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 잠금장치와 실 제본, 눌린 종이 결과 닳은 가장자리까지… 작은 책 한 권이 먼저 드러낸 보존의 역사

완성작의 위엄보다 가까운 손의 흔적, 스크랩북은 그림보다 앞선 작업의 시간을 물성으로 남겼다

[특별기획①] 피카소 스크랩북, 가죽 표지 안에 접힌 시간.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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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박준식기자]손바닥에 가까운 작은 책은 닫힌 상태부터 오래된 시간을 드러냈다. 짙은 갈색 가죽 표지는 한 번에 만들어진 광택이 아니라 오래 쥐고 오래 여닫은 물건에서만 나오는 마모를 품고 있다.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띠와 금속 잠금장치는 이 책이 단순한 종이 묶음이 아니라 닫아 두고 지켜야 했던 보관물이었다는 인상을 먼저 남긴다. 그림보다 물건이 먼저 다가오는 이유도 그 대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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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안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책의 시간이 더 분명해진다. 안감으로 댄 가죽은 종이를 감싸고 있지만, 내부 첫 장은 이미 균열과 눌림을 오래 견딘 표면을 드러낸다. 표지와 내지가 만나는 경계에서는 장식보다 구조가 먼저 보인다. 감상용 앨범보다 작업과 보존을 함께 견딘 수첩, 혹은 오래 품고 다닌 기록물에 가까운 인상이 여기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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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는 단정하게 재단된 현대 제본물의 종이와 다르다. 가장자리는 곧게 잘린 면보다 섬유질이 살아 있는 결에 가깝고, 장마다 높낮이가 조금씩 어긋난다. 얇은 종이들이 가지런히 정리된 책이라기보다, 시간과 습기와 압력을 통과한 판들이 층층이 포개진 책처럼 보인다. 표면은 매끈하게 남지 않았다. 눌림과 뒤틀림, 마찰과 산화가 종이 전체에 고르게 스며 있다. 이 스크랩북에서 보존의 역사는 문서 밖 설명이 아니라 종이 자체의 상태로 먼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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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구조를 붙들고 있는 힘도 눈에 남는다. 가운데 접힌 자리를 따라 제본 흔적이 살아 있고, 페이지 중심에는 실로 꿰맨 자리가 반복된다. 몇 장의 느슨한 낱장 모음이 아니라, 끝까지 책의 형태를 버티도록 묶인 물건이라는 뜻이다. 이 구조는 중요하다. 한 장의 그림이 아니라 순서와 축적, 앞장과 뒷장, 문장과 이미지가 한 권 안에서 이어지도록 만든 형식이기 때문이다. 스크랩북이라는 이름이 단순한 편의적 호칭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첫 장의 인상은 더 복합적이다. 프랑스어 필기와 장식선, 이름이 들어간 페이지는 메모지의 질서보다 헌정문이나 기록문에 가까운 배치를 보여 준다. 문장은 단순히 내용을 적기 위해 놓이지 않았다. 장식선과 여백, 획의 두께가 함께 화면을 이룬다. 그림이 등장하기 전부터 이미 이 책은 ‘보는 페이지’로 시작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드로잉이 들어 있는 책이기 전에, 글과 선을 같은 비중으로 다룬 기록물의 성격이 먼저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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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나오는 텍스트 페이지들에서도 같은 리듬이 이어진다. 문장은 줄글처럼 흐르지 않고, 행과 행 사이를 장식선이 끊고, 색선이 페이지의 결을 다시 세운다. 글과 그림이 분리된 장르로 나뉘기보다 하나의 화면 안에서 섞인다. 이 대목은 중요하다. 이 스크랩북이 단순한 드로잉북이 아니라, 쓰기와 그리기가 같은 손의 리듬 안에서 오간 책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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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물성은 뒤에 나오는 인물 드로잉의 읽는 방식까지 바꿔 놓는다. 전시장 벽에 걸린 대형 캔버스는 관객을 뒤로 물러서게 만든다. 그러나 이 작은 책은 시선을 가까이 붙들어 둔다. 표지의 마모를 먼저 보고, 종이의 결을 보고, 제본 실의 위치를 보고, 그다음에야 얼굴선과 몸의 윤곽으로 들어가게 만든다. 피카소를 완성된 결과물의 이름으로 마주하는 방식과는 다른 독해가 여기서 시작된다. 이 책에서 피카소는 거대한 명성의 작가보다 먼저, 선을 남기고 문장을 쓰고 페이지를 접어 넘긴 손으로 다가온다.

낡았다는 말만으로는 이 책의 상태를 다 설명하기 어렵다. 오래 닫혀 있던 표지와 반복해 펼쳐진 내지가 서로 다른 속도로 시간을 건넜고, 종이와 가죽, 실과 필기는 한 권 안에서 제각기 다른 마모를 남겼다. 가죽은 형태를 붙들고, 종이는 가장자리부터 먼저 닳고, 필기는 표면에 눌어붙듯 남았고, 제본은 끝까지 책의 구조를 버텼다. 한 권의 책 안에 시간이 한 겹씩 내려앉은 모습에 가깝다. 스크랩북을 펼치면 그림보다 먼저 표지와 종이, 실과 필기가 함께 견딘 세월이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은 이미지의 묶음이기 전에 오래 살아남은 물건이다.

피카소 스크랩북의 첫인상은 화려하지 않다. 오래 닳은 표지와 금속 장치, 눌린 종이와 들뜬 단면, 실 제본과 첫 장의 필기처럼 느리고 무거운 요소들이 먼저 나온다. 바로 그 점이 이 책을 특별하게 만든다. 명작의 광채보다 오래 버틴 물건의 시간이 먼저 서고, 완성작의 권위보다 손이 머문 표면이 더 오래 시선을 붙든다. 이 책은 먼저 그림을 담은 책이 아니라, 시간을 버텨 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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