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의 파나비전·롱테이크 실험에서 ‘배창호의 클로즈 업’까지…2026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선출

[KtN 임우경 · 박준식기자]배창호 감독은 인터뷰 도중 나무 한 그루를 예로 들었다. 나무 아래 쓰레기와 비닐봉지가 놓여 있더라도 모두 프레임 안에 남길 필요는 없다고 했다. 버려진 쓰레기를 말하려는 영화라면 그대로 담아야 하지만, 나무와 자연에 집중한다면 덜어낼 수 있다. 눈앞의 풍경을 빠짐없이 옮기는 일보다 작품이 향하는 곳에 따라 남길 것과 지울 것을 결정하는 선택이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자연스럽다는 것과 사실적이라는 것은 다릅니다.”

카메라가 놓이고 배우가 인물을 연기하는 순간, 현실은 촬영 이전과 다른 질서 안에 놓인다. 배창호 감독은 K trendy NEWS와의 인터뷰에서 영화를 현실의 복제가 아닌 재창조로 규정했다. 실제 공간과 똑같은 세트를 만들고 일상의 세부를 빠짐없이 채우는 것만으로 영화의 사실성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관객이 인물의 감정과 공간의 흐름을 거스름 없이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일이 배창호가 말하는 자연스러움에 가깝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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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황진이’에는 연출의 선택과 절제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장미희가 황진이를, 안성기가 갖바치를 맡았고 정일성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잡았다. 국내 영화 최초로 파나비전 카메라를 동원했지만 새로운 장비를 화려한 볼거리로 소비하지 않았다. 넓어진 프레임에는 인물을 중심에서 비켜 세운 구도와 비어 있는 공간을 담았다.

절제된 롱테이크는 황진이의 삶을 빠르게 요약하는 대신 인물의 감정이 공간 안에서 지속되는 시간을 확보했다. 대사와 사건으로 빈틈없이 채우지 않은 구도에서는 관객이 황진이의 표정과 이동, 인물 사이의 거리를 읽어야 했다. 촬영 기술의 진보를 장면의 크기로 환산하지 않고 영화의 시간과 공간을 다시 설계하는 데 사용한 작업이었다.

‘적도의 꽃’,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으로 대중적 성공을 이어온 감독이 전작의 리듬을 반복하지 않았다는 점도 ‘황진이’의 위치를 달리한다. 단관 개봉과 35㎜ 필름 상영이 중심이던 1980년대에는 개봉관의 반응이 작품의 흥행을 좌우했다. 배창호 감독은 빠른 전개와 익숙한 감정선을 따르는 대신 긴 호흡과 여백을 선택했다.

배창호 감독은 어느 한쪽을 고정된 문법으로 삼지 않았다. 작품이 요구하는 감정의 속도에 따라 커트를 연결하고, 때로는 카메라를 한곳에 오래 머물게 했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배창호 감독은 어느 한쪽을 고정된 문법으로 삼지 않았다. 작품이 요구하는 감정의 속도에 따라 커트를 연결하고, 때로는 카메라를 한곳에 오래 머물게 했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영화사는 몽타주와 롱테이크를 시간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뤄왔다. 몽타주가 쇼트와 쇼트의 결합으로 속도와 의미를 만든다면, 롱테이크는 끊어지지 않는 시간 안에서 인물과 공간의 관계를 드러낸다. 배창호 감독은 어느 한쪽을 고정된 문법으로 삼지 않았다. 작품이 요구하는 감정의 속도에 따라 커트를 연결하고, 때로는 카메라를 한곳에 오래 머물게 했다.

‘황진이’에서 본격화한 형식 탐색은 이후 작품에서도 다른 모습으로 이어졌다. ‘꿈’은 조신 설화를 바탕으로 욕망과 집착을 다뤘고, ‘러브스토리’와 ‘정’은 사랑과 부부, 한 여성의 생애를 더욱 개인적인 거리에서 바라봤다. ‘길’과 ‘여행’에서는 떠도는 인물의 발걸음에 기억과 속죄, 관계의 회복을 실었다.

2025년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와 한국영상자료원은 ‘배창호 특별전: 대중성과 실험성 사이에서’를 열었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2025년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와 한국영상자료원은 ‘배창호 특별전: 대중성과 실험성 사이에서’를 열었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영화의 규모와 제작 방식은 달라졌지만 카메라가 향한 인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완전한 영웅보다 결핍을 지닌 사람, 사회의 중심에 편안하게 들어가지 못한 사람, 길 위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며 조금씩 달라지는 사람이 배창호 영화에 남았다. 자연스러움은 현실과 닮은 외형만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을 과장하거나 재단하지 않는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

2025년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와 한국영상자료원은 ‘배창호 특별전: 대중성과 실험성 사이에서’를 열었다. 특별전의 제목은 배창호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두 흐름을 함께 담았다. 대중의 감정을 읽는 이야기와 영화 형식에 대한 탐색은 서로 떨어진 시기가 아니라 한 감독의 작품 안에서 거듭 자리를 바꿨다.

