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드라마, 오래된 목소리와 다시 불린 노래가 사랑·이별·그리움의 시간으로 이어지는 구띠의 선곡

구띠커피갤러리, 전시가 있는 낮과 음악이 흐르는 저녁으로 방문의 폭 확장. 사진=구띠커피갤러리,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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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박준식기자]‘청춘’으로 시작한 음악은 사랑과 이별, 꿈과 그리움을 지나 ‘Amado Mio’에 닿는다. 구띠커피갤러리가 ‘음악이 있는 저녁’을 위해 엮은 선곡은 77분 남짓 이어진다. 한국 가요와 영화음악, 공연 영상과 커버가 시대순으로 정렬되지 않은 채 서로의 기억을 불러낸다. 첫 곡이 지나간 젊음을 돌아보게 한다면 마지막 곡은 다시 사랑의 언어로 밤을 돌려놓는다.

노래를 고른 기준은 장르의 균형이나 발표 연도의 흐름과 거리가 있다. 어느 영화에서 들었는지, 누구의 목소리로 기억하는지, 세월이 흐른 뒤 언제 다시 만났는지가 곡과 곡 사이를 잇는다. 재즈와 포크, 한국 가요와 영화 주제가가 자유롭게 오가는 구성은 음악사를 정리한 연표보다 한 사람의 기억이 움직이는 방식에 가깝다.

기억은 오래된 순서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한 곡이 배우의 얼굴을 떠오르게 하고, 영화 속 얼굴은 당시 함께 극장에 갔던 사람을 불러낸다. 오래전 거리와 계절이 되살아난 뒤에는 전혀 다른 시기의 노래가 따라온다. 구띠의 선곡이 빠르게 국적과 시대를 건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첫머리에는 다시 불린 청춘이 놓인다. ‘청춘’과 ‘너의 의미’, 영화 ‘수상한 그녀’에서 다시 만난 ‘하얀나비’가 문을 연다. 젊은 날의 찬란함을 앞세우기보다 지나간 시간을 지금의 목소리로 다시 부르는 노래들이다. 원곡을 그대로 복원하지 않고 드라마와 영화, 커버를 거치며 새로운 세대에게 건너온 음악이 저녁의 입구를 만든다.

구띠커피갤러리, 전시가 있는 낮과 음악이 흐르는 저녁으로 방문의 폭 확장. 사진=구띠커피갤러리,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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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라는 말은 나이를 가리키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당시에는 알지 못했던 사랑과 가족, 선택의 무게를 시간이 지난 뒤 되돌아보게 한다. 젊음을 이미 지난 사람에게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 되고, 이제 막 그 시간을 살아가는 세대에게는 언젠가 기억이 될 현재로 남는다.

‘너의 의미’는 오래된 노래가 새로운 목소리를 만나 전혀 다른 세대의 일상으로 들어온 흐름을 잇는다. 익숙한 선율에 부드러운 음색이 더해지면서 과거의 노래라는 거리감은 옅어진다. 한 시대의 유행가가 세대를 건너는 과정에는 원곡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오늘의 감정으로 다시 받아들이게 하는 힘이 작용한다.

‘하얀나비’는 영화 속에서 젊은 얼굴과 늙은 마음을 한 인물 안에 겹쳐 놓는다. 다시 주어진 청춘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새롭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젊어진 몸 안에는 가족을 위해 살아온 세월과 미뤄둔 꿈, 먼저 늙어버린 마음이 남아 있다. 노래는 잃어버린 젊음을 찬양하기보다 지나온 삶까지 안고 다시 무대에 서는 사람의 감정을 들려준다.

 

청춘의 문을 지난 뒤 선곡은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의 ‘River of No Return’으로 단숨에 건너간다. 조금 전까지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에 머물던 시선이 미국 고전영화의 강물과 배우의 목소리로 이동한다. 이어 최백호와 린의 ‘낭만에 대하여’, 장사익의 ‘열아홉 순정’, 리사 오노(Lisa Ono)의 ‘A Man and A Woman’이 차례로 놓인다.

