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라 도시 리트리트, 감각과 침묵으로 완성된 건축의 언어

Vitra's Doshi Retreat Is a Sensory & Spiritual Design Experience. 사진=Julien Lanoo/Vitra,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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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임민정기자]인도 건축가 발크리슈나 도시는 기능과 조형보다 인간의 내면과 감각에 천착한 인물로 평가된다. 르 코르뷔지에와 루이스 칸에게서 근대 건축의 원리를 배웠지만, 발크리슈나 도시는 평생을 통해 건축의 기술적 완결보다 감정과 사유를 더 중요하게 다뤘다. 건축이 인간의 삶을 단순히 수용하는 구조물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존재를 느끼는 감각의 틀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2023년 완공된 비트라 도시 리트리트(Vitra Doshi Retreat)는 발크리슈나 도시의 마지막 작품이다. 독일 바젤 인근의 비트라 캠퍼스에 자리한 이 건축은 전시나 생산 공간이 아니라 명상과 사색을 위한 구조물이다. 비트라 캠퍼스는 프랭크 게리, 자하 하디드, 안도 다다오 등 세계적 건축가들의 작품이 모여 있는 장소다. 이곳에서 발크리슈나 도시는 시각적 경쟁 대신 감각의 농도를 택했다. 리트리트는 건축이 말없이 존재하는 방법을 실험한다.

비트라 회장 롤프 펠바움은 인도 구자라트의 모데라 태양사원을 방문한 뒤 발크리슈나 도시에 새로운 공간을 제안했다. 산업 단지 안에서 사람들이 잠시 멈춰 서고 생각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자는 구상이었다. 발크리슈나 도시는 단순한 의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인간과 환경, 물질과 소리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건축을 구상했다.

첫 번째 스케치는 꿈에서 나왔다. 발크리슈나 도시는 생전에 두 마리의 코브라가 서로 얽혀 움직이는 꿈을 꿨다고 기록했다. 그 이미지는 에너지의 상승을 의미하는 인도 철학의 쿠달리니 개념으로 발전했다. 발크리슈나 도시는 그 상징을 건축의 중심 구조로 전환했다. 리트리트의 동선은 직선이 아니라 완만하게 휘어지는 곡선으로 이어지며, 걷는 사람의 속도를 자연스럽게 늦춘다. 방문객은 빠르게 이동하는 대신 천천히 호흡하고 주변의 변화를 인식한다.

Vitra's Doshi Retreat Is a Sensory & Spiritual Design Experience. 사진=Julien Lanoo/Vitra,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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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끝에는 반구형의 명상실이 자리한다. 천장은 완전히 닫히지 않아 하늘의 일부가 열려 있다. 낮에는 빛이 천장의 틈을 통해 내부로 들어오고, 비가 내리면 중앙의 물 분지에 고인다. 물의 움직임은 바람과 함께 공간의 중심이 된다. 인공조명 대신 자연광이 공간의 리듬을 결정하고, 강철 벽의 색은 시간대에 따라 변한다. 건축이 하루의 흐름을 품는 방식이다.

리트리트의 구조는 저탄소 강재 XCarb로 제작됐다. 유럽 철강업체 아르셀로미탈이 개발한 XCarb는 재생 에너지와 고철을 원료로 생산되며, 일반 강재보다 탄소 배출량을 70~85퍼센트 줄인다. 발크리슈나 도시는 환경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건축의 일부로 다뤘다. 강철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표면이 변하고, 자연스럽게 녹청이 형성된다. 이 변화는 손상이나 결함이 아니라 건축의 생애 주기를 표현한다.

벽체 내부에는 음향 시스템이 내장돼 있다. 스피커가 아니라 구조물 전체가 공명체로 작동하도록 설계됐다. 관람객의 위치와 움직임에 따라 소리의 강도와 방향이 달라지고, 음의 진동이 몸을 따라 전달된다. 발크리슈나 도시는 건축이 시각 중심의 예술에서 벗어나 청각과 촉각의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다고 보았다. 공간은 소리를 품고, 소리는 공간의 형태를 완성한다.

명상실 천장에는 인도 장인이 손으로 두드려 만든 황동 만다라가 설치됐다. 만다라는 빛을 여러 방향으로 흩어내며 내부의 분위기를 바꾼다. 돌로 제작된 벤치가 벽면을 따라 이어지고, 물 분지는 빛과 소리를 함께 반사한다. 금속과 돌, 물과 공기가 서로 관계를 맺으며 공간의 밀도를 만든다. 발크리슈나 도시는 재료의 물성을 해체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을 선택했다. 각 요소는 기능적 목적보다 감각의 확장을 위해 존재한다.

발크리슈나 도시는 생전에 “건축은 기능이 아니라 감정의 산물”이라고 여러 차례 언급했다. 비트라 도시 리트리트에는 안내문이나 사용 규칙이 없다. 방문객은 스스로 걷고 머무르며 공간을 해석해야 한다. 건축은 특정한 동선을 요구하지 않는다.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공간을 경험하도록 열려 있다. 발크리슈나 도시는 공간이 인간을 지시하기보다 인간이 공간을 완성하길 원했다.

Vitra's Doshi Retreat Is a Sensory & Spiritual Design Experience. 사진=Julien Lanoo/Vitra,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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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라 도시 리트리트는 명상 건축이라는 범주 안에서도 이례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종교적 상징이나 장식적 요소가 거의 없고, 기능적 목적도 최소화됐다. 대신 감각의 집중과 시간의 흐름이 건축의 주제를 이룬다. 비트라 캠퍼스의 다른 건물들이 조형적 완결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낸다면, 발크리슈나 도시는 결여를 통해 공간의 깊이를 드러냈다. 산업적 효율이 지배하는 시대에, 건축이 감정의 회복을 위한 매체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탐구한 작업이다.

리트리트는 완성된 형태보다 변화의 과정을 중심에 둔다. 빛의 방향, 기온, 습도에 따라 내부의 색과 소리가 달라진다. 인간의 개입이 줄어든 대신 자연이 건축의 일부가 된다. 발크리슈나 도시가 오랫동안 제시해 온 ‘살아 있는 건축’ 개념이 실제로 구현된 사례다.

비트라의 이번 프로젝트는 기업의 홍보나 상징을 위한 작업으로 읽히지 않는다. 비트라 도시 리트리트는 산업 공간 속에서 건축이 감정적 기능을 회복할 수 있는지 검증하는 실험이다. 비트라 캠퍼스의 다른 건물들이 시각적 속도와 기술의 정교함을 보여준다면, 발크리슈나 도시의 건축은 정지와 침묵으로 응답한다. 공간의 비어 있음은 감각의 긴장으로 전환되고, 방문객은 그 안에서 자신을 성찰한다.

공동 설계를 맡은 쿠쉬누 판타키 후프는 이번 프로젝트를 “발크리슈나 도시의 철학이 가장 정확히 구현된 건축”이라고 설명했다. 세대를 잇는 협업을 통해 완성된 리트리트는 개인의 유산을 넘어 건축 문화의 기록으로 남는다.

비트라 도시 리트리트는 산업사회가 만든 속도와 효율의 질서를 잠시 멈추게 한다. 건축이 인간의 감각을 되돌려주는 방식, 자연과 물질이 함께 숨 쉬는 공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발크리슈나 도시가 남긴 마지막 작품은 결과물이 아니라 질문이다. 건축은 여전히 인간의 감정을 담을 수 있는가, 그리고 공간은 사유의 언어가 될 수 있는가. 비트라 도시 리트리트는 그 질문에 침묵으로 답한다. 그 침묵이 오늘의 건축에서 가장 명확한 목소리로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