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치안·학교·언론 불신 묶어 ‘보통 사람 대 기득권’ 구도 확산

트럼프 “한국 관세 25%로 인상”…입법 지연 겨냥한 통상 압박  사진=2026. 01.27  @ whitehouse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트럼프 “한국 관세 25%로 인상”…입법 지연 겨냥한 통상 압박  사진=2026. 01.27  @ whitehouse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준식기자]도널드 트럼프 진영이 2024년 미국 대선에서 반복한 말은 ‘상식’이었다. 국경을 지키는 일, 범죄자를 잡는 일, 학교가 이념보다 학문을 가르치는 일, 여성 스포츠에서 성별 기준을 지키는 일은 복잡한 토론 대상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상식이라는 주장이었다. 민주연구원 연구보고서 ‘트럼프 미스터리와 미국 민주당의 성찰’은 트럼프 정치가 진보와 보수의 대립을 ‘상식 대 몰상식’의 대립으로 바꾸고, 공화당을 ‘상식의 정당’으로 재편하려 했다고 분석했다.

극우와 강경 우파가 얻은 힘은 과격한 구호에서만 나오지 않았다. 장바구니 물가, 집세, 국경, 거리 치안, 학교 교육처럼 유권자가 매일 마주하는 문제를 짧은 말로 묶은 데서 힘이 생겼다. 기성정당은 재정, 인권, 국제규범, 제도 설계를 설명했지만, 우파 정당은 “왜 내 동네가 달라졌나”, “왜 내 세금이 남에게 쓰이나”, “왜 내 아이가 낯선 가치관을 배워야 하나”라는 질문을 먼저 잡았다. 선거판에서 긴 설명은 늦게 도착했고, 짧은 분노는 먼저 퍼졌다.

트럼프식 ‘상식’은 정책 설명보다 편 가르기에 가까웠다. 국경을 닫자는 말은 이민정책이 아니라 국가를 되찾자는 말로 바뀌었다. 범죄 단속은 치안정책을 넘어 법과 질서를 무너뜨린 엘리트에 대한 응징으로 번졌다. 학교 교육 논쟁은 교육과정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 권리와 국가 개입의 충돌로 그려졌다. 이민자, 관료, 언론, 법원, 대학, 진보 활동가는 서로 다른 집단이지만, 선거운동 속에서는 보통 사람의 삶을 흔드는 한 무리로 묶였다.

이재명 대통령, 돈의동 쪽방촌 현장 방문. 사진=청와대,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이재명 대통령, 돈의동 쪽방촌 현장 방문. 사진=청와대,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깨시민’ 논쟁은 문화 갈등을 선거 무기로 바꾼 대표 사례다. 보고서는 트럼프가 PC주의와 ‘깨시민’ 엘리트에 맞서는 상식의 수호자를 자처했다고 정리했다. 성소수자 권리, 젠더, 학교 교육, 스포츠, 표현의 자유가 한데 묶이면서 문화 의제는 경제 의제보다 빠르게 감정을 건드렸다. 물가는 복잡한 원인과 처방을 따져야 하지만, 아이가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공공기관이 어떤 말을 쓰는지, 스포츠 경기에서 성별을 어떻게 나누는지는 훨씬 빠르게 가정과 지역사회로 번진다.

물가와 문화 갈등이 만나는 순간, 극우 정치는 더 강해진다. 장바구니 가격이 오르면 정부의 무능을 말할 수 있다. 학교와 젠더 문제에서 불편함이 커지면 엘리트의 오만을 말할 수 있다. 두 불만이 겹치면 “내 살림을 어렵게 만든 사람들”과 “내 생각을 틀렸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같은 편처럼 보인다. 우파 정당은 이 지점에서 먹고사는 문제와 자존심 문제를 하나로 묶었다.

‘딥 스테이트’라는 말도 같은 방식으로 움직인다. 정보기관, 관료조직, 법원, 언론, 전문가 집단을 보이지 않는 권력으로 묶으면 선거 패배도 조작이고, 수사와 재판도 정치 보복이며, 언론 보도도 기득권의 공격이 된다. 보고서는 트럼프가 ‘딥 스테이트’가 통제할 수 없는 아웃사이더 파이터를 자처했다고 설명했다. 제도에 대한 불신이 커질수록, 제도와 충돌한 정치인은 결격자가 아니라 싸움꾼으로 보인다.

 사람 탈 쓰고 이럴 수가'   이 대통령 분노 자아낸 2019년 무신사 광고, 무슨 내용이길래..이번 발언은 스타벅스코리아의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 ‘탱크데이’ 이벤트 논란 직후 나왔다.   사진=2026. 05.20  자료 사진 갈무리 / 편집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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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불신은 극우 정치의 방어막으로 작동했다. 기존 언론이 거짓을 지적하면 지지층은 “역시 기득권이 공격한다”고 받아들인다. 법원이 유죄를 판단해도 “사법이 정치화됐다”는 말이 먼저 돈다. 전문가가 통계를 제시해도 “현장을 모르는 사람들의 말”로 밀려난다. 사실 확인의 절차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 확인을 맡은 기관 자체가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때부터 논란은 손실이 아니라 노출이 된다.

유튜브와 팟캐스트, 틱톡, X는 이런 정치를 빠르게 밀어냈다. 긴 연설과 신문 사설, TV 토론이 여론을 이끌던 시기에는 정당의 설명과 언론의 검증을 거치는 시간이 있었다. 지금은 분노와 조롱, 폭로 형식의 짧은 영상이 먼저 돈다. 복잡한 정책은 잘리지 않으면 퍼지기 어렵고, 거친 말은 잘릴수록 더 멀리 간다. 극우 정치인은 논란을 피하지 않는다. 논란이 커질수록 지지층은 싸움이 벌어졌다고 느끼고, 상대 진영의 비판은 내부 결집으로 돌아온다.

