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여백 위에 떠오른 청록·분홍·연두의 투과색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채 기억을 광원과 투명 재료로 전환…2009년 ‘빛의 나비’가 얻은 새로운 몸
[KtN 박준식기자]검은 바탕 위에 한 마리 나비가 떠 있다. 날개는 하나의 색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연두와 청록, 파랑과 분홍, 붉은빛이 작은 조각처럼 맞물리고, 그 사이를 짙은 검은 선이 가로지른다. 머리와 더듬이, 몸통은 어둠에 가까운 색으로 남아 있는 반면 날개 안쪽에서는 여러 색이 스스로 빛을 품은 듯 번진다.
나비킴(Navikim·김현정) 작가의 2009년작 ‘날으는 빛 4(Flying Lighting 4)’에서는 나비가 더 이상 자연을 묘사한 대상에 머물지 않는다. 2006년 ‘첫 만남’에서 꽃 위에 내려앉았던 나비가 구체적인 몸과 날개를 가진 생명체였다면, 3년 뒤의 나비는 색과 빛의 조각으로 다시 구성된다.
검은 여백은 단순한 배경 이상의 역할을 한다. 나비 주변에 다른 자연물이나 공간을 두지 않으면서 형상을 어둠 속에 고립시키고, 날개에 들어온 색의 밝기를 한층 강하게 끌어올린다. 검은색이 사라질수록 나비가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깊은 어둠이 남아 있기 때문에 연두와 청록, 분홍의 색들이 더 강한 광채를 얻는다.
색과 어둠의 관계는 날개 내부에서도 반복된다.
짙은 선들은 날개를 여러 개의 작은 색면으로 나눈다. 청록 옆에 분홍이 붙고, 연두와 파랑 사이로 붉은색이 끼어든다. 서로 다른 색이 완전히 섞이지 않은 채 인접하면서 하나의 날개를 만든다. 스테인드글라스의 유리 조각과 납선 구조를 떠올리게 하는 구성이다.
김현정 작가가 프라하에서 경험한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은 이후 나비 날개의 구조와 직접 연결됐다. 색유리를 나누는 창살과 조각난 색채가 나비 날개의 패턴으로 이어졌고,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투명한 빛의 기억은 나비를 ‘빛의 형상’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날으는 빛 4’에서는 그 기억이 더욱 압축돼 있다. 프라하의 건축 공간도, 창도 사라졌다. 남은 것은 어둠과 빛, 그리고 색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나비다.
나비의 형태도 완전한 좌우 대칭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상단의 날개는 오른쪽 위로 길게 뻗고, 아래쪽 날개는 둥글게 펼쳐지며 몸통 주변으로 모인다. 왼쪽에서는 가느다란 더듬이가 검은 공간을 향해 뻗는다. 몸은 한쪽으로 기울어 있고 날개의 무게도 오른쪽에 집중돼 있어 정지한 표본보다 이동 중인 순간에 가깝다.
제목의 ‘날으는 빛’은 이 형상과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날아가는 것은 나비지만 작품 안에서는 나비와 빛의 경계가 이미 희미하다. 빛이 나비의 몸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색을 가진 빛이 날개의 일부가 되고, 날개가 다시 빛을 담는 구조로 바뀐다. 나비는 광원을 향해 이동하는 존재에서 점차 광학적 현상과 결합된 존재로 옮겨간다.
이 변화에는 제작 방식이 깊게 작용했다.
‘날으는 빛’ 연작은 촬영 대상을 먼저 실제 공간에 구성한 뒤 사진으로 기록하는 ‘Constructed photography’ 방식으로 제작됐다. 페인팅과 콜라주, LED 설치, 투명 재료 등을 입체적으로 배치하고, 빛이 플렉시글라스를 통과하면서 만들어내는 반사와 산란을 촬영했다. 최종 이미지는 피그먼트 프린트로 남지만 그 이전에는 실제 빛과 물질이 만나는 과정이 존재한다.
‘날으는 빛 4’의 색은 물감만으로 만들어진 색과 다른 성격을 갖는다.
