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동물의 윤곽을 뒤엉킨 선으로 해체한 1987년 색채 리놀륨 판화…관찰과 재현을 넘어 추상·상징의 조형언어로 넘어간 결정적 전환

[KtN 박준식기자]검은 선이 사방으로 뻗는다. 수평과 수직, 사선이 방향을 잃은 채 겹치고, 짙은 선의 덩어리가 작품 가장자리를 에워싼다. 안쪽에는 사람과 동물을 떠올리게 하는 형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황토색에 가까운 가느다란 선과 물감 자국은 검은 선을 가로질러 위아래로 흘러내린다.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Yuristanbek Shygaev)의 1987년작 ‘지진(The Earthquake)’에서는 앞선 판화에서 분명하게 유지됐던 사람과 풍경의 윤곽이 크게 흔들린다.

쉬가예프의 초기 작업을 따라가면 변화의 폭이 더욱 선명하다. ‘아산바이 아타’에서는 노인의 얼굴과 주름을 집요하게 관찰했고, ‘해가 진다’에서는 아이와 동물을 넓은 자연 안에 배치했다. ‘비둘기를 든 소녀’에서는 현실적인 공간을 느슨하게 풀어 사람과 동물의 관계를 앞세웠다. ‘지진’에 이르면 변화는 형상을 배치하는 수준을 넘어선다. 대상을 알아보게 만들던 윤곽 자체가 해체되기 시작한다.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Yuristanbek Shygaev), ‘지진(The Earthquake)’, 1987, 색채 리놀륨 판화, 40×50㎝, 키르기스 국립미술관(KNMFA) 소장.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Yuristanbek Shygaev), ‘지진(The Earthquake)’, 1987, 색채 리놀륨 판화, 40×50㎝, 키르기스 국립미술관(KNMFA) 소장.

작품을 처음 마주하면 하나의 중심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인물이나 건축물, 산과 같은 대상이 시선을 붙잡지 않는다. 검은 선이 작품 전체를 거의 같은 강도로 점유한다. 무엇을 먼저 볼 것인지 정해주는 안정적인 구도도 약해졌다.

가장자리에는 특히 선이 밀집돼 있다. 왼쪽과 오른쪽, 위와 아래에서 짧고 거친 검은 선이 여러 방향으로 교차한다. 작품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밝은 부분이 조금씩 늘어나지만 그 안에도 수많은 선이 지나간다. 바깥의 어둠과 안쪽의 밝음이 대비되면서 중앙에 불안정한 공간이 열린다.

‘지진’이라는 제목은 이 선의 움직임을 읽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쉬가예프는 흔들리는 건물이나 갈라진 땅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지진이 일어난 장소를 기록하는 대신 안정된 공간이 무너지는 감각을 선의 충돌로 옮겼다.

선은 더 이상 사물의 경계를 설명하는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아산바이 아타’에서 선은 이마의 주름과 눈가, 수염과 귀를 따라 움직였다. 대상의 형태가 먼저 있었고 선은 형태를 구체화했다. ‘지진’에서는 관계가 뒤집힌다. 선이 먼저 움직이고 형상이 그 사이에서 간신히 남는다.

왼쪽 위에서는 동물의 머리를 연상시키는 형상이 떠오른다. 눈과 주둥이, 귀처럼 읽히는 부분이 있지만 몸 전체가 명확하게 이어지지는 않는다. 주변의 검은 선이 형상 안팎을 가로지르면서 동물과 배경의 경계를 지운다.

오른쪽 위에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형상이 남아 있다. 눈과 코, 얼굴 윤곽의 일부를 알아볼 수 있지만 검은 선과 얼룩이 얼굴을 통과한다. 중앙과 아래쪽에서도 신체나 사물의 파편처럼 읽히는 흔적이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진다.

무엇이 사람이고 무엇이 동물인지 명확하게 분리하기 어려운 상태가 작품 전체에 이어진다.

형상을 완전히 지우지는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순수한 추상으로 밀고 나가기보다 알아볼 수 있는 대상의 흔적을 남긴 채 그 형태를 무너뜨렸다. 관람자는 선의 덩어리 속에서 얼굴과 동물을 발견하지만 다시 선을 따라가다 보면 형상을 놓치게 된다.

보이는 것과 사라지는 것이 반복된다.

이전 작품에서 쉬가예프가 사용했던 큰 색면도 크게 달라졌다. ‘디레다우의 거리 I’에서는 붉은 하늘과 노란 벽, 흰 천막이 공간을 분명하게 나눴다. 색은 현실에서 자유로워졌지만 각각의 영역은 비교적 또렷했다.

‘지진’에서는 색면의 경계마저 불안정하다. 바탕의 밝은 색 위로 검은 선이 겹치고, 황토색 선과 자국이 그 위를 다시 지나간다. 색이 공간을 나누기보다 서로 다른 흔적이 한 표면에서 충돌한다.