2025년 다큐 영화 연출작 "배창호의 클로즈 업" 스틸,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2025년 다큐 영화 연출작 "배창호의 클로즈 업" 스틸,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박장춘 감독과 공동 연출한 다큐멘터리 ‘배창호의 클로즈 업’도 특별전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됐다. 2025년 제작된 90분 분량의 작품으로, 배창호 감독이 과거 영화를 촬영했던 장소를 다시 찾아가는 여정을 담았다. ‘여행’ 이후 내놓은 연출작에서 카메라는 또다시 길 위에 놓였다.

‘배창호의 클로즈 업’은 대표작과 수상 이력을 차례로 정리하는 연대기보다 로드무비에 가깝다. 수십 년 전에 배우와 제작진이 머물렀던 장소를 다시 걸으며 달라진 풍경과 남아 있는 기억을 마주한다. 영화 속 공간을 찾아가는 이동은 한 감독의 생애를 돌아보는 방식이자 한국영화 제작 현장의 변화를 기록하는 과정이 됐다.

필름 카메라와 단관극장의 시대는 디지털 촬영과 멀티플렉스, 온라인동영상서비스의 시대로 넘어왔다. 제작비와 장비의 규모가 커졌고 세트와 후반작업으로 구현할 수 있는 범위도 넓어졌다. 고해상도 영상은 과거보다 많은 세부를 담지만, 눈에 잡히는 정보의 양이 영화적 밀도와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배창호 감독은 특히 젊은 배우들의 연기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사실적인 표현과 자연스러운 표현을 구분하는 연출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배창호 감독은 특히 젊은 배우들의 연기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사실적인 표현과 자연스러운 표현을 구분하는 연출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배창호 감독은 실제 건물과 똑같은 세트를 만드는 일보다 작품에 필요한 세부를 골라내는 판단을 앞세웠다. 현실을 정밀하게 재현할 수 있는 기술이 늘어날수록 감독이 무엇을 찍지 않을지 결정하는 선택도 중요해진다. ‘황진이’의 여백과 롱테이크는 디지털 시대에도 유효한 연출 원칙으로 남는다.

젊은 창작자들의 기술적 수준에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영화 교육이 넓어지고 단편·독립영화 제작 기회가 늘면서 첫 작품부터 촬영과 연기에서 높은 완성도를 갖춘 감독들이 등장했다는 설명이다. 배창호 감독은 특히 젊은 배우들의 연기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사실적인 표현과 자연스러운 표현을 구분하는 연출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감독마다 작품으로 길어 올릴 수 있는 경험의 양도 다르다고 했다. 배창호 감독은 이를 ‘매장량’이라고 표현했다. 오랫동안 당구를 쳐온 사람이 당구 영화에서 몸의 움직임과 공간의 질서를 세밀하게 담아낼 수 있듯, 살아온 시간과 깊이 파고든 대상은 감독만의 자원이 된다.

“사람마다 자기만 가지고 있는 매장량이 있습니다. 인생과 인간을 보는 힘은 시간이 걸립니다.”

기술은 교육과 제작 경험을 통해 빠르게 익힐 수 있지만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두 작품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여러 작품을 거치며 자신만의 매장량을 꺼낼 수 있도록 창작을 이어갈 환경도 필요하다. 완성도 높은 데뷔작을 만드는 능력과 오랜 시간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힘은 서로 다른 시간표를 따른다.

한국영화와 K콘텐츠가 세계 관객에게 빠르게 전달되는 환경에서도 배창호 감독은 외형적인 한국성과 삶에서 형성된 감각을 구분했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한국영화와 K콘텐츠가 세계 관객에게 빠르게 전달되는 환경에서도 배창호 감독은 외형적인 한국성과 삶에서 형성된 감각을 구분했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한국영화와 K콘텐츠가 세계 관객에게 빠르게 전달되는 환경에서도 배창호 감독은 외형적인 한국성과 삶에서 형성된 감각을 구분했다. 전통 의상이나 음악을 현대적인 형식과 결합하는 것만으로 한국적인 작품이 완성되지는 않는다는 입장이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은 맞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국적인 어떤 것이냐는 겁니다.”

한국어의 말끝에 실리는 감정, 사람 사이에 오랜 시간 쌓이는 정, 화려함보다 여백을 중시하는 미감은 장식처럼 덧붙일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다. 한국에서 살아온 경험이 인물과 이야기, 카메라의 호흡 안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날 때 작품의 고유성이 생긴다는 설명이다. 세계 시장을 의식해 익숙한 전통 이미지를 조합하는 방식과 배창호 감독이 말하는 한국적인 영화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대한민국예술원은 2026년 6월 25일 제77차 정기총회에서 배창호 감독을 영화 분야 신입회원으로 선출했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대한민국예술원은 2026년 6월 25일 제77차 정기총회에서 배창호 감독을 영화 분야 신입회원으로 선출했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대한민국예술원은 2026년 6월 25일 제77차 정기총회에서 배창호 감독을 영화 분야 신입회원으로 선출했다. 7월 8일 열린 신입회원 환영식에서는 선출통지서가 전달됐다. 1982년 ‘꼬방동네 사람들’로 장편 연출을 시작한 지 44년 만이다.

배창호 감독은 예술원 회원 선출을 작품 활동의 마침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국예술의 수준과 역사를 국내외에 알리고 새로운 작품 준비와 예술계 활동을 이어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예술원에 누가 되지 않도록 작품도 준비하고 한국예술 발전을 위해 봉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