물감은 여러 색을 섞을수록 명도가 낮아지는 감산혼합의 성질을 갖지만 빛은 빨강·초록·파랑의 광원이 겹칠수록 밝아지는 가산혼합의 원리를 따른다. 김 작가는 ‘날으는 빛’ 연작에서 RGB 광원을 이용해 안료에서 얻기 어려웠던 투명하고 선명한 색의 중첩을 실험했다.
‘날으는 빛 4’의 연두와 청록, 분홍과 파랑이 한곳에서 번쩍이는 듯 느껴지는 배경에도 이런 광학적 조건이 놓여 있다. 색은 표면 위에 칠해져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투과와 반사의 과정을 거치며 생성된다.
검은 선도 색을 단순히 분리하는 윤곽선으로 끝나지 않는다. 밝은 색 사이로 깊은 어둠을 끼워 넣으면서 날개 내부에 리듬을 만든다. 색채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대신 밝음과 어둠이 교차하고, 하나의 날개 안에서도 여러 층의 깊이가 생긴다.
이 구조는 나비의 생물학적 특징과도 묘하게 겹친다. 실제 나비의 날개 역시 한 가지 색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미세한 인편의 구조와 빛의 각도에 따라 색이 달라지고, 보는 위치에 따라 광택이 변한다. 김 작가가 이후 자개를 사용해 간섭색과 광택을 탐구하게 되는 흐름도 이런 관심과 이어진다.
2009년의 ‘날으는 빛’에서는 아직 최종 결과가 실제로 발광하지 않는다. 광원을 사용해 촬영했지만 관람자가 마주하는 것은 피그먼트 프린트다. 실제 빛의 시간과 변화는 촬영 순간에 포착된 뒤 하나의 이미지로 정지한다.
이 점은 이후 작업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도 됐다. 김 작가는 LED 광원으로 얻은 투명성과 선명함이 피그먼트 프린트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다시 색료의 성질에 묶이는 한계를 경험했고, 이후 자개와 금박, 펄 같은 반사 재료와 마티에르를 거쳐 실제 LED를 작품 구조 안에 직접 넣는 방식으로 나아갔다.
‘날으는 빛 4’는 바로 그 중간에 놓인다.
2005년 ‘프라하의 창’에서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을 장지와 분채로 옮겼다. 2006년 ‘첫 만남’에서는 나비라는 생명체가 등장했다. 2009년 ‘날으는 빛 4’에서는 두 흐름이 하나가 된다. 프라하에서 시작된 빛의 기억과 나비라는 형상이 투명 재료와 광원의 실험 속에서 직접 결합한다.
나비를 둘러싼 검은 공간도 이후 김현정 작가가 반복해서 다루게 되는 ‘어둠과 빛’의 관계를 앞당겨 드러낸다. 어둠은 빛이 없는 공백이 아니라 색의 밝기를 끌어내는 조건으로 남는다. 짙은 바탕에서 연두와 청록, 분홍의 날개가 솟아오르면서 빛은 어둠과 떨어진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어둠을 통과하며 나타나는 색으로 다가온다.
‘날으는 빛 7’이 여러 나비와 색층을 겹쳐 하나의 투명한 공간을 만들었다면, ‘날으는 빛 4’는 훨씬 응축돼 있다. 배경을 검게 비우고 한 마리의 나비를 남겨 색과 광원의 관계를 집중시킨다. 복잡한 공간보다 하나의 형상이 강하게 앞으로 나온다.
그만큼 ‘빛의 나비’라는 표현도 직관적으로 읽힌다.
나비 위에 빛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빛이 색이 되고, 색이 날개가 되며, 날개 전체가 하나의 빛나는 형상으로 다시 구성된다.
2009년 ‘날으는 빛 4’에서 김현정 작가의 나비는 자연의 몸을 조금씩 벗기 시작했다. 꽃에 내려앉았던 나비의 자리에 어둠을 가르며 떠오르는 색의 파편이 들어왔고, 그 파편 사이로 실제 광원의 흔적이 스며들었다. 이후 ‘제로’, ‘무한’, ‘인터스텔라’로 이어질 빛의 물성과 내면의 밝음은 이 시기부터 나비의 몸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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