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디지털 협력 MOU가 그은 선과 남긴 여지
[KtN 박준식기자]한중 정상외교의 결과를 기술과 디지털 영역에서 읽어내면, 확장보다 경계 설정이 먼저 보인다. 이번 국빈 방문을 계기로 체결된 과학기술 협력과 디지털 기술 협력 관련 양해각서는 화려한 신사업 선언이나 대규모 공동 프로젝트를 앞세우지 않았다. 대신 어디까지 협력하고, 어디부터 각자 관리할지를 구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기술 협력을 성과의 언어가 아니라 관리의 언어로 다뤘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번에 체결된 과학기술 협력 양해각서는 기후변화와 지속가능 발전 등 국제적 공동 과제 대응을 중심에 놓았다. 공동연구와 연구자 교류가 주요 내용으로 담겼다. 이는 기술 패권 경쟁이 첨예한 분야를 피해, 공통 이해가 형성된 영역을 협력의 출발점으로 삼겠다는 선택으로 읽힌다. 경쟁이 불가피한 핵심 기술을 억지로 묶지 않고, 충돌 가능성이 낮은 분야에서 신뢰를 쌓는 방식이다.
디지털 기술 협력 양해각서 역시 같은 방향을 따른다. 협력의 범위는 디지털 확산과 디지털 포용으로 설정됐다. 경제 성장과 민생 회복에 기여하는 영역을 전면에 두고, 기술 표준이나 데이터 주권처럼 민감한 쟁점은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디지털을 산업 경쟁의 도구로만 다루지 않고, 사회적 인프라로서 관리하겠다는 인식이 반영됐다.
이러한 접근은 기술 협력의 한계를 분명히 드러낸다. 이번 합의는 기술 이전이나 공동 상용화를 약속하지 않는다. 구체 사업 계획이나 투자 규모도 제시되지 않았다. 대신 협력의 틀과 대화 채널을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 한중 과학기술공동위원회와 정보통신기술 협력 전략대화 같은 기존 협의체를 통해 논의를 이어가겠다는 점이 강조됐다. 기술 협력의 속도를 높이기보다, 끊기지 않게 관리하는 쪽을 택한 셈이다.
기술 분야에서 이런 선택은 현실적이다. 한중 양국은 이미 경쟁과 협력이 교차하는 국면에 들어와 있다. 반도체, 인공지능, 통신 장비 등 핵심 영역에서는 이해관계가 엇갈린다. 이 상황에서 전면 협력을 선언하는 것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대신 기후, 환경, 디지털 포용처럼 경쟁의 강도가 낮은 분야를 중심으로 협력의 최소 공통분모를 유지하는 전략이 선택됐다.
이번 협력의 또 다른 특징은 정부 간 대화의 복원이다. 기술 협력은 민간 기업의 경쟁과 직결되기 때문에, 정부 간 조율이 끊기면 오해와 마찰이 커지기 쉽다. 협의체를 통한 정례 대화는 기술 협력의 진전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갈등을 관리할 통로를 제공한다. 이는 성과를 앞세운 합의보다 장기적으로 더 중요할 수 있다.
국빈 방문 기간 중 진행된 재중 과학기술 인사들과의 간담회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중국의 과학기술 발전과 인재 양성 정책을 공유하고, 협력 방향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이는 기술 협력을 선언으로 끝내지 않고, 현장의 변화와 정책 흐름을 점검하는 과정에 가깝다. 기술 분야에서 정보의 공유는 협력의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이번 합의를 통해 한중 기술 협력의 방향은 비교적 명확해졌다. 전면적 협력이나 전략적 동맹을 지향하지 않는다. 대신 경쟁이 불가피한 영역과 협력이 가능한 영역을 구분하고, 후자에 한해 제도적 틀을 유지한다. 이는 기술을 외교의 성과로 포장하지 않겠다는 선택이기도 하다. 기술 협력은 눈에 띄는 성과보다, 갈등을 키우지 않는 관리가 우선이라는 판단이 깔려 있다.
물론 한계도 분명하다. 협력의 범위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단기간에 가시적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공동연구나 교류 역시 예산과 제도에 따라 속도가 달라질 수 있다. 디지털 협력의 경우, 각국의 규제와 정책 차이가 협력의 폭을 제약할 가능성도 있다. 이번 합의는 출발선이지 도착점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번 기술·디지털 협력은 한중 관계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확대보다 안정, 선언보다 관리다. 기술을 관계 개선의 도구로 과도하게 활용하지 않고, 충돌을 줄이기 위한 완충 지대로 설정했다. 이는 기술 분야에서 과도한 기대를 경계하는 동시에, 대화의 문을 닫지 않겠다는 신호다.
한중 기술 협력은 지금 속도를 내는 단계가 아니다. 대신 선을 긋고, 통로를 남기는 단계에 있다. 경쟁은 경쟁대로 존재한다. 협력은 협력대로 관리된다. 이번 양해각서는 그 두 영역을 섞지 않겠다는 합의에 가깝다. 기술은 계속 변하지만, 관계를 다루는 방식은 비교적 분명해졌다.
후원=NH농협 302-1678-6497-21 위대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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