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야외 정원서 대형 연출 덜고 옷의 폭·원단 움직임 부각…뎀나 이후 하우스 코드 재조정
[KtN 박인경기자]흰 비대칭 재킷 아래로 코발트 블루 깃털이 길게 내려왔다. 재킷은 넓은 칼라와 사선 여밈으로 상체의 선을 잡았고, 깃털 스커트는 발걸음에 따라 앞뒤로 흔들렸다. 한 벌 안에서 재킷의 단단한 재단과 깃털의 가벼운 움직임이 맞섰다.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Pierpaolo Piccioli)가 발렌시아가에서 처음 선보인 오트 쿠튀르는 복잡한 장식보다 옷의 크기와 색, 원단이 움직일 때 달라지는 형태에 집중했다.
발렌시아가는 7월 8일 파리 국제대학촌(Cité Internationale Universitaire de Paris) 정원에서 2026-27 가을·겨울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발표했다. 하우스의 55번째 쿠튀르 컬렉션이자 2025년 7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취임한 피치올리의 첫 발렌시아가 쿠튀르였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Cristóbal Balenciaga)가 1968년 은퇴한 뒤 중단됐던 쿠튀르는 2021년 뎀나(Demna)가 50번째 컬렉션으로 되살렸다. 피치올리는 5년간 이어진 복원 작업 뒤 쿠튀르 부문을 넘겨받았다.
정원 한가운데에는 흰 카펫이 깔렸다. 계단과 나무, 밝은 햇빛을 그대로 남기고 별도의 대형 설치물은 세우지 않았다. 모델들이 계단을 내려와 넓은 카펫을 걷는 동안 바람이 드레스 안으로 들어갔고, 바닥에 닿은 깃털과 얇은 원단은 걸음보다 조금 늦게 따라왔다. 실내 쇼라면 조명과 세트가 맡았을 효과를 햇빛과 바람이 대신했다.
아노니(ANOHNI)의 목소리도 옷을 서두르지 않게 했다. 셀레나의 ‘I Could Fall in Love’와 루 리드의 ‘Perfect Day’를 다시 부른 음원이 흐른 뒤 아노니의 노래가 이어졌다. 강한 박자에 맞춰 룩을 빠르게 넘기지 않고, 모델 한 명이 지나갈 때마다 옷의 앞면과 옆선, 밑단이 달라지는 시간을 남겼다.
뎀나 시기의 발렌시아가는 옷과 무대 연출을 함께 밀어붙였다. 강한 설정과 낯선 공간, 대중문화와 거리의 이미지를 쿠튀르 안으로 끌어들였다. 피치올리의 첫 쿠튀르는 무대의 비중을 낮췄다. 검정과 넓은 어깨, 긴 바지, 후드, 몸보다 큰 옷은 그대로 두고 재단과 색을 더 가까이 보게 했다. 전임자의 흔적을 지운 출발보다 이미 커진 발렌시아가의 옷을 다른 방식으로 다듬은 데뷔에 가까웠다.
검정 드레스는 몸통을 길고 좁게 잡은 뒤 양쪽 소매를 크게 부풀렸다. 소매의 폭이 실제 어깨와 팔의 위치를 가렸고, 목선과 허리에는 별다른 장식을 두지 않았다. 검은 원단이 세부를 감추면서 커다란 소매의 윤곽만 또렷하게 남았다. 옷이 몸매를 따라가는 대신 몸 주위에 새로운 선을 그렸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가 남긴 재단도 같은 자리에서 읽혔다. 허리를 조이고 가슴선을 드러내는 방식보다 몸과 옷 사이에 간격을 두고, 앞·옆·뒤에서 서로 다른 모양이 나오도록 자르는 방식이다. 피치올리는 창립자의 옷을 그대로 복제하지 않았다. 어깨와 소매, 등과 밑단의 폭을 크게 벌려 몸의 위치를 감추고, 모델이 걸을 때 옷 전체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줬다.
