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시설의 아이들을 마주한 뒤 제작한 1988년 ‘Shelter’ 연작…색을 걷어낸 흑백 판화에서 고통과 고립을 인체의 뒤틀림으로 압축

[KtN 박준식기자]입을 크게 벌린 인물이 고개를 뒤로 젖힌다. 눈은 가늘게 닫히고 이마와 뺨, 턱을 가르는 날카로운 선이 얼굴을 파고든다. 얼굴과 목 뒤로 검은색이 넓게 번지며, 아래에는 몸을 웅크린 아이들의 팔과 다리, 옷자락이 복잡하게 포개진다.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Yuristanbek Shygaev)의 1988년작 ‘절규(The Shout)’는 한 사람의 고통을 표정으로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색을 걷어낸 검은색과 흰색, 위로 치솟는 얼굴과 아래로 접히는 몸을 충돌시키며 고통과 고립을 판화의 구조 자체로 끌어들인다.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Yuristanbek Shygaev), ‘절규(The Shout)’, 1988, ‘Shelter’ 연작, 종이에 리놀륨 판화, 75×57.5㎝, 키르기스 국립미술관(KNMFA) 소장.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Yuristanbek Shygaev), ‘절규(The Shout)’, 1988, ‘Shelter’ 연작, 종이에 리놀륨 판화, 75×57.5㎝, 키르기스 국립미술관(KNMFA) 소장.

‘절규’가 포함된 ‘Shelter’ 연작은 쉬가예프가 아픈 아이들이 생활하는 폐쇄적인 보호시설을 방문한 경험과 연결돼 있다. 산과 마을, 가족과 거리의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관찰했던 초기 작업의 시선이 고통과 외로움이 놓인 현실로 이동한 시기다. 색채 리놀륨 판화에서 강한 색의 대비를 밀고 나갔던 쉬가예프는 ‘Shelter’에서는 흑백으로 돌아섰다. 색이 사라진 자리에 검은 면과 흰 여백, 날카로운 선이 남았고, 사람의 몸은 이전보다 훨씬 거칠게 분절됐다.

작품 상단을 차지한 얼굴은 관람자를 바라보지 않는다. 고개는 뒤로 꺾이고 입은 크게 열린 채 위쪽을 향한다. 눈과 코, 광대와 턱의 형태를 따라 부드럽게 명암을 쌓기보다 검은 면과 흰 선을 강하게 맞붙였다. 입 안쪽은 깊은 검정으로 닫혀 있고 치아와 입술 주변의 밝은 부분이 날카롭게 갈린다. 소리를 담을 수 없는 판화에서 입의 형태를 극단적으로 벌려 청각적인 감각을 시각적인 긴장으로 바꾼 구성이다.

얼굴을 다루는 방식은 1984년 ‘아산바이 아타’와 뚜렷하게 달라졌다. ‘아산바이 아타’에서는 노인의 이마와 눈가, 광대와 수염을 수많은 선으로 따라가며 한 사람에게 축적된 시간을 기록했다. ‘절규’에서는 개별적인 생김새보다 몸이 처한 상태가 먼저 들어온다. 이마와 관자놀이, 광대와 턱을 가르는 선은 피부의 질감을 충실하게 옮기는 데 머물지 않고 얼굴 자체를 흔든다. 목에 둘러진 천에서도 흰색과 검은색이 삼각형처럼 꺾이며 충돌하고, 어깨와 몸통은 넓은 검은색 안으로 들어간다. 신체와 배경의 경계까지 일부 무너지면서 검은색은 인물 뒤에 놓인 배경이 아니라 인물을 압박하는 공간이 된다.

작품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열린 입과 다른 형태의 고통이 나타난다. 몸을 깊이 접은 아이와 주변의 신체가 겹치면서 어느 팔과 다리가 어느 몸에 이어지는지 한눈에 분리하기 어렵다. 얼굴보다 접힌 무릎과 팔, 몸의 굴곡이 먼저 들어오고, 옷의 주름과 신체의 윤곽도 검은 면 사이에서 뒤섞인다. 위쪽에서는 입이 열리고 몸이 위로 솟지만 아래쪽에서는 신체가 안으로 접히며 바닥 가까이 내려앉는다. 밖으로 터져 나가는 움직임과 안으로 움츠러드는 움직임을 한 작품에 함께 놓으면서 ‘절규’라는 제목은 소리치는 한 사람에게서 아래쪽의 신체들까지 넓어진다.

쉬가예프는 고통을 눈물이나 과장된 표정 하나로 전달하지 않는다. 작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검은색이 더 직접적인 역할을 한다. 왼쪽과 오른쪽, 인물의 몸과 뒤편 공간이 검은 면으로 연결되고 흰 부분은 그 사이에서 날카롭게 끊긴다. 오른쪽에는 넓은 검은 공간이 남아 있지만 절규를 받아줄 대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고개를 젖힌 인물의 열린 입이 향하는 곳에는 몇 개의 흰 형상만 떠 있을 뿐이다. 사람이 소리를 내고 있지만 그 소리가 도달할 구체적인 상대를 두지 않은 구성이 고립감을 더한다.

