary Art Market Report'.

무홀리는 흑인 성소수자의 삶과 공동체의 역사를 기록해 온 사진가다. 다른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남기던 작업은 2012년 시작한 'Somnyama Ngonyama' 연작에서 자신의 몸을 촬영하는 방식으로 확장됐다. 흑인의 자연 모발을 손질하는 아프로 빗은 왕관을 닮은 장식으로 바뀌었고, 피부의 어두운 색과 눈의 밝기는 강한 명암 대비를 이룬다.

크로스비의 실내에는 개인이 살아온 시간의 흔적이 쌓여 있고, 무홀리의 자화상에는 자신의 모습을 직접 결정하는 사진가의 태도가 담겨 있다. 크로스비의 여성은 등을 돌리고 앉아 있지만 무홀리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식민주의 시대에 사진이 사람을 분류하고 기록하는 도구로 사용됐던 역사까지 고려하면 무홀리의 응시는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닌다. 기록되는 존재의 위치와 이미지를 만드는 주체의 관계가 한 사람의 시선으로 다시 구성됐다.

인도네시아 발리 출신 화가 이 구스티 아유 카덱 무르니아시(I Gusti Ayu Kadek Murniasih·1966~2006)의 'Love and Food'(2003)에는 회색과 연두색의 두 신체를 연상시키는 형상이 등장한다. 얼굴을 닮은 부분들이 가까이 마주하고, 두 형상 사이에는 가느다란 붉은 곡선이 이어진다. 팔과 다리는 실제 비례보다 길게 늘어났으며 아래쪽에서는 손과 발, 몸통을 닮은 형태들이 겹쳐 있다.

이 구스티 아유 카덱 무르니아시(I Gusti Ayu Kadek Murniasih), 'Love and Food'(2003). 캔버스에 아크릴, 100×100㎝. 2025년 7월 12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라라사티(Larasati) 경매에서 추정가 2만1088~2만8898달러, 수수료 포함 2만5727달러에 낙찰됐다. 이미지 출처=Artprice by Artmarket, 'The 2026 Contemporary Art Market Report'
이 구스티 아유 카덱 무르니아시(I Gusti Ayu Kadek Murniasih), 'Love and Food'(2003). 캔버스에 아크릴, 100×100㎝. 2025년 7월 12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라라사티(Larasati) 경매에서 추정가 2만1088~2만8898달러, 수수료 포함 2만5727달러에 낙찰됐다. 이미지 출처=Artprice by Artmarket, 'The 2026 Contemporary Art Market Report'

무르니아시는 발리 전통 회화에서 익힌 선명한 윤곽과 평면적인 색채를 바탕으로 여성의 신체와 욕망을 표현했다. 'Love and Food'에서도 팔과 다리는 실제 인체의 구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굽어지고 연결된다. 붉은 윤곽선은 회색과 연두색의 형상을 구분하지만 신체가 겹치는 부분에서는 경계가 흐려진다. 인간의 몸은 고정된 비례에서 벗어나 접촉과 감각에 따라 변화하는 형태로 남았다.

인도 화가 레카 로드위티야(Rekha Rodwittiya·1958년생)의 'Second Skin'(2007)은 여성의 몸을 정면에 크게 세웠다. 밝은 피부의 인물은 양팔을 허리 쪽으로 굽히고 두 다리를 벌린 채 서 있다. 붉은 꽃이 달린 나뭇가지는 몸의 양옆으로 뻗어 있고, 검푸른 네발짐승은 다리 사이를 가로지른다. 황토색 배경에는 여성과 동물, 식물 외에 구체적인 장소를 설명하는 요소가 없다.

레카 로드위티야(Rekha Rodwittiya), 'Second Skin'(2007). 캔버스에 아크릴, 213×152㎝. 2026년 6월 24일 스위스 바젤 아르퀴리 뵈레 바이이 비드메르 경매에서 추정가 4926~7389달러, 수수료 포함 3만3928달러에 낙찰됐다. 이미지 출처=Artprice by Artmarket, 'The 2026 Contemporary Art Market Report'.
레카 로드위티야(Rekha Rodwittiya), 'Second Skin'(2007). 캔버스에 아크릴, 213×152㎝. 2026년 6월 24일 스위스 바젤 아르퀴리 뵈레 바이이 비드메르 경매에서 추정가 4926~7389달러, 수수료 포함 3만3928달러에 낙찰됐다. 이미지 출처=Artprice by Artmarket, 'The 2026 Contemporary Art Market Report'.

여성의 가슴과 복부, 팔과 다리는 넓은 색면과 가느다란 붉은 윤곽선으로 단순화됐다. 나뭇가지의 굽은 선은 인물의 팔과 비슷한 방향으로 이어지고, 검푸른 동물은 아래쪽에서 수평적인 움직임을 만든다. 무르니아시가 신체의 여러 부분을 연결하고 변형했다면 로드위티야는 여성의 몸을 크게 확대해 독립적인 존재감을 강조했다. 발리의 회화 전통과 인도의 여성주의 미술이라는 서로 다른 배경도 신체를 다루는 방식에 반영돼 있다.

미국 화가 루이스 프라티노(Louis Fratino·1993년생)의 'Untitled'(2018)는 한 사람의 몸을 좁은 종이에 압축했다. 두 발은 머리 위로 올라와 있고, 굽힌 다리 사이에 얼굴이 놓여 있다. 아래쪽에는 팔과 손이 겹쳐 있으며, 붉은색과 검은색의 짧은 선들이 피부의 굴곡을 따라 반복된다.

