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테르나크가 기록한 혁명 속 개인의 삶과 사랑
데이비드 린의 설경과 '라라의 테마'에 겹쳐진 기억
[KtN 박준식기자]유리 지바고가 죽은 뒤에도 소설에는 그의 목소리가 남는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마지막에는 주인공의 이름으로 된 시들이 실려 있다. 의사이자 시인이었던 한 사람의 생애를 따라온 독자는 마지막에 이르러 그가 남긴 글을 읽는다. 전쟁과 혁명이 흩어놓은 만남과 이별은 시를 통해 다시 독자에게 도착한다.
1957년 처음 출간된 '닥터 지바고'는 사랑하는 사람을 끝내 붙잡지 못한 남자의 이야기이면서, 개인이 자신의 삶을 설명할 언어를 지키려는 이야기다. 유리는 역사의 방향을 결정할 수 없다. 머물던 집을 떠나야 하고, 가족에게 돌아가려던 길에서 붙잡히며, 뒤늦게 도착한 편지로 이미 벌어진 이별을 알게 된다. 자신의 뜻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드는 동안에도 주변의 삶을 바라보고 글을 쓰는 감각은 남는다.
유리에게 의사와 시인이라는 두 역할이 주어진 점은 작품을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의사는 눈앞의 몸이 겪는 고통을 살피고, 시인은 그 사람이 느끼고 기억하는 것을 언어로 옮긴다. 전쟁이 사람을 소속과 진영으로 구분할 때 유리는 개별적인 생명과 마주한다. 누군가에게는 역사의 전진으로 기록될 사건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귀가하지 못한 하루, 소식을 알 수 없는 가족의 이름으로 남는다.
라라와 가까워지는 과정에도 전쟁이 들어 있다. 유리는 군의관으로, 라라는 간호사로 병원에서 함께 일한다. 부상자를 돌보고 혼란을 견디는 시간이 두 사람 사이에 쌓인다. 서로에게 끌리지만 각자에게는 돌아갈 가족이 있다. 만남의 감정은 처음부터 이미 맺어진 관계들과 함께 존재한다.
유리의 아내 토냐는 어린 시절부터 같은 집에서 자란 사람이다. 그로메코 집안에서 함께 성장한 두 사람의 결혼에는 오랜 친밀감과 가족의 역사가 담겨 있다. 토냐를 라라와의 사랑을 가로막는 인물로만 읽으면 유리가 실제로 살아온 시간의 상당 부분이 사라진다. 집과 아이들, 함께 피란길에 오른 생활도 유리의 삶이다.
라라에게도 유리를 만나기 전의 역사가 있다. 코마롭스키의 영향력 아래서 겪은 고통, 파샤와의 결혼, 딸을 돌보는 생활이 이어진다. 라라는 한 시인의 영감을 위해 등장한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설명에 다 들어가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권력에서 벗어나려 애쓰고, 가족을 찾으며, 자신과 아이가 살아갈 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인물이다.
소설 속 우연한 재회에는 흩어진 사람들이 다시 마주치는 기쁨과 불안이 함께 있다. 다시 만났다는 사실은 앞으로도 함께 살 수 있다는 보장이 되지 못한다. 전쟁과 내전은 이동 경로를 바꾸고 연락을 끊는다. 인물들이 서로를 찾아가는 과정에는 감정의 결단만큼이나 열차와 도로, 식량과 거처 같은 현실적인 조건이 작용한다.
유리가 빨치산 부대에 붙잡혀 의사로 일하게 되는 대목은 개인의 시간이 강제로 빼앗기는 순간이다. 가족에게 돌아가겠다는 계획은 무장한 집단의 필요 앞에서 중단된다. 이후 탈출해 돌아와도 떠나기 전의 생활을 그대로 되찾을 수 없다. 자신이 없는 동안 가족은 이동했고 아이가 태어났으며 관계의 조건도 달라졌다.
