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경험에서 출발한 노란 머리 인물…가족과 돌봄을 만나고, 멈춘 몸은 일상의 행동으로 이동
[KtN 박준식기자]2025년 세계 미술시장에서는 여성 작가의 가시성이 다시 높아졌다. 주요 경매에서 기성작가와 신진작가가 함께 주목받았고, 세대와 지역, 작업 방식이 다른 여성 작가군으로 관심의 폭도 넓어졌다. 시장의 가격 기록과 별개로 여성의 경험과 정체성, 재현을 다시 읽는 흐름이 미술관과 시장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구승희 작업에서 이 흐름과 나란히 볼 부분은 여성 인물의 출발점이다. 지금은 노란 곱슬머리와 큰 눈으로 익숙해진 인물이 처음부터 고정된 캐릭터였던 것은 아니다. 다양한 현대 여성을 그리던 시기를 지나 아이를 키우면서 활동 반경이 좁아졌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인 자신을 모델로 삼아 한 인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2014년 ‘순간’에는 그 여성이 거의 혼자 남아 있다. 붉은 바탕과 크게 부풀어 오른 노란 머리, 위로 향한 눈이 구성을 지배하고 주변 인물이나 구체적인 생활의 흔적은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얼굴과 머리에 집중된 구성은 외부의 사건보다 한 사람의 감정과 생각을 가까이 들여다보게 한다. 이번 출품작에서 ‘순간’은 2014년 장지채색 작업으로 확인된다.
이 인물을 작가의 자화상으로만 고정할 필요는 없다. 출발에는 구승희 자신의 생활이 있었지만 얼굴은 사실적인 초상보다 단순화됐고, 노란 머리와 큰 눈이 반복되면서 특정 개인의 외모에서 멀어졌다. 자기 경험에서 태어난 인물이 여러 작품을 통과하며 다른 관계와 행동을 받아들일 수 있는 형식으로 바뀐 셈이다.
변화가 뚜렷해지는 시기는 2023년 작품군이다. ‘행복을 실고’, ‘우리’, ‘소중함’, ‘언제나’, ‘행복이란’, ‘너와 함께라면’이 같은 해에 제작됐다. 한 사람의 얼굴에 집중했던 작업에서 여러 인물이 함께 등장하고, 가족과 아이, 이동과 만남이 구체적으로 늘어나는 흐름을 볼 수 있다.
‘우리’에서는 노란 머리의 여성만으로 구성이 끝나지 않는다. 여러 인물이 한곳에 모여 서로 가까운 거리를 이루고, 인물 사이의 관계 자체가 그림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한 사람의 내면을 확대했던 ‘순간’과 달리 시선이 여러 얼굴과 몸 사이를 오가면서 행복의 단위도 개인에서 집단으로 넓어진다. 작품 목록에서도 ‘우리’는 2023년 장지채색 작업으로 분류돼 있다.
가족이 작품에 들어온 배경은 작가의 행복관 변화와 연결된다. 성공해야 가족에게 더 잘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시기를 지나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 가족과 식사하는 평범한 생활 자체를 행복으로 다시 받아들이게 됐다. 가족과 이웃, 시원한 물과 바람처럼 가까이에 이미 존재하던 것들을 뒤늦게 발견했다는 설명도 이어진다.
중요한 변화는 가족이라는 소재 자체보다 인물 사이의 거리다. 혼자 있을 때 노란 머리는 얼굴을 둘러싼 거대한 색면이지만 여러 사람이 등장하면 머리의 크기와 색은 다른 인물을 구별하고 관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함께 맡는다. 반복돼온 캐릭터가 관계 속으로 들어가면서 구도 역시 단독 인물 중심에서 여러 몸이 맞물리는 쪽으로 달라진다.
‘너와 함께라면’에서는 관계가 한층 가까워진다. 노란 머리의 여성과 작은 인물이 몸을 맞댄 채 한 덩어리에 가깝게 묶이고, 제목 역시 혼자가 아닌 상대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배열한 ‘우리’와 달리 두 인물 사이의 접촉과 돌봄에 시선이 집중된다. ‘너와 함께라면’ 역시 2023년 제작된 장지채색 작업이다.
구승희가 그림의 소재를 멀리서 찾지 않고 주변에서 가져온다는 점도 이런 변화와 맞닿는다. 가족뿐 아니라 작품에 등장하는 강아지도 실제 생활 가까이에 있던 존재에서 출발했다. 생활 주변의 사람과 동물이 작품 안으로 들어오면서 행복을 설명하는 방식도 추상적인 꽃과 색에서 관계와 행동으로 넓어진다.
‘행복을 실고’에서는 관계의 확대와 함께 몸의 움직임도 달라진다. 노란 머리의 여성은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고, 정지한 얼굴 중심의 구도에서 벗어나 인물의 행동이 작품을 끌고 간다. 2014년 ‘순간’에서 눈과 고개가 움직임을 대신했다면 2023년에는 몸이 직접 공간을 통과하기 시작한다. ‘행복을 실고’는 같은 해 가족과 관계를 다룬 작품군과 함께 놓여 있다.
여성 작가를 다시 보는 최근 국제 미술계의 흐름 역시 결국 작품 안에 어떤 경험이 축적됐는지를 함께 살핀다. 2025년 시장보고서는 여성 작가 재평가 과정에서 제도적 평가와 지속적인 작업, 정체성과 재현을 둘러싼 관심이 함께 작동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구승희 작업의 위치를 세계적인 기록과 직접 비교할 근거는 없지만, 육아와 작업을 병행했던 개인의 생활이 여성 인물의 탄생과 관계의 변화로 이어졌다는 과정은 작품 자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순간’에서 ‘우리’, ‘너와 함께라면’, ‘행복을 실고’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노란 머리와 큰 눈은 그대로 남는다. 달라진 것은 인물이 혼자 서 있는 방식이다. 얼굴 안에 집중됐던 감정은 다른 사람을 만나고, 몸을 맞대고, 함께 생활하며, 이동하는 행동으로 넓어진다.
구승희 회화에서 ‘우리’가 설득력을 얻으려면 가족이라는 소재만 반복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여러 인물이 등장할 때 서로 다른 표정과 몸짓, 거리와 공간이 얼마나 세밀하게 달라지는지가 작품 간 차이를 만든다. 자기 경험에서 출발한 한 여성이 관계 속에서 계속 새로운 행동을 얻을 때, 반복돼온 노란 머리 역시 고정된 캐릭터보다 변화하는 인물로 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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