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언을 비워내고 규칙을 남긴 정상외교의 현재형

이재명 대통령, 한중 관계의 재가동. 사진=KTV 이매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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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박준식기자]이번 한중 정상외교를 관통하는 핵심은 ‘무엇을 얻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다루기로 했는가’다. 공식환영식과 정상회담, 다수의 양해각서 서명, 비즈니스 포럼과 부처별 협력 발표가 이어졌지만, 일정 전반을 묶는 문장은 과장되지 않았다. 전면적 전환이나 급격한 변화의 언어는 비켜섰고, 대신 관리와 운용의 문법이 반복됐다.

관계 복원은 이미 전제였다. 이번 일정에서 새롭게 확인된 것은 복원 이후의 태도다. 문화 교류는 단계로 정리됐고, 해양 현안은 협의와 관리의 틀로 묶였으며, 한반도 문제는 공동 인식의 수준으로 고정됐다. 산업과 기술, 중소벤처, 수산과 기업 협력에 이르기까지 합의의 공통점은 하나다. 즉각적 성과를 약속하지 않고, 협의가 이어질 수 있는 구조를 남겼다는 점이다.

정상회담의 언어는 절제돼 있었다. 합의문을 키우지 않았고, 단정적 표현을 피했다. 문화·콘텐츠 교류는 “수용 가능한 분야부터 단계적으로”라는 표현으로 정리됐고, 서해 문제는 “건설적 협의”와 “질서 개선”으로 묶였다. 한반도 평화·안정 역시 공동 이익의 인식 확인에 머물렀다. 모두 결론보다 과정이 앞에 놓인 표현들이다.

양해각서의 숫자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정부 간 MOU와 기업 간 MOU는 많았지만, 규모나 성과를 단정하는 수치는 제시되지 않았다. 상무 협력 대화 채널 신설은 가장 상징적이다. 개별 사업의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협의가 끊기지 않도록 하는 장치를 복구했다. 산업단지 협력 역시 투자 보장을 앞세우지 않고 현장 점검과 후속 논의를 남겼다. 구조를 먼저 세우는 접근이다.

기술과 디지털 협력은 선을 긋는 방식으로 설계됐다. 경쟁이 불가피한 영역을 억지로 묶지 않고, 기후와 지속가능성, 디지털 포용처럼 충돌 가능성이 낮은 분야에 협력을 한정했다. 이는 기술 협력을 외교 성과로 과장하지 않겠다는 선택이다. 기술은 빠르게 변하지만, 갈등 관리의 통로는 꾸준해야 한다는 인식이 반영됐다.

 

중소벤처와 스타트업 협력은 외교의 하부 구조를 드러낸다. 대기업 중심 협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영역을 공식 의제로 끌어올렸다. 스타트업 육성과 혁신 협력은 성과를 보장하지 않는다. 대신 생태계를 잇는 최소한의 규칙을 만든다. 단기 성과보다 지속 가능성을 택한 합의다.

수산물 위생·검역 합의는 이번 일정에서 가장 즉각적인 변화를 보여줬다. 규칙 하나가 바뀌자 시장의 문이 열렸다. 냉장 병어를 포함한 자연산 수산물의 중국 진출은 외교가 일상으로 내려오는 드문 사례다. 이 합의는 선언이 아니라 제도 변경의 결과였다. 외교 성과가 현장에서 확인되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기업 간 협력 역시 거래의 언어로 정리됐다. 소비재, 콘텐츠, 공급망 협력은 단순 수출이나 판권 거래에 머물지 않고, 공동 기획과 공동 개발을 전제로 했다. 위험을 나누고 역할을 분담하는 구조다. 큰 약속은 없었고, 대신 작은 연결이 여러 갈래로 만들어졌다. 정치 환경의 변동성을 고려한 현실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이번 한중 정상외교는 확대나 전환의 국면이라기보다 재정렬의 국면에 가깝다. 관계를 끌어올리는 언어 대신, 다시 작동시키는 규칙을 정리했다. 무엇을 열지보다, 어떻게 열고 유지할지를 먼저 정했다. 이는 기대를 낮추는 선택이기도 하다. 동시에 흔들림을 줄이려는 선택이기도 하다.

 

한계도 분명하다. 많은 합의가 협의와 검토의 단계에 머문다. 이행은 각 부처와 기업, 시장의 몫이다. 협의체가 있다고 해서 갈등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갈등을 다룰 통로가 남는다. 이번 일정은 그 통로를 복구하고 정비하는 데 집중했다.

한중 관계는 단숨에 달라지지 않는다. 외교의 속도는 산업과 시장, 사회의 속도와 다르다. 이번 정상외교는 그 간극을 인식한 흔적을 남겼다. 빠른 성과를 약속하지 않고, 관리 가능한 범위를 설정했다. 선언을 비워내고 규칙을 남긴 선택이다.

복원은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관리다. 관리에는 인내와 점검, 조정이 필요하다. 성과를 서두르지 않고, 규칙을 지키며, 협의를 이어가는 일이다. 이번 한중 정상외교가 남긴 가장 분명한 메시지는 단순하다. 관계는 이벤트가 아니라 운용의 문제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