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주변부에서 출발한 기록, 공공자산으로 이동하다

이재인 명예교수의 60년과 문화적 전환. 한국문인인장박물관.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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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박준식기자]한서대학교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인장 500여 점은 모두 하나의 이름과 연결되어 있다. 이재인 명예교수가 60년 가까이 수집해 온 결과물이다. 수많은 문학인과 예술인의 이름이 새겨진 인장은 오랜 세월 개인의 서재와 박물관을 거쳐 한서대학교 박물관의 공공 재산으로 이동했다. 인장은 사라진 도구가 아니라 누군가의 정체성과 시대의 기록을 품은 유물이라는 사실을 이재인 명예교수는 수집 활동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이재인 명예교수의 인장 수집은 어린 시절 헌책방에서 김소월 시집을 구입한 경험이 계기였다. 김소월의 이름이 인주로 찍힌 낙관은 문학 속 언어를 넘어 실재하는 작가의 존재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 것 같은 감각을 만들었다. 이름이 활자와 다른 방식으로 남겨지는 장면은 놀라움이었다. 그 순간부터 이재인 명예교수에게 인장은 단순한 인장이 아니라 작품 밖에서 작가를 증명하는 기록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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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인의 세계로 진입한 대학 시절 이후 수집은 더 체계적으로 확장됐다. 국문학을 전공하며 문단과 가까워지자 인장을 직접 확보할 기회가 생겼다. 정책기관과 대학에서 근무하며 문학인과 교류할 때마다 인장을 요청하거나 유족과 연결해 자료를 확보했다. 수집 대상은 점차 넓어졌다. 문인뿐 아니라 근현대사 주요 인물들의 인장, 조선 시대 관인, 개인의 민생과 관련된 생활 인장까지 포함됐다. 수집물이 늘어날수록 이재인 명예교수의 인장은 한 시대의 인물 지도를 구성해갔다.

수집이 집착에 가까운 문화활동이 된 결정적인 장면도 존재한다. 스승 오영수로부터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연관된 인장을 전달받은 시기였다. 조선 말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직접 사용한 인장은 단순한 수집품을 넘어 역사적 실체를 증명하는 물적 증거였다. 이재인 명예교수는 훗날 개막 행사 발언에서 추사 김정희 가문의 일화, 6.25 전쟁기의 혼란 속에서 국새가 피난길에 오르게 된 배경 등을 언급하며 인장이 어떻게 역사적 사건에 얽혀 있는지 설명했다. 수집 과정에서 확보된 이야기는 의도하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한국 근현대사의 공백을 메우는 자료가 됐다.

이재인 명예교수의 60년과 문화적 전환. 한국문인인장박물관.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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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적 관점에서 보면 이재인 명예교수의 수집은 중요하다. 문인의 인장은 작품 활동 끝에 찍는 마지막 낙관이자 창작자의 자기 서명이다.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 청록파 시인을 비롯해 서정주, 김동리, 이어령 같은 주요 문학인의 인장은 이미 문학사적 비교 연구가 가능할 수준으로 확보돼 있다. 글만 남은 문학보다 문인의 흔적까지 연구 대상으로 확대할 수 있다.

그러나 수집이 한 사람의 열정에 의해 좌우됐다는 사실은 한국 문화자원 관리 체계의 취약함도 드러낸다. 수집 방향은 문인 중심으로 편중됐고, 진위 감정과 출처 기록이 개인의 판단에 기댄 경우도 있다. 인장에 대한 체계적 분류와 재질 보존, 학술 연구는 기증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다. 한 문화 형식이 공공 기록으로 자리를 잡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여전히 누락된 상태에서 개인 수집에 의존해야만 유지될 수 있었다는 점은 구조적 한계다.

이재인 명예교수의 60년과 문화적 전환. 한국문인인장박물관.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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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박물관 운영 경험도 이러한 한계를 보여준다. 이재인 명예교수는 과거 충남 예산 등지에서 인장 전시 공간을 직접 운영했지만 예산과 전문 인력 확보에 어려움이 있었다. 인장 보존은 돌, 금속, 상아, 목재 등 재질별 기법이 다르기 때문에 전문 시설과 관리 체계가 필요하다. 결국 이재인 명예교수는 한서대학교 박물관에 소장품을 기증했고, 이를 통해 수집물은 공공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 기증을 헌정이라고 표현한 이유도 이러한 문화적 이전 과정에 대한 의미 부여였다.

한서대학교 박물관은 기증품을 기반으로 인장 전시를 구성하며 지역 문화기관으로서 역할을 강화하고 있다. 지역 문학관과 박물관 관계자가 개막식에 참여한 사실은 협력 기반 조성의 신호다. 인장이 가진 연구 가능성을 학계 연결로 확장하고, 교육 자료로 활용하기 위한 준비도 병행 중이다. 그러나 전시 해설 방식의 정보량은 충분하지 않다. 온라인 기록 지원, QR 기반 해설 확장, 디지털 전각 체험 등 현대 관람객이 기대하는 서비스 도입이 요구된다.

이재인 명예교수의 60년과 문화적 전환. 한국문인인장박물관.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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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해결의 핵심은 데이터베이스 구축이다. 인장에 담긴 정보를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으면 수집품은 단순 진열물에 머문다. 인장 표면의 서체 분석, 제작 시기 확인, 인물 사료 연결 등 연구가 진행될 때 문화사적 의미가 확정된다. 한서대학교가 가진 수집품은 충분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지만 새로운 학술 기반과 보존 투자가 함께 구성될 때 비로소 대중적 문화자산으로 발전할 수 있다.

결국 이재인 명예교수의 60년은 질문을 남긴다. 문화는 누가 기록하고, 누구에게 전달되는가. 수집자는 시대와 사회가 놓친 사소한 흔적을 발견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적 취향이라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인장을 기록과 연구의 주제로 전환하는 단계에서는 개인의 열정 위에 공공의 판단이 쌓여야 한다. 인장이 박물관에 들어온 지금이 진짜 출발점이다.

이재인 명예교수의 60년과 문화적 전환. 한국문인인장박물관.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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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대학교 박물관 전시장에서 놓인 인장들을 보면 누군가는 사라진 도구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인장은 이름과 권리, 정체성과 기억을 새겨왔다. 이재인 명예교수의 수집이 없었다면 많은 인장이 개인의 서랍에 갇힌 채 세대 교체 속에서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한 사람의 집요함이 문화적 손실을 지연시켰다.

문화는 수집한 순간 완성되지 않는다. 공공의 공간에 전시되고 사회적 합의 안에서 의미가 보존될 때 비로소 문화자산이 된다. 서산의 대학 전시장에 놓인 인장들은 이제 다른 질문을 건넨다. 기록의 보존은 누구의 몫인가. 문화적 노력이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로 확장될 때, 사소해 보였던 흔적이 역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