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과 산성, 포구와 신도시가 겹쳐 빚은 김포의 진짜 얼굴
[KtN 임우경기자]김포를 떠올리면 공항 활주로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서울과 인천 사이를 오가며 차량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으로만 기억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지도에서 보면 한강 하구 아래로 기다랗게 내려오는 모양새가 눈에 들어오지만, 대개 시선은 그 옆의 거대한 도시들로 이동한다. 그러나 역사의 시간을 포개어 놓고 김포를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도시가 모습을 드러난다. 경계의 변두리로 여겨지던 땅이 왕릉과 산성, 포구와 관아가 겹쳐진 중심부로 바뀐다. 질문 하나가 필요하다. 김포를 아시나요라는 질문이다.
김포를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는 색이다. 퍼스널 컬러가 한 사람의 신체와 분위기에 어울리는 색을 찾아내는 개념이라면, 로컬 컬러는 한 지역의 지형과 역사, 경제와 생활양식이 오랜 시간 만들어낸 고유의 색을 말한다. 김포는 한강 하구의 물길과 서해로 이어지는 바닷길, 강화와 한양을 잇는 전략 축, 평야와 완만한 구릉이 공존하는 땅이라는 조건을 가진 공간이다. 여기에 조선 왕릉과 조선 후기 수도 방어망, 근대 이후 공항과 신도시 개발이 차례로 겹치면서 독특한 도시 색채가 형성되었다. 김포의 로컬 컬러는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수백 년간 축적된 구조에 가깝다.
오늘 대한민국에는 약 226개 기초자치단체가 존재한다. 표기상 시와 군이라는 두 이름만 남아 있지만, 조선과 고려 시기에는 330개 이상, 고려 전성기에는 500개 안팎의 고을이 전국을 채웠다. 고을 수가 줄어든 과정은 단순한 명칭 정리 작업이 아니었다. 중앙집권의 강화, 행정 효율성을 명분으로 한 통합과 격하, 식민 지배 시기의 의도적인 지명 삭제가 한꺼번에 얽힌 정치의 역사였다. 김포는 이 변화 과정을 압축해 보여주는 사례다. 한 도시에 네 개 고을이 공존하던 구조에서 시작해, 왕릉 조성과 산성 축조로 위계를 높였다가, 일제 강점기 통폐합으로 갑자기 다섯 배 크기의 군이 되었다가, 다시 잘려 나가며 오늘의 도깨비방망이 모양으로 남았다.
김포 현재 행정구역 안에는 과거 김포현, 통진현, 수안현, 동성현이라는 네 고을이 자리했다. 각각 장릉이 있는 산줄기, 문수산, 수완산, 태산에 기대어 읍치를 두고 지역을 다스렸다. 한국 전통 고을 입지의 기본 공식은 간단하다. 산 하나를 주산으로 삼고, 그 아래 평지에 관아와 향교, 객사를 둔 뒤, 주변 농경지와 하천을 생활권으로 편입한다는 공식이다. 김포 영역의 네 고을은 이 공식을 따르면서도 역할을 분담했다. 한 고을은 왕릉의 입지와 연결되었고, 한 고을은 강화 방어의 전초 기지 구실을 했으며, 다른 고을은 내륙 평야를 배후로 두고 농업 기반을 다졌다. 오늘 김포 시민이 사용하는 생활권과 도로망은 이런 고을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다.
고려 시기 김포 일대 고을들은 부평에 속한 속현이었고,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는 제한적이었다. 감무 파견을 통해 일부 고을이 자치권과 위상을 키웠고, 결국 통진은 수안과 동성 영역을 흡수하며 세 배 규모로 커진 고을이 되었다.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고을의 격을 나누는 기준이 명확해졌다. 대도호부, 목, 도호부, 군, 현이라는 위계 체계 속에서 인구 규모와 세수, 군사적 중요도, 왕실과의 연관성 등이 종합적으로 판단 기준이 됐다. 김포는 여기서 중요한 분기점을 맞는다.
