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과잉의 시대에 글렌 마튼스가 제시한 익명성과 절제의 미학, 그리고 패션이 예술로 남을 수 있는 조건
[KtN 박채빈기자]메종 마르지엘라의 2025 홀리데이 캠페인은 단순한 패션 광고가 아니라 시대를 향한 질문이다. 디지털 이미지가 정체성을 결정하고, 얼굴이 곧 브랜드가 된 현실 속에서 글렌 마튼스는 ‘익명’이라는 언어로 패션의 본질을 다시 정의했다. 얼굴을 지우고, 감정을 숨기고, 빛과 질감만으로 장면을 구성한 캠페인은 과잉된 노출의 시대가 잃어버린 미학을 복원한다.
프랭크 레본이 촬영한 이번 캠페인은 얼굴이 사라진 세계를 정교하게 구현한다. 모델은 실크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카메라는 천의 표면과 조명의 반사광에만 집중한다. 인물의 표정은 배제되고, 남는 것은 의복의 구조와 빛의 흐름뿐이다. 패션은 인물의 개성을 입히는 장치가 아니라, 구조와 시간의 기록으로 남는다. 마튼스는 옷이 스스로 말하도록 만들었다.
메종 마르지엘라는 원래부터 ‘보이지 않는 디자이너’의 철학을 중심에 두어왔다. 창립자 마르틴 마르지엘라는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집단적 창작과 익명성의 미학을 브랜드의 정체성으로 세웠다. 글렌 마튼스는 이 철학을 21세기 디지털 환경에 맞게 다시 구성했다. 브랜드는 이름이 아니라 개념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신념을 중심에 두고, 사람보다 작품이 중심이 되는 구조를 선택했다.
익명성은 단순한 미학이 아니라 시대의 은유다. 디지털 플랫폼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얼굴을 노출하고, 이미지의 형태로 소비된다. 정체성은 스스로의 의지보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 규정된다. 메종 마르지엘라는 이 현실을 거부하지 않는다. 대신 그 불편한 구조를 시각적으로 재현해 관객이 스스로의 존재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익명으로 표현된 모델은 현대 사회의 초상이다.
캠페인 이미지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소음이 사라진 장면의 정적이다. 금속성 조명 아래에서 천이 반사되는 소리 없는 움직임이 감각의 중심을 차지한다. 마튼스는 이 침묵을 통해 패션이 얼마나 많은 말을 할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 단 하나의 표정 없이도 시각적 긴장은 충분히 전달된다. 장면의 힘은 화려한 장식이 아니라 절제에서 나온다.
패션 산업의 언어가 빠르게 소비되는 시대에 메종 마르지엘라의 접근은 이례적이다. 대부분의 브랜드는 노출과 속도를 경쟁력으로 삼는다. 그러나 메종 마르지엘라는 그 반대편에 서 있다. 브랜드는 침묵과 여백을 선택했다. 빠르게 스크롤되는 이미지 속에서 멈춰 서게 만드는 힘, 바로 그것이 메종 마르지엘라의 전략이다. 소비자는 단순히 옷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시간을 경험한다.
글렌 마튼스는 캠페인을 통해 패션이 예술로 기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예술은 때로 감정의 과잉이 아니라 절제에서 태어난다. 메종 마르지엘라의 장면은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 부재가 감각을 자극한다. 얼굴을 가린 모델이 전달하는 무표정의 긴장은 시청자의 상상력을 불러내고, 그 상상은 브랜드의 세계관을 확장한다.
디지털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에 익명성은 역설적으로 강한 존재감을 남긴다. 사람의 이름보다 브랜드의 개념이, 개성보다 철학이 중심이 되는 방식은 시장의 일반적인 마케팅 전략과 다르다. 마튼스는 노출을 통해 판매하지 않고, 생각하게 만들어 구매로 이어지는 구조를 만든다. 패션은 소비의 결과가 아니라 사유의 과정이 된다.
메종 마르지엘라의 방식은 상업적 성공과 예술적 실험을 동시에 유지한다. 익명성의 미학은 신비로움을 만들어내고, 신비로움은 브랜드의 프리미엄 가치를 강화한다. 소비자는 완성된 이미지를 구매하는 대신 의미를 해석하는 경험을 얻는다. 브랜드는 상품을 팔지 않고, 개념을 제안한다. 이 과정이 메종 마르지엘라를 예술적 럭셔리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글렌 마튼스가 설계한 이번 캠페인은 디지털 시대의 패션이 어떤 언어로 말해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 사례로 평가된다. 과거의 패션은 표현의 영역이었지만, 오늘날의 패션은 침묵의 언어로 대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메종 마르지엘라가 증명했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는 오히려 정보의 부재가 메시지가 된다. 브랜드는 그 공백 속에서 의미를 만든다.
패션은 결국 언어의 문제다. 색과 재단, 소재와 형태는 문장처럼 조합되고, 런웨이와 캠페인은 문단처럼 연결된다. 메종 마르지엘라는 문장을 줄이고, 쉼표를 늘렸다. 글렌 마튼스가 만든 장면은 미완성의 문장처럼 열려 있다. 소비자는 그 여백을 해석하며 자신만의 문장을 완성한다. 브랜드는 완결을 강요하지 않고, 사유의 기회를 제공한다.
2025 홀리데이 캠페인은 메종 마르지엘라가 패션을 넘어 철학적 브랜드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준다. 익명성의 언어, 절제의 감정, 여백의 긴장감은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사유의 도구다. 디지털 시대의 패션이 인간의 얼굴을 얼마나 노출하든, 진정한 럭셔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태어난다.
글렌 마튼스는 얼굴을 지운 장면에서 인간의 본질을 보여주었다. 패션은 여전히 존재의 방식이며, 메종 마르지엘라는 그 존재를 가장 고요한 언어로 기록했다.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도 의미는 여전히 남는다. 절제된 한 장면이 과잉된 세상을 압도할 수 있다는 사실, 메종 마르지엘라의 캠페인은 그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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