흰 드레스에는 목 아래에서 바닥까지 이어지는 큰 곡선이 잡혔다. 허리와 팔은 원단 안에 가려졌고, 밑단 아래로 발만 드러났다. 정면에서는 하나의 흰 덩어리처럼 보였지만 걸음이 이어지자 어깨와 옆선의 높이가 달라졌다. 검정 드레스가 윤곽을 한데 묶었다면 흰 드레스는 햇빛을 받아 작은 주름과 굴곡까지 드러냈다.
큰 옷을 무겁게 만드는 방식도 피했다. 피치올리는 이번 작업을 설명하며 여러 종류의 원단과 별도의 지지대를 계속 더하기보다 재단을 정교하게 설계했다고 밝혔다. 원단과 형태, 색과 표면이 한 번에 이어지도록 자르고 연결했다는 설명이다. 거대한 옷을 안쪽에서 억지로 세우기보다 원단이 스스로 벌어지고 접히도록 길을 만든 셈이다.
바이올렛 드레스는 허리 아래에서 둥글게 퍼졌다. 밑단이 바닥 가까이 넓게 벌어졌지만 형태가 한자리에 고정되지는 않았다. 바람이 들어오면 앞부분이 부풀었고, 발을 내디딜 때마다 좌우의 높이가 바뀌었다. 부피는 컸지만 움직임은 가벼웠다. 피치올리가 말한 재단의 방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 착장이었다.
이번 컬렉션에서 색은 옷을 꾸미는 부속물이 아니었다. 검정과 흰색으로 기본선을 잡은 뒤 코발트 블루, 바이올렛, 라임, 터키석, 진분홍, 녹색을 넓은 면적으로 사용했다. 작은 자수나 테두리에 색을 넣지 않고 재킷과 드레스, 스커트 전체를 한 가지 색으로 채웠다. 상의와 하의의 색을 크게 갈라 옷의 길이와 폭을 한눈에 알아보게 한 착장도 이어졌다.
라임색 재킷 아래에는 짙은 바이올렛 깃털이 놓였다. 밝고 매끈한 재킷은 어깨부터 허리까지 단단하게 떨어졌고, 무릎 아래의 깃털은 걸음을 따라 불규칙하게 흔들렸다. 라임과 바이올렛의 차이는 상의와 하의를 분리했으며, 매끈한 원단과 거친 깃털의 차이도 더 크게 만들었다. 색이 재단선과 같은 역할을 맡았다.
피치올리가 발렌티노에서 사용했던 색을 그대로 옮겼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발렌티노에서는 선명한 분홍과 빨강, 보라가 몸을 따라 흐르는 드레스와 자주 만났다. 발렌시아가에서는 같은 계열의 색이 몸에서 멀리 떨어진 재킷과 케이프, 둥근 스커트 안으로 들어갔다. 색은 피치올리의 경력과 이어졌지만 색을 담은 옷의 크기와 재단은 발렌시아가 쪽에 더 가까웠다.
재킷과 드레스의 제작 방식도 한쪽으로 쏠리지 않았다. 타이외르(tailleur)는 재킷과 코트, 바지의 선을 정확하게 잡는 작업을 뜻한다. 플루(flou)는 몸 위에서 원단을 잡아 주름과 흐름을 만드는 드레스 제작을 가리킨다. 첫 쿠튀르에서는 두 방식이 한 벌 안에 함께 들어갔다. 단단한 재킷 아래에 깃털 스커트를 붙이고, 단순한 민소매 상의에는 둥글게 부푼 하의를 연결했다.
회갈색 깃털 코트 아래에서는 터키석색 바지가 드러났다. 깃털은 칼라나 소매 끝에 붙인 장식이 아니라 코트 전체를 덮었다. 모델이 걸을 때마다 표면이 흔들렸고, 움직임 사이로 바지의 선명한 색이 나타났다. 코트의 큰 형태를 깃털로 만들면서 안쪽에는 전혀 다른 색의 바지를 넣어 무거운 인상을 덜었다.
