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새에서 문인 인장까지, 한 수집가가 대학에 건넨 기록 철학
[KtN 박준식기자]충남 서산 한서대학교 서산캠퍼스 연암도서관 5층 인장 전시실. 진열장마다 다양한 재질의 인장이 정연하게 놓여 있고, 설명 패널 옆에는 이재인 한국문인인장박물관장이자 경기대학교 명예교수의 이름이 반복해서 눈에 들어온다. 개막식을 마친 뒤 관람객이 줄어들자 이재인 명예교수는 전시장 중앙에 한동안 서 있었다. 대한제국 국새 병풍과 문인 인장이 나란히 놓인 구역 앞에서 이재인 명예교수는 “평생 품고 있던 짐을 오늘 내려놓았다”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인장을 모으는 일에 인생 대부분을 사용한 사람이 대학 박물관에 1천4백 점이 넘는 소장품을 넘기기까지, 어떤 생각과 판단이 쌓였는지 물었다.
Q 인장과의 첫 만남을 구체적으로 들려달라
이재인 명예교수
“문학소년이던 시절, 헌책방에서 어렵게 구한 김소월 시집 한 권이 출발점이었습니다. 시집 맨 뒤에 김소월 이름이 새겨진 낙관이 붉은 인주로 찍혀 있었는데, 활자로 읽던 시인의 이름이 갑자기 손에 잡히는 존재로 다가왔습니다. 텍스트 속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숨 쉬던 사람이 바로 앞에 선 것 같았습니다. 그때부터 인장을 단순한 도장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삶이 응축된 표식이라고 느꼈습니다.”
이재인 명예교수는 국문학을 전공하고 문학계와 교육계에서 활동하는 동안 인장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강의와 집필, 행정 업무 사이에도 시간만 나면 인장을 찾아다녔다. 문인을 만나면 작품 이야기를 듣는 동시에 인장 이야기를 물었다. 인장 수집은 어느 순간 취미를 넘어 기록 행위가 됐다.
Q 문인 인장 수집에 특히 집중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재인 명예교수
“문학사는 작품으로 기록됩니다. 그러나 작품을 쓴 사람의 실존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다뤄졌습니다. 문인은 글을 남기지만, 이름을 어떻게 남길지 선택하는 순간에도 세계관이 드러납니다. 네모난 인장 속 서체, 획의 굵기, 재료의 선택이 모두 문인의 정체성을 증언합니다. 그래서 문인 인장은 또 하나의 작품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서정주, 김동리 같은 문인의 인장을 직접 손으로 만지며 정리하는 동안, 활자만으로는 보이지 않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재인 명예교수는 문인 인장이 학술적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자료라고 강조했다.
이재인 명예교수
“특정 인장이 어떤 연대에 제작됐는지, 어느 책에 찍혔는지, 누구에게 건네졌는지 살피면 문학사에서 비어 있던 부분이 채워집니다. 초판본 추정, 교유 관계, 작품 집필 시기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인장은 문학 텍스트 바깥에서 문학을 입증하는 사료라고 볼 수 있습니다.”
Q 흥선대원군 인장과 국새 이야기가 여러 번 언급됐는데, 직접 설명을 듣고 싶다
이재인 명예교수
“스승인 소설가 오영수 선생을 통해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인장을 전해 받았습니다. 조선 말 정치사와 문화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의 손때가 그대로 남은 인장이었습니다. 또 한 점은 추사 김정희 가문과 연결된 도장입니다. 추사 후손이 어린 손자를 구하기 위해 검찰에 제출했다는 일화가 함께 전해지는 유물이었습니다. 여기에 6·25 전쟁 시기에 이불보 속에 섞여 피난길에 올랐던 대한민국 국새까지 집안으로 들어오면서, 인장이 단순한 수집품이 아니라 역사의 무게 그 자체라는 사실을 체감했습니다.”
이재인 명예교수는 자신이 자라던 시기의 집안 형편도 숨기지 않았다. 논 일곱 마지기를 겨우 일구던 농가 출신이었고, 설이 지나면 곡식이 떨어지던 시절이었다.
이재인 명예교수
“집안에서는 머슴살이를 준비하던 아이였습니다. 마을에 있는 판사 집에 데려다 보내려고 결정까지 끝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국새가 집안으로 들어오면서 삶의 방향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대학 진학을 할 수 있었고, 교사가 되었고, 중앙행정 부처에서 근무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인장이 한 집안의 운명을 바꾼 셈입니다. 그래서 인장을 단순한 물건이라고 보지 못합니다. 인장과 함께 흘러온 이야기들도 함께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개인이 이렇게 무거운 유물을 오래 보관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이재인 명예교수
“문화재 보관은 물리적 보관을 넘어선 일입니다. 온도와 습도, 보안, 진위 검증, 전문적인 복원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젊을 때에는 직접 발로 뛰며 상태를 확인하고 관리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한계가 느껴졌습니다. 유물이 지닌 역사적 무게에 비해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역량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공공 기관으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을 오래 품고 있었습니다.”