시대와 국가가 빠르게 달라지지만 정서는 끊어지지 않는다. 돌아갈 수 없는 강과 세월이 묻은 낭만, 나이 든 목소리로 다시 부르는 열아홉의 마음, 상실을 품은 채 새로운 사랑 앞에 선 사람들의 시간이 이어진다. 청춘은 지나갔어도 사랑을 기다리는 마음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흐름이다.

최백호와 장사익의 목소리에는 젊은 가수의 매끈한 발성과 다른 시간이 묻어 있다. 숨이 닿는 자리와 길게 끌리는 음, 조금은 거칠어진 음색이 노래 바깥의 생을 전한다. 가사의 낭만과 순정은 이상적인 사랑의 수사가 아니라 여러 계절을 지나고도 남은 마음으로 들린다.

‘A Man and a Woman’에 이르면 선곡은 다시 영화의 기억으로 들어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뒤 새로운 관계를 받아들이는 일은 과거를 잊는 선택이 아니다. 사라진 사람의 자리를 품은 채 다시 살아가기로 하는 마음에 가깝다. 프랑시스 레이의 선율을 떠올리는 순간 빗속의 자동차와 바닷가, 말을 아끼던 두 사람의 표정이 함께 돌아온다.

영화음악이 오래 남는 까닭은 줄거리를 다시 설명하기 때문이 아니다. 인물이 끝내 다 말하지 못한 마음을 선율에 남기기 때문이다. 대사의 정확한 문장을 잊은 뒤에도 음악이 시작되면 사랑을 망설이던 표정과 돌아서던 뒷모습이 먼저 되살아난다. 노래는 한 편의 영화를 몇 분 안에 현재로 불러오는 기억의 통로가 된다.

선곡은 김정미의 목소리에서 다시 한국 대중음악의 시간으로 돌아온다. ‘이건 너무 하잖아요’와 ‘봄’이 이어지고, 이재성의 ‘그 집앞’은 소극장 라이브의 호흡으로 들어온다. 오래된 음반에서 태어난 음악과 수십 년 뒤의 공연, 드라마를 통해 다시 알려진 노래가 한자리에서 만난다.

김정미의 ‘봄’은 지나간 계절의 음악으로 머물지 않았다. 반세기 가까운 시간을 건너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와 만나면서 새로운 인물과 삶을 얻었다. 원곡을 기억하는 세대에게는 오래된 청춘이 돌아오고, 젊은 시청자에게는 애순과 관식의 시간을 통해 처음 만난 노래가 된다. 옛 음악을 박제하지 않고 오늘의 이야기 안에서 다시 살게 하는 방식이다.

‘그 집앞’의 소극장 라이브도 완성된 음원을 다시 재생하는 것과 다른 감정을 남긴다. 오랜 세월 불린 노래가 현재의 무대와 관객 앞에서 다시 호흡한다. 목소리가 조금 달라지고 음 사이의 간격이 길어지면서 노래를 부른 사람과 듣는 사람이 함께 나이 들어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부베의 연인’ 이후에는 같은 제목의 노래가 서로 다른 목소리로 이어진다. 다비치와 조째즈가 부른 ‘모르시나요’는 한 곡이 가수와 무대에 따라 얼마나 다른 표정을 갖는지를 들려준다. 하나는 두 목소리의 조화와 공연장의 호흡을 품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감정을 가까이 끌어당긴다. 실제 배열에서도 두 버전은 나란히 놓여 같은 노래의 서로 다른 생을 비교하게 한다.

노래는 한 번 발표된 뒤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가수가 부르고 영화와 드라마가 다시 발견하며, 듣는 사람의 삶이 달라질 때마다 의미도 달라진다. 젊은 시절에는 이별의 노래로 들렸던 곡이 세월이 지난 뒤에는 가족이나 친구, 떠나간 사람을 향한 마음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중반 이후에는 꿈과 추억, 떠남을 품은 제목들이 연달아 등장한다. 탕웨이(Tang Wei)의 ‘꿈속의 사랑’에서 이필원의 ‘추억’으로 이어지고, 메리앤 페이스풀(Marianne Faithfull)의 ‘Little Bird’ 뒤에는 박인희의 ‘떠날 때는 말없이’가 놓인다. 존박의 ‘이상한 사람’, 김추자의 ‘빗속을 거닐며’, 노영심의 ‘그리움만 쌓이네’도 같은 흐름을 지난다.