루이스 프라티노(Louis Fratino), 'Untitled'(2018). 상긴 드로잉, 23.5×16㎝. 2025년 11월 20일 미국 뉴욕 본햄스 경매에서 추정가 1만2000~1만8000달러, 수수료 포함 2만5600달러에 거래됐다. 이미지 출처=Artprice by Artmarket, 'The 2026 Contemporary Art Market Report'
루이스 프라티노(Louis Fratino), 'Untitled'(2018). 상긴 드로잉, 23.5×16㎝. 2025년 11월 20일 미국 뉴욕 본햄스 경매에서 추정가 1만2000~1만8000달러, 수수료 포함 2만5600달러에 거래됐다. 이미지 출처=Artprice by Artmarket, 'The 2026 Contemporary Art Market Report'

프라티노는 고전적인 인체 드로잉에 사용돼 온 적갈색 상긴(sanguine)으로 피부와 근육의 굴곡을 표현했다. 팔과 다리는 해부학적인 비례보다 크게 굽어 있고, 얼굴은 여러 신체 부위 사이에 작게 놓여 있다. 신체의 윤곽은 낯설지만 눈과 입술에는 절제된 표정이 남아 있다. 무르니아시의 몸이 서로 얽힌 관계를, 로드위티야의 인물이 독립적인 자세를 강조했다면 프라티노의 드로잉은 한 사람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움직임과 감각을 다뤘다.

세 작가는 인체의 형태를 변형하면서 서로 다른 경험을 표현했다. 무르니아시는 신체의 경계를 흐렸고, 로드위티야는 여성을 크게 세웠으며, 프라티노는 몸을 접어 좁은 공간에 배치했다. 신체를 표현하는 방식에는 각자가 살아온 사회와 문화, 개인의 감각이 배어 있다. 정확한 인체 비례보다 인간의 몸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방식이 작품의 형태를 결정했다.

2025~2026년 세계 현대미술 경매시장은 거래량에서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낙찰 작품은 20만7900점으로 역대 가장 많았고, 낙찰총액은 약 16억2200만 달러로 전년보다 6% 증가했다. 반면 평균 낙찰가격은 7806달러로 2.5% 내려갔다. 거래량의 증가와 평균가격의 하락이 동시에 나타나면서 작품마다 서로 다른 가격 흐름이 이어졌다.

여덟 작품의 낙찰가격은 2만 달러대부터 30만 달러대까지 분포했다. 슬레드센스의 'The Flower Store'는 31만1046달러, 웨이언트의 'Josephine'은 30만4800달러에 거래됐다. 류웨이의 'Landscape'는 3만8304달러, 로드위티야의 'Second Skin'은 3만3928달러였다. 크로스비의 판화와 무홀리의 사진은 각각 2만8160달러와 2만6670달러, 무르니아시의 'Love and Food'와 프라티노의 'Untitled'는 각각 2만5727달러와 2만5600달러를 기록했다.

작품의 크기와 거래가격은 일정한 관계를 이루지 않았다. 200×180㎝의 슬레드센스 회화와 약 91×61㎝의 웨이언트 정물화가 비슷한 가격에 거래됐고, 무르니아시의 100×100㎝ 회화와 프라티노의 작은 드로잉 역시 거의 같은 금액을 기록했다. 크로스비의 판화와 무홀리의 사진은 복수의 에디션이 존재한다. 작품의 매체와 제작 시기, 소장 이력과 시장 수요가 낙찰가격에 서로 다르게 반영됐다.

무르니아시는 2006년 세상을 떠난 뒤 국제 미술관과 비엔날레에서 재평가가 이어졌고, 2026년에는 다른 회화 'Tinggal Mimpi'가 홍콩 경매에서 10만 달러를 넘어서며 작가 최고가격을 경신했다. 무홀리는 흑인 성소수자의 삶과 정체성을 다룬 사진으로 국제 미술관의 전시와 수집 영역에서 활동을 이어왔다. 개별 작품의 경매가격과 작가의 미술사적 평가는 서로 다른 시간과 조건 속에서 형성된다.

작품의 가격은 특정한 거래 시점의 수요를 기록한다. 그러나 비슷한 가격에 거래된 슬레드센스와 웨이언트의 회화, 무르니아시와 프라티노의 작품은 크기와 재료, 표현 방식과 미술사적 배경에서 뚜렷하게 구분된다. 사진과 판화의 에디션, 회화와 드로잉의 재료, 작가가 축적한 전시와 작품의 이력도 각기 다르다. 작품을 수집하고 평가하는 과정에서 가격과 함께 살펴야 할 요소들이다.

2027년을 앞두고 기록을 축적하는 생활과 인간 고유의 경험, 개인의 취향을 구별하는 감각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현대미술의 여덟 작품에는 이미 각자의 삶과 기억, 몸과 자연을 바라본 시간이 남아 있다. 크로스비의 실내에는 나이지리아와 미국을 오간 삶의 기억이, 무홀리의 자화상에는 흑인의 신체와 정체성에 관한 시선이 담겼다. 슬레드센스와 웨이언트, 류웨이는 꽃과 풍경을 서로 다른 회화적 언어로 표현했고, 무르니아시와 로드위티야, 프라티노는 인간의 몸을 각기 다른 형태로 그렸다.

2026년 경매시장은 여덟 작품에 서로 다른 가격을 매겼다. 작품에는 작가가 선택한 색채와 재료, 살아온 시간과 표현의 흔적이 남아 있다. 크로스비의 겹쳐진 사진과 무홀리의 정면을 향한 눈빛, 웨이언트의 장미와 류웨이의 물길은 각기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제작됐지만 오늘의 관람자에게도 여전히 서로 다른 감각과 경험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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