황토색 선은 검은 선과 성격이 다르다. 검은 선이 짧고 빠르게 여러 방향으로 긁힌다면 황토색은 비교적 길게 이어진다.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부분도 있고 느슨한 곡선을 그리며 작품을 횡단하는 부분도 있다.

일부 황토색 자국은 끝부분에 물방울처럼 둥근 흔적을 남긴다. 정교하게 통제된 선이라기보다 흘리고 떨어뜨린 듯한 효과가 강하다. 판화의 날카로운 검은 선과 유동적인 황토색 흔적이 겹치면서 서로 다른 속도의 움직임이 한 작품에 들어온다.

검은 선은 공간을 잘게 부수고 황토색 선은 부서진 공간을 다시 가로지른다.

작품의 표면 전체가 움직이는 듯한 인상은 여기에서 생긴다. 땅이 흔들리는 순간을 원근법이나 움직이는 인물로 설명하지 않고 선 자체를 안정시키지 않았다. 수직선도 곧게 서 있지 못하고 수평선 역시 공간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사선은 서로 부딪치고 끊긴다.

쉬가예프가 현실을 바라보는 방식에도 큰 변화가 나타난다.

1983년 ‘림마’에서는 한 여성의 얼굴과 손, 직물과 찻주전자까지 세밀하게 바라봤다. 현실을 많이 남기는 방식이었다. 1984년 ‘해가 진다’에서는 풍경의 정보를 줄이고 넓은 색면과 여백을 사용했다. 1986년 ‘비둘기를 든 소녀’에서는 사람과 동물을 현실적인 공간의 인과관계에서 조금씩 풀어냈다.

1987년 ‘지진’에서는 현실을 구성하던 기본적인 형태가 흔들린다.

쉬가예프의 작업에서 이 무렵 나타나는 변화는 이후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사실적인 관찰을 통해 현실과 오래 대화했던 작가는 점차 재현만으로는 담기 어려운 감각과 경험을 다른 방식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사물을 따라가던 선은 독립적인 움직임을 얻고, 형상은 완전한 모습보다 파편으로 남는다.

‘지진’은 변화가 매우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이다.

제목이 자연재해를 가리킨다고 해서 작품이 지진 현장의 기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무너진 집의 수나 피해 상황, 특정 장소의 모습은 중심에 없다. 쉬가예프가 붙잡은 것은 안정된 세계가 순간적으로 질서를 잃을 때 나타나는 시각적 감각에 가깝다.

사람과 동물의 형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작품에 또 다른 긴장을 만든다. 모든 형태가 완전히 사라졌다면 선의 운동만 남았을 것이다. 쉬가예프는 그 직전에서 멈춘다. 얼굴이 보이고 동물이 나타나지만 어느 것도 온전히 유지되지 않는다.

현실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더 이상 안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지점은 쉬가예프의 이후 작업과도 연결된다. 후기 작품에서는 현실의 인물과 동물이 그대로 재현되기보다 신화와 원형, 기억을 품은 형상으로 변한다. 전통 문양과 전사, 신화적 동물, 세계산과 생명나무를 떠올리게 하는 기호들이 작품 안에서 독자적인 관계를 만든다.

‘지진’에는 아직 그런 기호 체계가 완성돼 있지 않다. 오히려 기존의 형상이 무너지는 과정에 가깝다. 구체적인 현실에서 신화적 형상으로 곧장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해체와 실험의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쉬가예프의 변화가 사실주의에서 추상, 다시 신화로 이어지는 단순한 단계라고 보기도 어렵다. 후기에도 구체적인 인간과 동물의 흔적은 남고, 추상적인 작품에서도 현실과 연결된 형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서로 다른 조형체계가 한 작품 안에서 계속 부딪친다.

‘지진’은 바로 그 충돌이 전면으로 나온 작업이다.

구상과 추상이 작품 안에서 서로 밀어낸다. 동물의 머리가 모습을 드러내면 검은 선이 그것을 덮고, 얼굴의 윤곽이 나타나면 다시 사선이 가로지른다. 밝은 공간이 열리면 어두운 해칭이 침범한다. 하나의 방식이 작품 전체를 장악하지 못한다.

이 불안정성은 제목과 맞물리면서 더욱 강해진다.

지진은 고정돼 있다고 믿었던 땅의 안정성을 무너뜨린다. 쉬가예프의 판화에서는 형상을 지탱하던 조형적 바닥이 흔들린다. 윤곽은 끊어지고 원근은 사라지며 선의 방향도 하나로 모이지 않는다. 작품을 바라보는 눈 역시 안정된 위치를 확보하기 어렵다.

