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SK하이닉스가 쥔 AI 메모리 공급망…10조1000억 원 AI 예산, 모델·서비스 생태계로 이어져야 실효성
[KtN 임우경 · 박준식기자] 젠슨 황(Jensen Huang) 엔비디아 최고경영자가 서울에서 확인한 한국의 경쟁력은 HBM이었다. 황 CEO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이 엔비디아 차세대 AI 플랫폼 ‘베라 루빈(Vera Rubin)’에 들어갈 HBM4 공급 자격을 갖췄다고 밝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 AI 칩에 필요한 메모리의 약 70%를 만드는 기업으로 언급됐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글로벌 AI 서버 확산의 핵심 부품을 공급하는 위치에 올라섰지만, AI 3대 강국 전략은 바로 이 지점에서 더 까다로운 질문을 만난다. HBM을 많이 파는 국가는 AI 강국인가, 아니면 AI 가치사슬의 하드웨어 단계에 머무는가.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쌓아 GPU와 함께 쓰는 고대역폭메모리다. 생성형 AI 모델의 학습과 추론이 커질수록 연산장치와 메모리 사이를 오가는 데이터량이 폭증한다. GPU 성능이 높아져도 메모리 대역폭과 패키징 능력이 따라가지 못하면 AI 서버 전체 성능은 제약을 받는다. 엔비디아가 한국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직접 거론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AI 공급망에서 HBM은 부품을 넘어 데이터센터 증설, 클라우드 투자, AI 서비스 가격을 좌우하는 전략 자산으로 올라섰다.
SK하이닉스는 AI 메모리 수요를 실적으로 증명했다. 올해 1분기 매출은 52조6000억 원, 영업이익은 37조6000억 원으로 집계됐다.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198% 증가했고, 영업이익은 7조4000억 원에서 37조6000억 원으로 뛰었다. 회사 측은 향후 3년간 HBM 고객 요청 물량이 생산능력을 크게 웃돈다고 밝혔다. PC와 스마트폰 수요 둔화가 남아 있는 상황에서도 AI 메모리 수요가 가격과 실적을 떠받치는 구조가 형성됐다.
SK그룹의 증설 계획은 HBM 경쟁이 단기 호황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대만 컴퓨텍스에서 SK하이닉스의 웨이퍼 생산능력을 앞으로 5년 안에 두 배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로이터는 카운터포인트리서치 집계를 인용해 올해 1분기 글로벌 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가 58%, 삼성전자와 마이크론이 각각 21%의 점유율을 기록했다고 전했다. 최 회장은 메모리 공급 병목이 2030년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기존 전망도 유지했다.
삼성전자는 HBM4와 HBM4E를 앞세워 추격 속도를 높이고 있다. 삼성전자는 HBM4E 샘플 출하를 시작했고, 고객 일정에 맞춰 HBM4E 양산을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공개한 HBM4는 시스템인패키지 테스트에서 11.7Gbps 속도를 구현했다고 회사 측은 설명했다. 삼성전자의 강점은 메모리, 파운드리, 로직 설계, 첨단 패키징을 한 회사 안에 갖춘 구조다. 다만 HBM 시장에서 고객 인증, 수율 안정화, 납기 대응, 발열 관리 성능은 계속 확인해야 할 변수로 남아 있다.
이재명정부의 AI 전략도 HBM 공급망과 분리되지 않는다. 정부는 2026년 AI 3대 강국 도약을 위한 대전환 예산으로 10조1000억 원을 편성했다. 산업·생활·공공 전 분야 AI 도입에 2조6000억 원, 인재 양성과 인프라 구축에 7조5000억 원을 투입한다. 피지컬 AI 선도 국가 달성을 위해 로봇, 자동차, 조선, 가전, 반도체, 팩토리 등 주요 산업 분야에 향후 5년간 약 6조 원을 투입하겠다는 계획도 제시했다.
반도체는 정부 AI 전략의 가장 확실한 출발점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HBM 공급망을 쥐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이 AI 대전환의 주변부에 있지 않다는 증거다. 수출과 설비투자, 고용과 세수, 산업단지 투자 효과도 반도체에서 먼저 나타난다. 그러나 반도체 강국이 곧바로 AI 강국을 뜻하지는 않는다. HBM 수익이 국내 AI 데이터센터, 국산 AI 모델, 제조 AI, 클라우드, 공공 AI 서비스로 이어져야 한국 경제 안에 더 넓은 부가가치가 남는다.
국회미래연구원도 같은 지점을 짚었다. 연구원은 2026년 범정부 AI 예산이 10조1000억 원으로 전년 대비 세 배 이상 늘었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글로벌 HBM 시장의 약 80%를 점유하며 약 70조 원 규모의 설비투자를 집행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동시에 한국의 AI 투자가 가치사슬의 1·2계층인 반도체와 하드웨어 인프라에 집중돼 있고, 기반모델과 응용 소프트웨어·서비스·플랫폼 투자는 상대적으로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HBM 호황은 산업정책의 성과를 앞당기지만, 정책의 시야를 좁힐 위험도 함께 만든다. 한국 기업이 HBM을 공급하고 글로벌 클라우드 기업이 GPU 서버를 늘리는 동안, 모델과 플랫폼, 서비스 수익은 미국 빅테크와 글로벌 클라우드 사업자에게 집중될 수 있다. 한국이 전력과 용수, 산업단지, 숙련인력, 협력업체 투자 부담을 떠안고도 AI 가치사슬의 상위 수익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는 구조가 남을 수 있다. AI 3대 강국 전략이 반도체 지원정책에 머물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AI 반도체 호황은 지역과 인프라에도 부담을 준다. 첨단 패키징 시설과 메모리 공장은 대규모 전력, 용수, 화학물질, 물류망, 숙련인력을 요구한다. AI 데이터센터가 늘어날수록 서버 운영에 필요한 전력 수요도 함께 증가한다. 정부가 AI 3대 강국을 말하려면 HBM 생산량과 GPU 확보량뿐 아니라 송전망, 전력요금, 냉각 인프라, 산업단지 입지, 협력업체 인력 수급까지 같은 산업표 안에서 관리해야 한다.
가트너는 AI 수익화를 단순한 자동화가 아니라 자율운영, 인력 증폭, 의사결정 개선, 새로운 가치 창출로 설명한다. HBM 공급망도 같은 기준에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더 많은 HBM을 팔았다는 사실만으로는 AI 3대 강국의 성과를 단정하기 어렵다. HBM이 국내 제조업의 자율화, AI 데이터센터 운영, 공공서비스 개선, 국산 모델 적용, 새로운 서비스 매출로 연결될 때 반도체 호황은 국가 AI 전략의 기반이 된다.
HBM 호황은 이재명정부 AI 전략에 가장 확실한 산업 기반을 제공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글로벌 AI 메모리 공급망을 쥐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 산업의 협상력을 키운다. 그러나 HBM 수출과 설비투자가 AI 강국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남은 변수는 HBM4 공급 안정성, 첨단 패키징 수율, 데이터센터 전력 확보, 국산 AI 모델의 실제 적용처, 반도체 수익이 국내 AI 서비스 생태계로 이어지는 경로다. AI 3대 강국 구상은 반도체 공장에서 출발하지만, 최종 평가는 모델과 플랫폼, 공공서비스와 제조 현장에서 내려질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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