1630년대 김포는 군으로 승격되었다. 인조가 왕이 된 뒤 살아서 왕이 되지 못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장릉을 조성했고, 왕릉 조성은 고을의 위계를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왕릉은 단순한 묘역이 아니라 정치적 상징과 조세, 제례, 인력 배치가 집중되는 국가 시설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통진은 더 뒤늦게 격을 올렸다. 병자호란과 강화도 함락이라는 충격 이후 수도 방어 전략이 다시 짜이면서 문수산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다. 문수산성은 단순한 산성이 아니라 강화와 한양을 동시에 조망하고 방어할 수 있는 왕실 보장처로 재인식되었다. 숙종 대에 강화 일대에 돈대와 방어선을 촘촘히 배치하는 과정에서 문수산성의 전략적 가치는 극대화되었고, 통진은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산 하나의 의미가 고을의 격을 바꾸고, 고을의 격 변화가 지역의 운명을 바꾼 셈이다.
근대 전환기에는 다른 종류의 칼날이 지도를 가르기 시작했다. 갑오개혁 이후 전통 군현 체계가 해체되었고, 대한제국 시기 잠시 새로운 구획이 도입되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강제 병합 이후 1914년 조선총독부가 단행한 행정구역 통폐합은 전국 330여 개 고을을 약 220개 수준으로 줄였다. 동학 농민 운동이 시작된 고부와 무장처럼 식민 지배에 불편한 기억을 남긴 지명은 면 단위로 격하되거나 지도에서 사라졌다. 김포는 이 과정에서 반대로 몸집을 키운 쪽에 속했다. 통진을 흡수한 것은 물론, 오늘 강서와 양천 일대에 해당하는 양천 지역 일부까지 품으며 원래 김포의 다섯 배에 이르는 김포군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에 세워진 공항은 김포 정체성의 또 다른 층위를 보여준다. 1930년대 한강 이남 김포군 양서면에 군사적 목적을 가진 비행장이 조성되었고, 이후 김포공항이라는 이름이 자리 잡았다. 해방 이후 행정구역 변경으로 공항 주변이 서울 강서구 공항동에 편입되었지만, 이름은 바뀌지 않았다. 지명과 행정 경계가 어긋난 대표적인 사례다. 많은 시민이 김포라는 이름을 공항에서 먼저 접하지만, 발을 딛는 땅은 엄밀히 말해 서울이다. 김포의 존재감과 실체 사이에 낀 간극이 여기에 있다.
해방 이후 김포 행정구역은 몇 차례 더 크게 요동쳤다. 계양 지역과 부천 오정구 일부가 한동안 김포에 포함되었다가 다시 떨어져 나갔고, 1995년에는 검단이 인천으로 편입되었다. 동시에 강화는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넘어갔다. 김포는 이 과정에서 접경도시라는 정체성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지도 모양은 도깨비방망이처럼 길게 휘어진 형태가 되었고, 북쪽 끝 애기봉과 남쪽 한강 신도시 사이의 거리는 단일 도시 안의 거리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길어졌다. 행정 경계는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김포 평야에서 살아온 농경의 기억과 포구를 드나들던 선박의 기억, 군사적 긴장을 견뎌온 접경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명은 도시의 기억을 저장하는 그릇이다. 김포에는 사라진 고을 이름이 여러 방식으로 살아 있다. 분진은 통진으로 이름을 바꾸며 역사 속으로 들어갔지만, 통진 옛 읍치 주변에는 오늘도 분진중학교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양천은 서울 강서와 양천, 경기도 김포, 인천 계양이라는 여러 행정단위에 나누어 실려 있다. 김포라는 이름 역시 검포, 금포, 금릉 등 다양한 표기와 별칭을 거치며 오늘에 이르렀다. 왕릉과 산성, 서원과 서당, 학교와 버스정류장 이름에 박힌 언어들은 사라진 고을 구조를 현재로 끌어올리는 장치이다.
반대로, 새로 생긴 신도시와 학교 이름은 지역 정체성과 부딪치는 지점이 되기도 한다. 운양동 일대는 과거 운양이라는 한자 지명에서 비롯된 동네지만, 새로 생긴 학교 이름은 구름빛과 하늘빛으로 바뀌었다. 과거 국토정중앙면, 김삿갓면, 한반도면처럼 특정 이미지를 강조하는 지명이 전국에서 유행한 사례를 떠올리면, 김포 역시 도시 경쟁력과 부동산 이미지를 고려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이런 이름이 가진 감각적 효과가 과거 수백 년간 축적된 고을의 기억을 얼마나 충분히 반영하는지에 대해서는 질문이 남는다. 김포의 역사라는 토양 위에 신도시와 K컬처가 함께 자라기 위해서는 브랜드가 아닌 정체성의 언어가 필요하다.