토냐의 편지는 그 사이에 흘러간 시간을 전한다. 가족의 추방과 이별을 알리는 소식은 오랜 지연 끝에 유리에게 도착한다. 편지를 읽는 순간 유리는 이미 바꿀 수 없게 된 일들을 알게 된다. 소설에서 거리란 멀리 떨어져 있다는 뜻만이 아니다. 같은 시간을 함께 겪지 못하고, 상대가 겪은 일을 뒤늦게 알게 되는 간격이기도 하다.
라라의 이름과 선율이 오래 남는 작품일수록 토냐의 편지는 더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다. 한 사람의 사랑을 아름답게 기억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기다림은 쉽게 짧아진다. 토냐가 감당한 가족의 생활과 상실을 함께 읽으면 유리의 사랑은 단순한 선택이나 운명이라는 말로 정리되지 않는다.
파스테르나크는 유리의 감수성을 섬세하게 기록하지만, 섬세한 사람이 반드시 가까운 사람을 덜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남긴다. 사랑을 느끼는 능력과 관계에 책임지는 능력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시대의 폭력이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 한편, 인물들이 내린 선택 역시 다른 사람의 생활에 흔적을 남긴다.
이 복잡한 삶을 지나온 뒤 소설의 마지막에 시가 놓인다. 시는 유리의 행동을 해명하는 진술서가 아니다. 자연과 사랑, 죽음과 신앙을 바라보는 언어를 통해 한 사람이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전한다. 독자는 사건 속에서 흔들리던 유리를 따라가다가, 그가 남긴 말 앞에서 다른 속도로 머무르게 된다.
파스테르나크는 1960년 문예지 '파리 리뷰'에 실린 인터뷰에서 소설에 함께 실린 시들이 작품의 구상을 드러내며, 소설을 더 풍부하게 하기 위해 배치됐다고 설명했다. 시는 산문이 끝난 자리에 덧붙인 장식이 아니라 작품의 구성을 이루는 부분이다. 연인들의 재회와 이별만 따라가서는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까지 도달하기 어려운 이유다.
소설의 출간 과정에도 개인의 언어와 권력의 충돌이 있었다. 소련에서 출간이 거부된 원고는 국외로 옮겨져 1957년 이탈리아에서 먼저 책으로 나왔다. 작품 속 유리가 자신의 삶을 뜻대로 꾸릴 수 없었던 것처럼, 작가 역시 자신의 나라에서 독자를 만나는 데 제약을 받았다. 사랑과 자연, 개인의 감각을 기록하는 일이 정치와 무관한 사적인 행위로 남을 수 없었던 시대였다.
데이비드 린이 연출한 1965년 영화는 파스테르나크의 문장을 광대한 풍경과 배우의 얼굴로 옮긴다. 오마 샤리프가 유리 지바고를, 줄리 크리스티가 라라를, 제럴딘 채플린이 토냐를 연기한다. 복잡하게 얽힌 소설의 인물과 사유는 유리의 생애와 사랑을 중심으로 압축되고, 관객의 기억에는 열차와 눈 덮인 들판, 얼어붙은 저택이 강하게 남는다.
그중 바리키노의 저택은 영화가 남긴 대표적인 장면이다. 유리와 라라는 라라의 딸과 함께 몸을 숨기고, 성에로 뒤덮인 실내에서 잠시 생활한다. 창과 벽을 덮은 흰 결정은 집을 현실에서 떨어져 나온 공간처럼 보이게 한다. 유리는 그곳에서 시를 쓴다.
그러나 아름다운 화면 안에서도 거처의 불안정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바리키노는 앞으로의 생활을 설계할 수 있는 안전한 집이 아니다. 인물들은 쫓기고 있으며 언제까지 머물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 얼어붙은 저택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시간을 아름답게 만들면서, 그 시간이 지속되기 어렵다는 사실도 함께 품는다.
