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박준식기자] 대한민국의 입법 주권이 관세 협상의 무기로 전락하고 있다. 2025년 7월,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한국 정부가 추진 중인 온라인플랫폼 독점규제법(이하 '온플법')을 문제 삼아, 양국 간 관세 재협상 국면에서 노골적인 압박을 가했다. 이어 미국 연방하원은 한국 공정거래위원회에 “온플법이 미국 기업에 미치는 영향을 직접 설명하라”는 서한까지 발송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 이래 수차례 반복돼 온 미국의 '규범 외교'가 또다시 자국 기업의 이해를 대변하는 수단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 정부가 추진 중인 온플법은 구글, 애플, 메타, 네이버, 카카오 등 시장지배력을 가진 대형 플랫폼 사업자를 대상으로 사전 지정하고, 이들의 독점적 지위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규제를 담고 있다. 국내 개발자들과 중소상공인, 소비자 단체들은 30%에 달하는 인앱결제 수수료, 검색결과 노출 조작, 입점사업자 차별 등 플랫폼 독과점 구조에 대해 수년간 문제를 제기해왔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 온플법 제정을 내세웠고, 국회에도 복수의 유사 법안이 발의되어 있는 상태다.
미국 정부의 대응은 전례 없는 수준으로 전개되고 있다. 무역대표부는 “온플법이 미국 기업만을 겨냥한 차별적 입법”이라며 한국에 공식적인 우려를 전달했고, 미국 의회는 “법 제정 시 통상 보복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시사했다. 이에 대해 국내 시민사회단체는 “한국 내 법률이 미국 빅테크의 이해관계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외국 정부가 입법 절차에 간섭하는 것은 명백한 주권 침해”라고 반발하고 있다.
미국 측은 구글·애플 등 자국 기업이 온플법에 의해 부당하게 규제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법안의 적용 대상은 명확히 ‘국적’이 아닌 ‘시장지배력’과 ‘플랫폼 규모’로 정의돼 있다. 실제로 입법 초안에는 카카오, 네이버와 같은 국내 기업도 포함돼 있으며, 지정 기준은 연 매출 5,000억원 이상, 이용자 수 일정 규모 이상 등 구체적 수치로 제시되어 있다. 중국계 플랫폼이 현 시점에서 대상이 아닌 이유는 시장 점유율이 미미하기 때문이며, 테무나 알리가 쿠팡 수준의 점유율을 확보할 경우 적용 대상에 포함되는 구조다. 결국 미국 정부의 주장은 법률적 근거가 아닌 정치적 주장에 가깝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문제는 미국 정부가 과거에도 유사한 방식으로 한국의 주권적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해왔다는 점이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압박, 2012년 FTA 이행법을 통한 지적재산권 법제 개정 압박, 2021년 인앱결제 강제금지법 통과 당시의 USTR 개입 등이 대표적이다. 당시에도 미국은 "한국의 법제화가 미국 기업에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외교적 채널을 동원했고, 국내 논의는 늘 ‘통상 보복’이라는 그림자 속에서 위축되곤 했다.
이재명 정부는 공정한 플랫폼 시장을 조성하겠다는 명확한 정책 방향을 제시해왔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부터 공정경제 실현을 위한 디지털 주권 강화, 중소상공인 보호, 공정경쟁 기반 마련은 핵심 개혁과제로 꼽혀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정부가 온플법 처리에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시민단체들은 “대통령 공약이 무역 협상 테이블에서 후순위로 밀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결국 ‘통상마찰 회피’와 ‘공정경제 실현’이라는 두 개의 축 사이에서 한국 정부가 어떤 전략적 균형점을 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유럽연합은 이미 디지털시장법(DMA)을 통해 구글, 메타, 아마존 등 미국 기업을 강력히 규제하고 있으며, 일본은 투명한 알고리즘 공개와 입점사업자 보호를 중심으로 플랫폼 투명화 법제를 시행하고 있다. 미국은 자국 내에서조차 반독점 패키지 법안을 발의 중이며, 일부 주에서는 인앱결제 강제 금지 조치가 이미 시행되고 있다.
한국은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외교적 유연성을 확보하되, 법적 주권을 훼손당하지 않는 독립성과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플랫폼 규제는 단순한 기술 산업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권익과 시장의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핵심적 제도이다. 한국이 ‘미국산 규제 불가침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온플법의 정당성을 국제 사회와 국내 여론에 지속적으로 설득하고, 법 제정의 목적과 기준을 명확히 하는 투명한 입법 과정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온플법을 둘러싼 이번 외교 논란은 단순한 법안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사회가 디지털 경제 질서를 누구를 위해 설계할 것인지, 그리고 대한민국이 자국민의 이익을 위해 독자적인 규범 체계를 수립할 수 있는 주권 국가인가에 대한 근본적 물음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입법의 테이블 위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원칙과 주권의 원칙을 지키려는 정부의 결단 속에서 내려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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