중국어권의 노래와 한국 포크, 영국의 오래된 목소리와 드라마 음악이 빠르게 교차한다. 음악적 계보만 놓고 보면 거리가 멀지만 꿈과 추억, 떠남과 비, 그리움이라는 말이 곡 사이를 잇는다. 한 사람의 기억 속에서 특정한 노래가 다른 노래를 불러오는 연상과 닮았다.

꿈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잠시 되돌려놓고, 추억은 이미 지나간 시간을 마음 안에 머물게 한다. 떠나는 사람은 말을 남기지 못하고, 남은 사람은 빗속을 걷거나 그리움을 쌓는다. 노래의 국적과 시대는 달라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과 시간 앞에 선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다.

구띠커피갤러리, 전시가 있는 낮과 음악이 흐르는 저녁으로 방문의 폭 확장. 사진=구띠커피갤러리,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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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앤 페이스풀과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의 음색에는 세월의 흔적이 깊게 배어 있다. 고르게 다듬어진 소리보다 숨과 떨림, 조금은 닳은 듯한 목소리가 앞에 선다. 장사익과 최백호의 노래도 같은 결을 지닌다. 화려한 기교보다 삶을 지나온 목소리가 구띠의 저녁을 회상과 여운 쪽으로 기울인다.

마지막에 가까워지면 사랑은 한층 위태로운 얼굴로 돌아온다. 빌리 홀리데이의 ‘I’m a Fool to Want You’는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놓지 못하는 마음을 담는다. 사랑을 아름답게 포장하기보다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알면서도 다시 그 사람을 원하는 모순을 드러낸다.

이어지는 ‘Graduation Tears’는 개인의 사랑을 청춘의 작별로 넓힌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를 기억하는 관객에게 노래는 교복과 버스, 폭력적인 학교와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함께 불러낸다. 졸업은 새로운 출발이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뒤에 남기는 일이기도 하다.

상처 입은 사랑과 졸업의 눈물을 지난 마지막에는 핑크 마티니(Pink Martini)와 스톰 라지(Storm Large)의 ‘Amado Mio’가 놓인다. ‘나의 사랑’이라는 뜻의 노래가 끝을 맡으면서 선곡은 이별과 그리움 속에 가라앉지 않는다. 지나간 사랑을 되돌릴 수는 없어도 사랑했던 감각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여운을 남긴다. 실제 배열에서 마지막 세 곡은 상처와 작별을 거쳐 다시 사랑으로 돌아오는 선명한 마무리를 이룬다.

‘청춘’과 ‘Amado Mio’ 사이에는 수십 년의 음악과 영화가 놓여 있다.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영화의 시간은 1946년 ‘길다’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선곡에는 2025년 공연의 목소리도 들어온다. 세월의 폭을 메우는 것은 음악의 유행이 아니라 사람이 노래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누군가에게 ‘하얀나비’는 오래된 가요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수상한 그녀’의 배우가 부른 노래다. 김정미의 ‘봄’을 음반으로 먼저 들은 세대와 ‘폭싹 속았수다’를 통해 알게 된 세대도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있다. 서로 다른 시대에 음악을 만난 사람들이 한 곡을 두고 각기 다른 얼굴과 대사, 가족과 청춘을 떠올린다.

구띠의 선곡은 기억을 일정한 방향으로 안내하지 않는다. 오래된 서랍을 하나씩 열듯 영화와 방송, 음반과 공연 사이를 오간다. 전환이 잦은 배열도 한 사람의 취향이 시대와 국경을 건너 축적되는 과정으로 읽힌다. 음악은 연대순으로 정돈되지 않지만 감정은 청춘에서 낭만으로, 사랑에서 이별로, 꿈과 그리움을 지나 다시 사랑으로 흐른다.

마지막 노래가 끝난 뒤 남는 것은 곡의 수나 재생시간이 아니다. 배우의 얼굴과 잊고 있던 대사, 함께 영화를 봤던 사람과 당시의 자신이 조용히 돌아온다. 구띠커피갤러리의 저녁은 오래된 음악을 감상하는 자리를 넘어 서로 다른 세대가 각자의 청춘을 한 테이블에 꺼내놓는 시간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