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지운 패션의 윤리와 미학, 글렌 마튼스가 되살린 마르탱 마르지엘라의 정신
[KtN 박채빈기자]메종 마르지엘라의 2025 홀리데이 캠페인은 단순한 시즌성 이미지가 아니다. 브랜드가 오랫동안 탐구해온 ‘익명성의 미학’을 오늘의 언어로 재해석한 실험이자, 패션이 지닌 존재 이유를 되묻는 선언이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글렌 마튼스는 사진가 프랭크 레본과 협업해 얼굴을 가린 모델, 실크 마스크, 금속성 콘페티, 인공 조명을 활용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모델의 얼굴이 지워진 화면에는 옷의 질감과 형태만 남는다. 인간의 표정이 사라진 자리에서 의복이 새로운 서사를 만든다.
창립자 마르탱 마르지엘라는 1989년 데뷔 당시부터 얼굴을 가린 모델을 무대에 올렸다. 스타 모델 중심의 패션쇼에 맞선 실험이었다. “패션은 인간을 장식하는 수단이 아니라 옷의 본질을 드러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인터뷰를 거부하고 자신의 얼굴을 공개하지 않았던 창립자의 태도는 브랜드의 정체성이 되었다. 라벨에 이름 대신 숫자를 새긴 이유도 동일한 맥락이었다. 숫자는 제품의 군을 구분하는 동시에 익명성을 상징했다. 글렌 마튼스는 이 철학을 시대적 감각에 맞게 새롭게 번역했다.
글렌 마튼스는 익명성을 단순한 ‘가림’으로 다루지 않았다. 얼굴 없는 모델은 존재를 감춘 인물이 아니라 옷의 일부로 존재하는 인물이다. 각 모델은 표정 대신 몸의 구조로 감정을 표현하고, 원단의 흐름으로 리듬을 만든다. 얼굴이 사라지자 재봉의 선과 소재의 결이 전면으로 떠올랐다. 메종 마르지엘라의 옷은 인간을 장식하는 물건이 아니라 조형 예술로 기능한다. 실크와 금속, 울과 가죽이 만들어내는 표면의 긴장이 감정의 언어를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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