깃털을 다룬 방식은 후반부에서 더 커졌다. 연보라색 스커트는 허리 아래를 둥글게 감쌌고, 진분홍색 착장은 어깨와 밑단에 각각 큰 덩어리를 만들었다. 검은 깃털은 얼굴과 어깨 주변을 넓게 둘렀다. 깃털을 옷 위에 얹은 것이 아니라 깃털 자체로 스커트와 외투, 머리 장식의 형태를 만들었다.
티셔츠와 탱크톱, 바지처럼 익숙한 옷도 쿠튀르 안에 들어왔다. 흰 반소매 상의에는 길고 넓은 스커트를 붙였고, 민소매 상의 아래에는 접힌 원단이 크게 벌어지는 바지를 놓았다. 일상복의 모양을 버리지 않은 채 길이와 폭을 바꿨다. 화려한 이브닝드레스만으로 쿠튀르를 채우지 않고, 다음 기성복으로 옮길 수 있는 재킷과 바지의 비례까지 함께 제시했다.
흰 탱크톱과 검정 재킷, 넓은 검정 바지는 몸과 옷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줬다. 탱크톱이 실제 상체의 폭을 드러내는 동안 재킷의 소매는 양옆으로 크게 벌어졌다. 바지는 발을 덮고 바닥까지 흘러내렸다. 익숙한 세 품목을 사용했지만 완성된 비율은 일상복과 멀었다. 쿠튀르 기술을 장식보다 길이와 폭에 쓴 결과다.
검정은 컬렉션 곳곳에서 다시 나타났다. 선명한 색의 드레스 뒤에 검정 드레스를 놓고, 깃털과 광택이 강한 착장 사이에 장식을 덜어낸 검정 재킷과 바지를 배치했다. 검정은 뎀나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색인 동시에 재단을 확인하게 하는 기준이 됐다. 색이 사라지면 어깨와 소매, 밑단의 선이 더 분명하게 남았다.
피치올리의 첫 쿠튀르는 발렌시아가의 과거를 한 시대로 정리하지 않았다. 크리스토발의 재단, 뎀나가 키운 옷의 비율, 피치올리가 오래 다뤄온 선명한 색을 한 컬렉션에 놓았다. 세 요소를 억지로 섞기보다 검정 드레스, 색채가 강한 드레스, 재킷과 바지, 깃털 착장을 차례로 보여주며 서로의 차이를 남겼다.
쇼가 끝난 뒤 피치올리는 흰 작업복을 입은 아틀리에 구성원들과 함께 계단을 내려왔다. 디자이너 한 명만 인사하는 대신 재단과 드레스, 자수와 소재 작업에 참여한 제작진이 런웨이에 섰다. 무대 장치를 줄이고 옷을 앞세운 쇼는 옷을 만든 사람들의 등장으로 마무리됐다.
55번째 쿠튀르에서 발렌시아가의 옷은 작아지지 않았다. 넓은 어깨와 긴 바지, 몸을 덮는 드레스도 남았다. 달라진 부분은 큰 옷을 보여주는 순서와 방법이었다. 피치올리는 검정의 비중을 유지하면서 강한 색을 넓게 넣었고, 고정된 형태와 흔들리는 원단을 한 벌에 묶었다. 뎀나 이후 발렌시아가가 내놓은 첫 쿠튀르는 전임자의 흔적을 지우는 데 힘을 쓰지 않았다. 이미 커져 있던 옷에서 무대 연출을 덜어내고 재단과 색, 움직임을 다시 앞에 놓았다.
앞으로 발표될 여성 기성복에서는 쿠튀르에서 나온 넓은 어깨와 긴 바지가 어느 정도로 줄어드는지, 라임과 바이올렛 같은 색이 재킷과 가방, 신발까지 이어지는지 확인할 수 있다. 첫 쿠튀르가 제시한 방향은 거대한 드레스에만 머물지 않았다. 발렌시아가가 다음 시즌에 내놓을 재킷과 코트, 바지의 폭까지 이미 바꾸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