유럽에서도 극우 정당의 의석보다 먼저 움직인 것은 쟁점이었다. 2024년 유럽의회 선거 뒤 친유럽 성향의 중도 세력은 과반을 지켰지만, 이민·환경·안보·확대정책에서 우파 정당의 영향력은 커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채텀하우스는 극우 정당의 득표가 예상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았지만, 장기적으로 이들의 생각이 유럽연합 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짚었다.

프랑스 국민연합, 독일대안당 AfD, 이탈리아 형제들, 오스트리아 자유당, 네덜란드 자유당은 나라별 역사와 조건이 다르다. 공통점은 선거에서 유권자를 부르는 말이다. 국경을 지키겠다, 범죄를 잡겠다, 세금을 낭비하지 않겠다, 농민과 노동자를 규제에서 풀어주겠다, 언론과 관료가 숨긴 사실을 말하겠다는 구호가 반복된다. 극우 정당은 자신을 오른쪽 끝 정당으로 부르지 않는다. 보통 사람의 말을 대신하는 정당, 숨겨진 사실을 말하는 정당,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정당으로 자신을 세운다.

이재명 대통령 X. 사진=이재명대통령 X 갈무리,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이재명 대통령 X. 사진=이재명대통령 X 갈무리,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민주주의 지표가 흔들리는 배경에도 같은 불신이 깔려 있다. 프리덤하우스는 2025년 세계 자유가 20년 연속 후퇴했고, 정치적 권리와 시민 자유가 나빠진 국가는 54개국이었다고 집계했다. 쿠데타와 전쟁만이 원인은 아니었다. 선거로 뽑힌 권력이 헌정질서를 바꾸고, 반대세력을 압박하고, 언론과 사법 절차를 약화시키는 흐름도 함께 잡혔다.

극우 현상은 민주주의 밖에서만 자라지 않는다. 선거를 통해 의석을 얻고, 국민투표와 여론조사를 활용하고, 표현의 자유와 다수의 뜻을 내세운다. 절차는 민주주의의 언어를 쓰지만, 목표는 견제 장치의 약화로 향할 수 있다. 언론은 국민의 적으로, 법원은 기득권의 도구로, 의회 소수파는 나라를 막는 세력으로 그려진다. 선거 승리는 모든 제도 위에 있는 허가증처럼 다뤄진다.

한국은 다른 길을 보여준 사례로 놓인다. 비상계엄과 탄핵,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 뒤 치러진 제21대 대통령선거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당선됐고, 권력 공백은 선거로 정리됐다. 여러 나라에서 반제도 구호가 커지는 동안 한국 정치는 헌정 절차와 높은 투표 참여로 새 정부를 세웠다. 세계 정치가 강경한 구호와 분노의 말에 흔들리는 시기에 한국의 경험은 제도가 무너진 뒤가 아니라 제도를 통해 다시 세우는 경로를 보여준다.

이재명 정부가 제시한 123대 국정과제도 극우 현상과 맞서는 비교축이 된다. 정부는 국민이 하나되는 정치, 세계를 이끄는 혁신경제, 모두가 잘사는 균형성장, 기본이 튼튼한 사회, 국익 중심의 외교안보를 5대 국정목표로 제시했다. 국민주권과 민주주의 회복, AI와 첨단산업, 민생경제, 지역 균형, 창의적 문화국가, 실용외교를 함께 놓은 구상이다.

한국 정부의 과제는 극우 구호를 흉내 내지 않고도 유권자의 밥상과 일자리, 집값과 지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에 있다. 민주주의 회복은 출발점이고, 민생경제와 혁신산업, 문화와 외교에서 성과가 이어져야 제도에 대한 신뢰가 단단해진다. 극우 정치는 제도가 느리고 복잡하다는 불만을 먹고 자란다. 민주주의가 밥상과 동네 문제를 풀어내지 못하면, 반제도 구호는 언제든 다시 힘을 얻는다.

극우의 가장 강한 무기는 과격함이 아니라 단순함이다. 복잡한 세상을 쉬운 적과 쉬운 답으로 나눈다. 물가는 정부가 망친 일, 이민은 국경을 열어 생긴 일, 범죄는 처벌을 약하게 한 일, 학교 갈등은 엘리트가 부모를 무시한 일, 언론 비판은 기득권의 공격으로 정리된다. 단순한 설명은 현실을 충분히 담지 못하지만, 불안을 느끼는 유권자에게는 먼저 도착한다.

기성정당의 대응도 단순한 비난으로는 부족하다. 극우를 혐오와 선동으로만 부르면 지지층은 더 닫힌다. 이민이 왜 필요한지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주택난과 학교 과밀, 거리 치안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기 어렵다. 기후위기를 말하는 것만으로는 농민과 제조업 노동자의 비용 부담을 덜 수 없다.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말도 장바구니와 집세, 일자리 앞에서 설득력을 얻어야 한다.

2026년 이후 세계 정치의 갈림길은 의석수보다 제도 신뢰와 민생 성과에서 갈릴 가능성이 크다. 극우와 강경 우파는 국경, 치안, 학교, 언론 불신을 묶어 표를 넓혀왔다. 민주주의 세력은 헌정질서와 표현의 자유, 소수자 권리만이 아니라 물가, 주거, 지역, 산업, 외교안보에서 답을 내놓아야 한다. 한국은 계엄 이후 선거로 헌정을 회복했고, 새 정부는 국민주권과 혁신경제, 문화국가, 실용외교를 국정 전면에 올렸다. 세계 선거판에서 남은 변수는 누가 분노를 더 크게 외치느냐가 아니라, 누가 유권자의 밥상과 동네 문제를 실제 성과로 바꾸느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