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 위에 서비스와 콘텐츠를 얹는다는 말의 실제 의미
[KtN 박준식기자]베이징 조어대에서 열린 한중 비즈니스 포럼은 외교 일정의 부속 행사가 아니었다. 정상회담의 언어가 제도와 관리에 머물렀다면, 포럼의 언어는 구조와 방향을 설명하는 데 쓰였다. ‘벽란도 정신’이라는 표현은 감성적 비유처럼 들릴 수 있지만, 포럼에서 제시된 메시지는 과거의 회고가 아니라 현재의 산업 구도를 어떻게 엮을 것인가에 대한 설명에 가까웠다.
벽란도는 고려와 송나라가 교역과 지식의 순환을 이어가던 항구였다. 포럼 연설에서 이 역사적 장면이 호출된 이유는 분명했다. 교역이 단절되기 쉬운 시기에도 교류의 통로를 유지했던 경험, 외교적 긴장과 무관하게 경제와 문화의 흐름을 지속시켰던 구조를 현재에 대입하기 위해서였다. 이 비유는 ‘관계 회복’이라는 추상적 목표를 산업과 시장의 언어로 번역하는 장치였다.
연설의 중심 문장은 “제조업이라는 단단한 기반 위에 서비스와 콘텐츠를 얹자”는 제안이었다. 이 문장은 제조 중심의 한중 경제 관계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진단에서 출발한다. 지난 수십 년간 양국 협력은 부품과 완제품, 공정 분업과 공급망 안정에 집중돼 왔다. 그 구조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성장의 동력이 약해졌다는 평가도 함께 나온다. 제조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소비와 문화, 서비스 영역이 이미 경제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서비스와 콘텐츠는 장식이 아니다. 제조를 대체하자는 제안도 아니다. 제조를 유지한 채, 그 위에 새로운 가치 층을 얹어 총량을 늘리자는 접근이다. 이는 제조업의 이전이나 축소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조를 고정점으로 삼고, 그 위에 유통, 브랜드, 문화, 플랫폼을 연결하는 방식이다. 제조가 경쟁의 출발점이라면, 서비스와 콘텐츠는 수익을 확장하는 통로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 메시지는 포럼에 참석한 기업 구성에서도 확인된다. 전통 제조 대기업뿐 아니라 콘텐츠, 게임, 플랫폼, 소비재 기업이 함께 자리했다. 이는 산업 협력의 범위를 넓히겠다는 선언이라기보다, 이미 넓어져 있는 현실을 정책 언어로 정리하는 과정에 가깝다. 기업들은 이미 중국 시장에서 단순 생산이나 수출을 넘어 유통, 마케팅, 공동 개발, IP 협력으로 이동하고 있다. 포럼의 역할은 이 흐름을 공식화하고, 정부 차원의 지원 방향을 맞추는 데 있었다.
‘벽란도 정신’이 반복해서 언급된 또 다른 이유는 교류의 지속성이다. 연설은 외교 관계가 흔들렸던 시기에도 교역과 교류가 완전히 끊기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강조했다. 이는 현재의 한중 관계가 다시 불안정해질 가능성을 전제로 한 메시지다. 교류의 통로를 하나로 만들지 말고, 여러 갈래로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제조, 서비스, 콘텐츠, 관광, 청년 교류가 각각의 통로로 작동할 때 관계는 특정 변수에 덜 흔들린다.
포럼에서 제시된 또 하나의 축은 인공지능과 디지털 전환이다. AI는 제조와 서비스의 경계를 흐리는 기술로 언급됐다. 생산 공정의 효율화뿐 아니라 물류, 유통, 콘텐츠 제작, 고객 서비스까지 연결된다는 점이 강조됐다. 이는 기술 협력을 통해 산업 협력의 범위를 넓히겠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다만 이 역시 구체 사업 계획을 제시하기보다는, 협력의 방향을 설정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기술을 경쟁의 영역과 협력의 영역으로 분리해 관리하겠다는 태도가 읽힌다.
포럼 이전에 진행된 기업인 간담회에서도 유사한 맥락이 이어졌다. 산업 공급망의 연계를 통해 서로의 발전에 기여해 왔다는 평가와 함께, 새로운 항로를 찾아야 한다는 인식이 공유됐다. 여기서 말하는 ‘항로’는 시장과 산업의 방향을 뜻한다. 생활용품, 뷰티, 식품 같은 소비재와 영화, 음악, 게임, 스포츠 등 문화 콘텐츠가 새로운 돌파구로 언급된 이유다. 이는 제조 중심 협력의 대체가 아니라, 보완을 전제로 한 확장이다.
중요한 점은 이 모든 메시지가 낙관으로 포장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포럼 연설과 발언 어디에서도 즉각적인 성과나 급격한 전환을 예고하지 않았다. 대신 협력의 구조를 어떻게 재배치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제조를 버리지 않고, 서비스와 콘텐츠를 얹으며, 기술을 연결 고리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는 한중 경제 관계를 다시 설계하기보다는, 이미 변화하고 있는 현실을 정리하는 데 가깝다.
이 포럼을 통해 확인되는 것은 한중 경제 협력의 성격 변화다. 과거에는 생산과 교역이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시장 접근과 가치 창출 방식이 핵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벽란도는 그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언어였다. 항구는 물건만 오가는 곳이 아니라, 사람과 정보, 문화가 함께 드나드는 공간이었다. 현재의 한중 협력 역시 같은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선택된 비유다.
결국 이 포럼은 정상회담의 연장선에 있다. 정상회담이 관계의 관리 틀을 정리했다면, 비즈니스 포럼은 그 틀 안에서 경제 협력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지 설명했다. 과도한 기대도, 과장된 낙관도 없었다. 다만 방향은 분명했다. 한중 협력은 더 이상 제조 하나로 설명되지 않는다. 서비스와 콘텐츠, 기술과 플랫폼이 얹히는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 벽란도는 과거의 항구가 아니라, 현재의 경제 지도를 설명하는 은유였다.
후원=NH농협 302-1678-6497-21 위대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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