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속 서명 시대에 왜 한서대학교는 인장을 꺼냈는가

인장이라는 작은 사물이 묻는 거대한 질문. 한국문인인장박물관장, 이재인 경기대 명예교수.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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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박준식기자]충남 서산시 해미면. 수도권과 거리를 둔 이 도시의 대학 캠퍼스 도서관 5층에서 예상 밖의 전시가 열렸다. 한서대학교 박물관이 2025년 11월 19일 문을 연 이재인 한국문인인장박물관 기증유물 특별전.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수백 개의 도장들이다. 관람객의 눈높이보다 낮은 진열 케이스 안에서 인장들은 제각각의 자세로 놓여 있다. 대리석처럼 매끈한 표면도 있고 투박한 나무나 금속으로 제작된 형태도 있다. 붉은 인주 자국이 스며든 흔적까지 남아 있다. 한때는 수많은 문서 위에 힘 있게 찍혀야 존재 목적이 완성된 도구였으나 지금은 그 목적을 잃고 박제처럼 놓인 인장들이 왜 다시 불려 나왔는지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한서대학교 함기선 총장은 개막식 환영사에서 인장은 시대의 정신과 권위를 상징한 문화유산이라고 밝혔다. 기계식 인증과 스마트폰 바이오 기술이 일상화된 시대에 인장이 전시장에 등장한 사실 자체가 문화적 선언이다. 기능 상실이 역사 속 퇴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지 인장은 쓰임새를 잃은 것이 아니라 역할을 바꾸는 중일 수 있다. 교육기관인 한서대학교가 인장을 통해 말하고자 한 메시지는 실용 도구에서 문화 기록 매체로의 변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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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유한철 관장은 인장이 동아시아의 독자적 문화 형식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서구 문명에서는 서명이 주류였지만 한국과 중국, 일본 사회에서는 인장이 오랫동안 법적 효력을 지닌 정체성 증명 방식이었다. 사회구조가 변하며 인장이 뒤안길로 밀려났지만 문화적 의미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유한철 관장은 문인 인장을 비롯한 유물 자료를 교육과 연구 토대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대학 박물관의 존재 이유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방향이다.

기증자인 이재인 명예교수가 전시에 부여한 의미는 더 오래된 시간과 닿아 있다. 이재인 명예교수는 기증사를 통해 인장은 인생의 축도이자 우주의 축도라고 설명했다. 낙관 하나를 찍는 행위에 창작자의 철학과 인간의 생애관이 응축된다는 의미다. 무게감 있는 표현이지만, 인장에 새겨진 한 글자는 실제로 한 인물의 정체를 가장 간결하게 설명해왔다. 이름은 곧 개인을 상징하고 인장은 그 상징이 남긴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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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다섯 개의 주제로 구성돼 있다. 인장의 기원에서는 문자 새김이 어떻게 등장했는지, 권력과 기록의 상호작용이 어떤 구조였는지 보여준다. 다음으로 왕실과 관인 인장은 조선 시대 국가 시스템 안에서 인장이 법적 권위를 부여하는 도구였음을 노출시킨다. 예술로서의 인장은 문인과 예술가들의 개성을 드러내고, 민간 인장은 일상 속에서 인장이 어떤 사회적 안전장치였는지 복원한다. 마지막 침묵의 흔적 코너에서는 위안부 피해자의 인장을 통해 이름이 증명수단이 아니라 억압수단으로 작용했던 역사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문인 인장 전시는 이번 기획의 중심축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 청록파 시인의 인장부터 서정주, 김동리, 이어령에 이르는 대표 문인들의 인장 600여 점이 수집돼 있는 점은 한서대학교 전시의 뚜렷한 차별성이다. 문학 작품 속 언어가 남긴 기록을 넘어, 문인의 서체와 낙관은 존재 자체를 증언하는 또 하나의 작품이다. 활자와 이미지가 만나는 지점에서 문학의 외연이 확장되고 있다.

인장이라는 작은 사물이 묻는 거대한 질문. 한국문인인장박물관장, 이재인 경기대 명예교수.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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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위안부 피해자 인장 전시는 감정을 자극하지 않는 방식으로 역사를 비판적으로 환기한다. 이름을 찍는 작은 행위가 폭력 체제에서는 강제 복종의 장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록이 사라지면 사람도 지워진다. 인장은 가장 간단한 증거였다. 박물관은 이 유물을 단순 진열물이 아니라 역사 증언자로 배치했다. 대학이 갖춰야 할 윤리적 감수성이 시험대에 오른 장면이기도 했다.

특별전 운영은 대학 박물관 재정과 지역사회 협력이라는 현실적 조건과도 연결된다. 한서대학교 박물관은 2019년 제1종 전문 박물관으로 등록됐지만 예산과 전문 인력 측면에서 대형 국공립 기관과 비교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확인되는 전략은 분명하다. 기증을 통해 콘텐츠를 확보하고, 전시 기획 역량과 지역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방식이다. 개막식에는 서산장학재단, 여러 문학관장, 박물관장이 참석해 축사를 전했고 지역 문화 생태계가 연결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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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보완 과제도 적지 않다. 대학 구성원 외 일반 관람객에게 접근성이 떨어지는 점, 체험형 콘텐츠와 디지털 큐레이션이 아직 미비한 점 등이 지적된다. 전시 관람 도중 관람객은 인장을 직접 찍어볼 수 없고, QR 기반의 확장 정보 서비스도 제공되지 않는다. 젊은 세대 입장에서 인장은 낯선 역사물이기 때문에 교육적 경험 설계가 강화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또한 기증품에 대한 학술적 기록과 데이터베이스 구축 작업이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인장은 재질과 제작 기법이 다양해 보존 처리가 전문성을 요구한다. 기증 기반 전시는 콘텐츠 확보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으나, 이것이 곧 문화유산 관리 역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학 박물관의 체계가 얼마나 성숙해질 수 있는지 여전히 질문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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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가 제기한 핵심 메시지는 분명하다. 정체성 증명 방식이 변화하고 있을 뿐, 이름을 남기고 기억을 새기는 행위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은 존재를 기록할 방식을 찾는다. 돌과 금속에 남긴 한 글자가 그대로 남아야만, 이름을 가진 사람의 자취 또한 지워지지 않는다. 한서대학교 박물관은 이 점을 전시를 통해 관람객에게 묻는다. 사라진 도구로만 여겨졌던 인장이 문화 기억을 복원하고 미래로 이어질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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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12월 31일까지 진행된다. 관람료는 무료이며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전시장 유리 케이스 안에서 말없이 자리를 지키는 인장들은 시대가 달라져도 사람이 남기고 싶어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조용히 증언한다. 도장이 왜 손에서 멀어졌는지 묻는 대신, 어떤 기억을 품고 돌아왔는지 질문을 던지는 전시다. 이 질문은 전시장 문을 나선 뒤에도 이어진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울 것인가. 기록의 방식은 달라져도 증명해야 할 삶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