관람자의 시선은 계속 움직인다. 왼쪽 위의 동물 형상을 따라가다가 검은 선에 막히고, 중앙의 밝은 공간으로 들어갔다가 황토색 선을 따라 아래로 떨어진다. 오른쪽의 얼굴을 찾으면 다시 촘촘한 해칭이 시선을 바깥으로 밀어낸다.

‘해가 진다’에서는 비탈이라는 하나의 긴 사선이 작품을 정리했다. ‘비둘기를 든 소녀’에서는 소녀의 수직축과 말의 수평축이 복잡한 형상들을 묶었다. ‘디레다우의 거리 I’에서는 붉은 하늘과 노란 건물이 넓은 색면으로 공간을 나눴다.

‘지진’에는 그런 안정적인 축이 없다.

질서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쉬가예프는 무질서를 그대로 옮기지 않았다. 가장자리의 짙은 선과 중앙의 상대적으로 밝은 부분, 검은색과 황토색의 차이, 구체적인 형상과 추상적인 흔적의 반복을 통해 치밀하게 긴장을 조절한다.

혼란을 그리기 위해 새로운 질서를 만든 셈이다.

검은 선이 작품 전체를 뒤덮고 있지만 중앙을 완전히 닫지는 않는다. 밝은 부분이 곳곳에 남으면서 형상이 나타날 공간을 확보한다. 황토색 선 역시 무작위로만 움직이지 않고 위와 아래, 좌우를 길게 연결한다. 파괴된 듯한 표면 아래에 구성의 균형이 남아 있다.

쉬가예프의 판화에서 선이 얼마나 멀리 이동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초기 초상에서 선은 사람의 생김새와 세월을 기록했다. 풍경에서는 산과 땅의 경계를 만들었다. ‘지진’에서 선은 더 이상 대상에 종속되지 않는다. 선 자체가 충돌하고 흔들리며 작품의 내용을 만든다.

형상보다 선이 먼저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변화는 이후 쉬가예프가 신화적 세계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전환이 된다. 현실의 외관에 묶여 있는 한 신화와 원형은 구체적인 삽화에 머물기 쉽다. 형상을 해체하고 다시 결합할 수 있게 되면서 사람과 동물, 자연과 기호는 현실의 물리적인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후기 쉬가예프의 신화적 형상은 그래서 단순한 전통 도상의 복원이 아니다. 오래된 이미지와 현대적인 선, 추상적인 색면과 구체적인 형상이 동시에 존재한다.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는 경계도 약해진다.

1987년 ‘지진’에서는 그 경계가 무너지는 과정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동물은 아직 동물이고 얼굴은 여전히 얼굴이다. 그러나 완전한 형태로 머물 수 없다. 수많은 선이 몸을 통과하고 검은 얼룩이 윤곽을 침범한다. 현실에서 가져온 형상은 해체되고 다시 나타난다.

작품 제목을 단순한 사건명보다 넓게 읽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진’에서 흔들리는 것은 땅만이 아니다. 쉬가예프가 앞선 작업에서 구축했던 재현의 방식도 함께 흔들린다.

1983년 ‘림마’의 촘촘한 관찰에서 출발해 ‘아산바이 아타’의 얼굴, ‘해가 진다’의 넓은 여백, ‘비둘기를 든 소녀’의 비현실적인 배치, ‘디레다우의 거리 I’의 강렬한 색면을 지나온 변화가 ‘지진’에서 급격하게 압축된다.

사람을 그리는 선과 공간을 만드는 선의 구분이 사라진다. 배경과 형상이 섞이고, 색과 선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한다. 현실의 형태를 유지하려는 힘과 그것을 무너뜨리려는 힘이 동시에 작동한다.

쉬가예프는 이후 다시 사람과 동물을 그린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현실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형상은 신화와 기억을 받아들이고, 전통적 기호와 현대적인 조형언어가 한 작품 안에서 겹친다. ‘지진’에서 경험한 해체는 새로운 형상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을 열었다.

그래서 1987년의 ‘지진’은 쉬가예프의 긴 작업 가운데 중요한 변곡점으로 읽힌다. 현실을 충실하게 바라보던 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현실의 외형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영역까지 들어가기 시작했다.

작품에는 여전히 얼굴이 있고 동물이 있다. 다만 더 이상 하나의 안정된 세계에 머물지 않는다.

검은 선이 모든 방향으로 흔들리고 황토색 흔적이 그 위를 가로지른다. 형상은 나타났다 사라지고 다시 선 속으로 들어간다. 쉬가예프는 지진을 묘사하는 대신 작품 자체를 흔들었다.

‘지진’에서 무너진 것은 하나의 풍경이 아니라 재현을 지탱하던 질서다. 그 붕괴를 통과한 뒤 쉬가예프의 사람과 동물은 현실의 외형을 넘어 신화와 원형, 기억의 형상으로 이동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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