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파라자노프가 지켜낸 문화의 마지막 숨 결

석류의 빛깔 The Color of Pomegranates Սայեաթ-Նովայ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Sergei Parajanov. 사진=스틸 컷,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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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임우경기자]1969년 제작된 석류의 빛깔은 영화의 형식과 미학을 혁신한 걸작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 작품이 품은 무게는 미학적 혁신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 시대의 검열 아래에서 사라질 뻔한 한 문화의 숨결과 예술가의 정신이 이 작품 안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지금 한국 극장에서 일어난 현상은 이 영화가 다시 살아난 사건이며 동시에 기록의 복원이다.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감독은 소련 체제 속에서 아르메니아인의 정체성과 종교적 상징, 이방인의 시선을 예술적 질서로 세운 창작자였다. 현실의 통제를 거부한 언어와 형식을 구현한 결과는 수차례의 투옥과 강제 침묵이었다. 파라자노프 감독에게 예술은 생존의 수단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이었고, 바로 그 믿음이 석류의 빛깔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석류의 빛깔 The Color of Pomegranates Սայեաթ-Նովայ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Sergei Parajanov. 사진=스틸 컷,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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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의 역사는 침묵과 견딤의 역사다. 여러 제국의 지배 속에서 민족은 언어와 종교, 문화를 지켜내기 위해 기억과 예술을 방패로 삼았다. 석류는 그 방패의 형상을 가장 정확하게 담아내는 소재다. 실과 직물이 모두 찢어져도 씨앗이 남는 과일. 분열과 살육의 시간에도 생명을 품어내는 존재. 이 작품에서 붉은색은 민족의 역사와 시인의 사유를 함께 잇는 상징으로 자리잡는다.

사야트 노바의 생애는 파라자노프 감독의 삶과 거울처럼 겹친다. 궁정 시인으로 발탁되었지만 사랑 때문에 추방당하고 수도자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야트 노바의 궤적은, 창작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탄압과 감옥을 견딘 파라자노프 감독의 현실로 이어졌다. 예술가는 종종 자신의 삶을 직접 말할 수 없을 때 타인의 전기에 자신을 숨긴다. 석류의 빛깔은 역사 속 다른 예술가의 이야기이면서 파라자노프 감독의 자기 초상이다.

석류의 빛깔 The Color of Pomegranates Սայեաթ-Նովայ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Sergei Parajanov. 사진=스틸 컷,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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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 아래에서 예술은 종종 비유와 상징으로 갈아입는다. 이 작품의 영상 언어가 난해하게 보이는 이유는 설명을 허락하지 않은 시대의 폭력에 대한 대응이다. 직접 발언이 차단된 현실에서 파라자노프 감독은 상징을 선택했고, 그 상징은 금지된 진실을 숨기고 동시에 드러내는 장치로 작동했다. 예술은 때로 침묵 속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낸다.

석류의 빛깔이 오늘 한국에서 깊은 반향을 일으킨 것은 작품이 품은 정신과 지금의 관객 감수성이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적 다양성과 정체성에 대한 관심, 잃어버린 기록을 복원하는 작업에 대한 필요, 검열과 자유의 문제에 대한 감각은 현시대의 고민이기도 하다. 반세기 전 한 예술가가 스크린 위에 새겨둔 비밀스러운 언어는 지금 관객에게 직접 닿을 수 있는 언어로 변화했다.

한 시대의 정치가 예술가를 끊으려 할 때, 예술은 시간을 두고 되돌아온다. 석류의 빛깔이 한국 관객 앞에 다시 등장한 과정 자체가 이 사실을 입증한다. 삶의 억압과 권력의 검열은 작품의 가치를 훼손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 시간은 작품을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석류의 빛깔 The Color of Pomegranates Սայեաթ-Նովայ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Sergei Parajanov. 사진=스틸 컷,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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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서의 감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복원 과정이 된다. 과거의 시간 속에 갇혀 있던 이미지가 현대 관객의 시선에 닿을 때, 작품은 다시 태어난다. 그 순간 예술은 박물관 속 유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증언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관객은 그 증언을 받아들임으로써 역사적 진실의 일부를 복원한다.

석류의 빛깔은 예술이 지닌 가장 오래된 사명을 증명한다. 기록되지 않은 기억을 기록하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드러내는 일. 금지된 세계를 황홀한 아름다움으로 길어 올리는 일. 파라자노프 감독이 스크린 위에 건축한 세계는 억압을 뚫고 도달한 문화적 생존 그 자체다.

한국 관객은 이 작품을 통해 하나의 질문을 품게 된다. 예술이라는 언어가 언제 가장 강력한가. 그 답은 이미 스크린 위에서 제시되었다. 삶이 침묵을 강요할 때, 예술은 더욱 선명해진다.

반세기를 건너온 붉은 빛이 한국 극장 속 어둠을 가르고 있다. 사라졌어야 할 문화가 되살아나고, 침묵 속에 묶여 있던 예술가의 정신이 관객의 호흡 속에 다시 살아 숨쉰다.

지워지지 않으려는 힘이 한 알의 석류에 응축된 채, 지금 우리 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