흑백의 선택은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색채 판화와도 큰 차이를 만든다. ‘해가 진다’에서는 푸른 비탈과 옅은 하늘이 아이와 동물 사이의 거리를 만들었고, ‘비둘기를 든 소녀’에서는 짙은 청색의 말과 밝은 인물이 현실적인 색채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에티오피아의 거리 풍경에서는 붉은 하늘과 노란 벽이 실제 공간을 강렬한 색면의 질서로 바꿨다. ‘절규’에서는 색채가 담당했던 역할까지 검은 면과 선이 가져간다. 얼굴과 몸을 어디까지 밝힐 것인지, 어느 부분을 검은색 속에 묻을 것인지가 작품의 긴장을 결정한다.

한 해 앞선 1987년 ‘지진’에서 시작된 변화도 ‘절규’에서 새로운 방향을 얻는다. ‘지진’에서는 검은 선이 사람과 동물의 윤곽을 가로지르며 안정된 형태를 무너뜨렸다. 구체적인 형상은 선 사이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졌고, 현실의 대상과 추상적인 흔적이 한 판에서 충돌했다. ‘절규’에서는 사람이 다시 분명한 모습으로 돌아오지만 이전의 인체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얼굴과 팔, 다리를 알아볼 수 있으면서도 검은 면이 신체를 잘라내고 선은 윤곽 안에 머물지 않는다. ‘지진’에서 형상을 뒤흔들었던 조형적 실험이 다시 인간의 몸으로 들어온 셈이다.

‘Shelter’ 연작에서 쉬가예프가 현실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의 무게가 더 커졌다. 보호시설에서 마주한 아이들의 고통과 외로움을 기록화처럼 재현하는 대신 몸이 견디는 압박을 판화의 언어로 바꿨다. 얼굴의 닮음을 정교하게 묘사하는 일보다 고개가 얼마나 뒤로 젖혀졌는지, 입이 얼마나 크게 열렸는지, 아래쪽의 몸이 얼마나 깊게 접혔는지가 중요해졌다. 현실을 정확하게 옮기는 방식에서 현실이 남긴 감각을 형상으로 압축하는 방식으로 이동한 것이다.

‘절규’가 감상적인 연민에 기대지 않는 점도 주목된다. 아이의 개인적인 사연을 앞세우거나 관람자의 동정을 직접 요구하는 요소보다 신체의 자세와 검은 면의 압력이 작품을 끌고 간다. 고통받는 사람을 설명하는 대신 고통이 몸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준다. 위쪽의 인물은 입을 열고 아래쪽의 신체는 접힌다. 같은 공간 안에서 절규와 침묵이 서로 다른 몸의 상태로 놓인다.

쉬가예프의 1980년대 작업을 이어서 보면 ‘절규’의 위치는 더욱 또렷해진다. 1983년 ‘림마’에서는 한 여성의 얼굴과 손, 직물과 찻주전자까지 생활공간을 세밀하게 바라봤다. ‘아산바이 아타’에서는 노인의 얼굴 가까이 들어가 주름과 수염에 축적된 시간을 새겼고, ‘해가 진다’에서는 풍경의 정보를 크게 줄이면서 아이와 동물을 넓은 여백 속에 놓았다. ‘비둘기를 든 소녀’에서는 사람과 동물이 현실적인 거리에서 조금씩 풀려났고, ‘지진’에서는 형상을 지탱하던 윤곽까지 흔들렸다. ‘절규’에는 앞선 탐색이 인간의 몸을 중심으로 다시 모인다.

후기 쉬가예프의 작업에서 인간과 동물은 신화와 원형, 오래된 기억을 품은 형상으로 확장된다. 여성과 신화적 동물이 마주하고 전통적인 문양과 기호가 현대적인 선과 색 안에서 다시 배열된다. 그러나 ‘절규’를 후기 신화적 작업으로 가는 중간 단계로만 놓으면 작품이 가진 현실의 무게를 놓치게 된다. 1988년 쉬가예프가 마주한 것은 신화 속 인간이 아니라 고통을 겪는 현실의 인간이었다. 추상적 조형실험을 거친 뒤에도 사람을 지우지 않았고, 오히려 해체된 선과 강한 흑백 대비를 현실의 신체에 다시 적용했다.

초기부터 이어진 사람에 대한 관찰은 여기에서 가장 어두운 영역 가운데 하나에 도달한다. 산과 집, 가족과 노인, 아이와 동물, 에티오피아의 거리까지 현실에서 출발했던 시선은 보호시설의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관찰한 대상을 그대로 복제하지 않고 선과 색, 형상의 관계로 바꾸어 온 시간이 ‘절규’에서는 색마저 덜어낸 흑백의 인체로 압축된다.

고개를 젖힌 얼굴 아래로 몸이 검은색 속에 잠기고, 아래쪽에서는 또 다른 신체가 깊게 접힌다. 열린 입에서 시작된 긴장은 목과 어깨를 지나 작품 아래까지 이어진다. 검은색은 배경에 머물지 않고 사람과 공간을 함께 삼키며, 흰색은 그 안에서 간신히 남은 얼굴과 팔, 다리를 끌어낸다.

1987년 ‘지진’에서 쉬가예프는 현실의 형상을 지탱하던 질서를 흔들었다. 1988년 ‘절규’에서는 흔들린 선을 다시 인간의 몸에 새겼다. 색을 모두 걷어낸 검은 판 위에서 남은 것은 열린 입과 접힌 몸, 그리고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어둠이다. 쉬가예프가 이후 신화와 원형의 세계로 더 깊이 들어가기 전, ‘절규’는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던 1980년대 작업의 가장 강한 축 가운데 하나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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