이재인 명예교수는 기증이라는 표현보다 헌정이라는 단어를 더 자주 사용했다.
이재인 명예교수
“문인 인장 상당수는 문인 본인이나 유족이 신뢰를 전제로 건네준 것입니다. 대를 이어 소장하라는 의미라기보다 잘 보존해달라는 요청에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그런 신뢰를 사회에 돌려주기 위해서는 개인 서재가 아니라 공공 박물관으로 옮겨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결정을 헌정이라고 부르고 싶었습니다.”
Q 한서대학교 박물관 선택에는 지역과 대학의 어떤 요소가 작용했나
이재인 명예교수
“예산, 광시, 서산, 해미 등 충남 지역은 개인적인 기억이 많이 쌓인 공간입니다. 교육자로서 시간을 보낸 지역이기도 합니다. 한서대학교는 문화재보존, 문학, 역사 관련 학과를 보유한 대학입니다. 인장을 단순 진열품으로 취급하지 않고, 교육 자료와 연구 대상으로 활용할 조건이 갖춰져 있다고 보았습니다. 지역 학생과 시민이 직접 찾아와 볼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도 중요했습니다. 수도권의 대형 기관으로 들어가면 접근성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재인 명예교수는 개막식에 참석한 지역 인사들을 언급하며 대학과 지역의 관계를 강조했다. 서산장학재단 이사장, 여러 문학관장, 박물관장이 함께 전시장을 찾은 사실은 인장이 특정 개인의 수집품이 아니라 지역 문화자산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신호로 읽힌다.
Q 위안부 피해자 인장 섹션은 특히 무거운 주제다. 기증자로서 어떤 원칙을 갖고 전시에 동의했는지 궁금하다
이재인 명예교수
“위안부 피해자 인장은 가장 조심스러운 유물에 속합니다. 삶 전체가 폭력과 침묵 속에 놓였던 분들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인장은 생존 이후 행정절차와 생업을 이어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용한 도구이기도 합니다. 이름과 도장을 전시 공간에 올려두는 행위는 곧 존재를 다시 공개하는 일입니다. 유족과 생존자의 동의, 인권 보호 원칙이 최우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재인 명예교수는 위안부 피해자 인장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재인 명예교수
“오랜 시간 피해자는 자신의 이름을 숨겨야만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국가 기록 체계에서도 주변부로 밀려났습니다. 인장은 뒤늦게 사회에 편입되기 위한 최소한의 문이었습니다. 지금 전시되고 있는 인장은 단지 유물이 아니라, 한 시대가 특정 집단의 삶을 어떻게 방치했는지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전시를 한다면 감정 자극용이 아니라 기록과 교육을 위한 장치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Q 인장이 K-콘텐츠나 미래 세대에게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는지
이재인 명예교수
“지금 세대는 디지털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랍니다. 서명도 화면에서 이루어지고, 거래도 화면에서 끝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기록이 주는 감각이 새로울 수 있습니다. 이름을 직접 새긴 도장을 손에 쥐어보면,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게 느껴질 것입니다. 인장은 과거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앞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상징입니다. 디자인, 게임, 웹툰 같은 콘텐츠 산업에서도 캐릭터나 세계관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재인 명예교수는 인장이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세계와 나누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재인 명예교수
“한글이라는 독자적인 문자를 가진 나라에서 인장은 단순 기능을 넘어 예술의 단계로 올라섰습니다. 한글 자모의 조형성과 전각 기술을 결합하면 세계 어디에 내놔도 독창적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전통을 단순한 장식으로 소비하지 않고, 역사에 대한 이해와 연구를 바탕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Q 마지막으로, 인장 수집을 마무리하는 지금 스스로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싶은지
이재인 명예교수
“돌 한 점에 한 사람의 우주가 들어간다고 늘 이야기해 왔습니다. 인장 한 개가 한 생애, 한 시대, 한 공동체의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그걸 알고도 모른 척 지나치기 어려웠습니다. 이제 손에서 놓았으니, 다음에는 연구자와 학생, 시민이 이 우주들을 차분히 들여다보는 시간이 오길 바랍니다. 인장이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동안의 고생은 충분히 보상받는 셈입니다.”
인터뷰가 끝난 뒤 이재인 명예교수는 다시 전시실 안을 천천히 걸었다. 문인 인장 진열대 앞에서 한 번, 위안부 피해자 인장 코너에서 한 번, 국새 병풍 앞에서 한 번 더 걸음을 멈췄다. 평생 손에 쥐고 다니던 작은 돌과 금속 조각이 이제 대학 박물관 유리장 안에서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인장을 따라 움직였던 한 개인의 삶은 여기서 멈추지만, 인장에 새겨진 이름과 시간은 한 세대 뒤, 또 다른 세대의 연구와 기억 속으로 옮겨갈 준비를 끝낸 상태다. 인장이 단순한 도장이 아니라 인생의 축도라는 이재인 명예교수의 말은 전시장을 나서는 순간에도 오래 남았다.
후원=NH농협 302-1678-6497-21 위대한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