김포의 로컬 컬러는 눈에 보이는 유적 몇 곳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장릉과 문수산성, 덕포진과 옛 관아, 김포향교 같은 유산은 고을 구조의 골격을 보여주는 핵이다. 여기에 양곡의 독립운동 기억과 접경 마을의 냉전 경험, 한강 건너 서울을 바라보던 농민의 일상과 군인 가족의 생활사가 겹쳐져 있다. 운양나룻길과 옛 포구는 물길과 함께 이동하던 사람과 물자의 흔적을 품고 있고, 문배주 같은 전통주는 생활문화의 결을 드러낸다. 역사와 생활이 함께 만든 로컬 컬러는 그대로 K컬처의 소재가 된다. 한 도시의 기억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작업만으로도 드라마와 다큐멘터리, 예능과 게임의 무대가 만들어진다.
김포에서는 이미 디지털 아카이브를 통해 다양한 기록이 축적되고 있다. 오래된 문서와 사진, 행정 자료뿐 아니라 구술 인터뷰와 생활사 기록이 함께 모인다. 종이에만 머물던 기록이 화면 속에서 검색되고, 시민이 언제든 접근할 수 있는 구조로 바뀌는 과정은 단순한 편의 개선이 아니다. 말과 기억을 데이터로 바꾸는 작업이 곧 지역의 미래 자산을 쌓는 일이기 때문이다. 로컬 컬러가 모호한 감성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보와 이야기로 축적될 때, 김포는 자신만의 서사를 가진 도시로 세계 앞에 설 수 있다.
김포는 여전히 경계에 서 있다. 북으로는 군사분계선과 맞닿은 접경이고, 남으로는 서울과 인천을 잇는 생활권의 일부이며, 서쪽으로는 강화와 서해로 나아가는 관문이다. 경계는 언제나 부담과 기회가 함께 존재하는 자리다. 방어와 감시의 전선이 되는 동시에 교류와 이동이 가장 활발한 길목이 되기도 한다. 김포가 미래를 향해 선택해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경계를 한쪽의 그림자로 두는 대신 연결의 교차점으로 활용하는 전략이다. 왕릉과 산성, 포구와 신도시, 농경과 항공, 접경과 평화라는 상반된 이미지들을 서로 충돌시키지 않고 한 도시의 이야기로 엮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김포역사문화연구소에서 누적해온 연구와 해설은 그런 작업의 출발점이다. 고을과 산, 행정제도와 지명을 함께 읽는 방식은 김포에만 적용되는 방법이 아니다. 조민재 소장은 강의에서 김포를 한 번 제대로 이해하면 어느 고을을 가든 구조가 눈에 들어온다는 설명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김포를 사례로 삼아 행정 변천과 지명 변화를 읽는 연습을 하면, 누구나 자기 고향의 지도를 새로 그릴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김포는 지역을 넘어선 교육의 장이 된다.
김포를 아는 일은 특정 도시를 홍보하는 작업에 그치지 않는다. 한 도시의 시간을 깊게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한국 전체의 공간 구조를 다시 이해하는 연습이 된다. 김포를 제대로 아는 시민과 방문객이 늘어날수록, 김포의 로컬 컬러는 더 나은 K컬처의 토양이 된다. 한강신도시 카페 거리만 기억하는 여행과 문수산성, 장릉, 덕포진, 옛 포구를 함께 걷는 여행 사이에는 도시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가 존재한다.
김포를 아시나요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하기 위해서는 활주로와 아파트 숲 너머에 있는 고을의 기억까지 함께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김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가능성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 손에서 김포의 미래가 다시 쓰일 것이다. 로컬 컬러와 역사, 문화와 K컬처가 만나는 지점에 김포가 서 있다. 이제 선택이 남았다. 김포를 그냥 지나치는 도시로 남길지, 한국 현대사를 새로 읽어낼 수 있는 고급 인사이트의 현장으로 키울지에 대한 선택이다. 김포를 아시나요라는 질문은 결국 한국 도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후원=NH농협 302-1678-6497-21 위대한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