영화를 본 뒤 오래 지나 그 장면을 떠올리면 추위보다 두 사람의 얼굴이 먼저 생각날 수 있다. 함께 있었던 짧은 시간이 주변의 폭력보다 선명해지는 것이다. 원작으로 돌아가면 화면에 응축됐던 감정의 앞뒤로 가족의 피란과 강제 동원, 늦게 도착한 편지가 다시 이어진다. 설경은 그런 삶의 한가운데 놓인 풍경이다.
모리스 자르가 작곡한 '라라의 테마'는 흩어진 장면들을 하나의 기억으로 이어준다. 발랄라이카의 뜯는 소리와 관현악의 선율은 영화 곳곳에서 다른 형태로 되돌아온다. 인물들은 이동하고 헤어지지만, 관객은 반복되는 음악을 통해 앞서 보았던 얼굴과 감정을 다시 떠올린다.
자르는 후일 인터뷰에서 데이비드 린이 처음에는 러시아 민요로 여겼던 곡을 사용하려 했지만 권리 문제로 포기했고, 자신이 새로운 주제를 쓰게 됐다고 설명했다.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완성한 곡은 왈츠풍의 '라라의 테마'였다. 러시아의 오래된 정서처럼 들리는 선율에는 영화를 위해 새로 만들어진 음악의 시간이 들어 있다.
이 선율은 영화 바깥에서도 다른 삶을 얻었다. 폴 프랜시스 웹스터가 영어 가사를 붙인 '섬웨어 마이 러브(Somewhere, My Love)'가 만들어졌고, 레이 코니프 등의 녹음으로 널리 알려졌다. 영화 속 연주곡이 목소리를 가진 노래가 되면서 유리와 라라의 구체적인 사연을 넘어 그리움과 재회의 감정을 전하게 됐다.
소설에서 영화로, 영화에서 음반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기억의 중심도 바꾼다. 책을 읽은 사람에게 '닥터 지바고'가 역사 속에서 흔들리는 여러 인물의 삶이라면, 음악을 먼저 접한 사람에게는 한 선율이 불러오는 그리움으로 시작될 수 있다. 작품 전체를 알기 전에 감정이 먼저 도착하는 방식이다.
첫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도 반드시 그 관계를 정확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함께 들었던 곡이 시간이 지나 어떤 사람의 얼굴과 연결되더라도, 음악에는 당시의 갈등과 서로 달랐던 마음까지 모두 담기지 않는다. 선율은 복잡한 시간을 짧게 불러내는 힘을 갖는 만큼,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흐리게 할지도 결정한다.
'라라의 테마' 역시 라라의 이름을 오래 남기지만 토냐의 기다림까지 대신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음악의 아름다움을 따라 소설로 돌아가면 연인들의 기억 곁에서 살아온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사랑을 기억하는 범위가 한 사람의 얼굴에서 그 얼굴을 둘러싼 삶으로 넓어진다.
영화의 한 장면을 짧은 영상으로 되보고, 음악을 따로 골라 듣는 감상 방식에서는 이런 이동이 더욱 자유로워진다. 눈 덮인 저택의 이미지와 선율만으로도 작품에 접근할 수 있다. 다만 그 장면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의미는 앞뒤의 이야기 안에 있다. 잠시 얻은 평온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보면 같은 설경의 무게가 달라진다.
파스테르나크가 마지막에 남긴 시들도 지나간 삶을 다시 읽게 한다. 시에는 인물을 재회시키거나 흩어진 가족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힘이 없다. 대신 사건의 결과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감각과 생각이 남는다. 무엇을 잃었는지와 함께, 무엇을 소중하게 여겼는지도 읽을 수 있게 된다.
소설의 에필로그에서 유리의 옛 친구 고든과 두도로프는 그가 남긴 시들을 읽는다. 한 사람의 삶을 기억하는 일은 그를 직접 알았던 사람들에게 이어지고, 책의 마지막에는 '유리 지바고의 시'가 놓인다. 전쟁과 이별을 따라온 이야기는 그렇게 남겨진 글을 읽는 시간으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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