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성일 극단 ‘까치놀’ 대표 "연극은 낭만이었고, 아직도 그렇다"
[KtN 임우경기자]광주 충장로와 금남로 한복판. 밤이 되면 고등학생들이 모였다. 풀을 쑤고 포스터를 나눠 들었다. 한 팀은 충장로 1가에서 내려오고, 다른 팀은 3가에서 올라왔다. 중간에서 만나면 포장마차 앞에 섰다. 잔술 한 잔으로 “고생했다”를 나눴다. 그 밤들이 모여 극단이 됐다.
극단 ‘까치놀’ 창단 멤버이자 2026년부터 대표를 맡는 심성일은 그 시간을 “연극의 낭만”으로 기억한다. 까치놀 창단 40주년 공연작 <꽃며느리> 무대에서 큰아들 역으로 선 심 대표는, 극단의 출발과 변천, 그리고 오늘의 관객 감각을 차분하게 짚었다.
“학교 축제용 동아리였는데, 15명이 5명이 됐어요”
심성일의 연극은 고등학교 시절 학교 축제에서 시작됐다. 연극부는 처음 15명으로 출발했지만 여름방학이 지나자 5명만 남았다. 남은 5명이 무대를 올렸고, 축제가 끝난 뒤 “정식으로 한번 해보자”는 말이 이어졌다.
그들은 곧바로 관공서에 단체 등록을 했다. “공연을 하려면 극단을 등록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구청에 가서 등록을 하고 공연장 등록도 했어요. 학생들이 정말 싸가지 없이 성인 흉내를 낸 거죠. 그런데 진심이었어요.” 심성일 대표는 웃으며 당시를 떠올렸다.
홍보 방식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다. SNS가 없던 시절, 포스터는 ‘직접 붙이는 것’이었다. “밤에 모여서 풀 써놓고 만화 보다가 나가는 거죠. 충장로, 금남로. 풀통 들고, 포스터 붙이고, 한 팀은 내려오고 한 팀은 올라가고, 중간에서 만나면 포장마차에서 잔술을 팔았어요. 그거 한 잔 먹고 ‘잘했다’ 하고 다시 붙이고. 그런 낭만이 있었죠.”
폭력 대신 ‘하고 싶은 마음’이 남긴 40년
심성일은 1980년대 중후반 연극 동아리 문화가 때로 폭력적 구조를 품었던 현실도 언급했다. 다만 까치놀은 그 흐름과 선을 그었다고 강조한다. “그 시대 동아리들에서 벌어졌던 폭력이나 그런 부분에서 저희는 깨끗해요. 다들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컸어요.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어서 모였기 때문에 여기까지 이어왔던 것 같아요.”
그 시간을 심 대표는 “전우애”로 요약했다. 다만 전우애의 방식은 변했다. “예전엔 연습 끝나면 같이 모여서 이야기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연습 끝나면 각자 자기 사람 만나러 가잖아요. 그게 좀 안타까워요.” 시대가 바뀌면서 공동체의 체온도 바뀌었다는 진단이다.
스태프에서 배우로, ‘꽃며느리’는 오래 함께한 작품
<꽃며느리>는 까치놀 40주년을 기념하는 세 번째 무대다. 심성일 대표에게 이 작품은 ‘역할이 바뀌며 다시 만난’ 시간의 기록이다. 초연 당시에는 스태프로, 두 번째 공연에서는 무대 세트와 조명을 맡았다. 이번에는 배우로 무대에 섰다. “이번 공연이 배우로는 처음이지만 <꽃며느리>는 오랫동안 함께했던 작품입니다.”
심 대표가 보는 <꽃며느리>의 힘은 ‘쉬운 호흡’에 있다. 섬에 사는 홀어머니와 세 아들 사이로 외지에서 온 젊은 여성이 들어오며 관계가 흔들리는 이야기. 낯설지 않은 정서가 짧고 단단하게 이어진다. “어느 순간 내 주변 어디에선가는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고, 매체로 한 번쯤은 접해봤던 이야기예요. 그래서 어렵지 않아요.”
심성일 대표는 관객의 감정 소비 방식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일상생활에서도 복잡하고 그런데, 잠깐 시간을 비워서 보러 왔는데 여기서까지 복잡하게 생각해야 하냐는 걸 요즘 사람들은 싫어하는 것 같아요. 관객이 ‘저 장면이 무슨 의미일까’를 억지로 깊게 파지 않아도 되는 작품이죠. 편하게 보고, 편하게 나가면 돼요.”
“정극은 어렵게 느끼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쪽으로 움직여요”
심성일은 최근 연극 흐름을 구조적으로 정리했다. 리얼리즘, 서사, 부조리극 같은 정극 중심의 흐름에서 뮤지컬, 로맨틱 코미디처럼 관객 친화적 장르로 이동이 뚜렷하다는 판단이다. “점점 더 사람들이 다가가기 쉬운 쪽으로 변화한 것 같아요. 요즘은 코믹함, 풍자, 재미가 중요해졌고, 시대의 트렌드와도 맞물려 있어요.”
변화는 연극이 관객과 관계 맺는 방식의 변화를 뜻한다. 심 대표는 연극이 공연장에서 소통과 소외가 동시에 발생하는 매개체라고 본다. 함께 웃고 숨을 맞추는 순간에도, 각자 삶의 감정을 떠올리며 혼자만의 장면을 만나는 일이 생긴다는 의미다. 복합성을 “복잡한 감정을 간결하게 표현하려는 노력”으로 설명했다.
배우로 돌아오게 한 작품, “검정고무신이 전환점이었어요”
심성일의 이력은 배우로만 이어지지 않았다. 무대조명, 세트, 스태프 경험이 길다. 그가 배우로 다시 돌아오게 한 결정적 계기는 <검정고무신>이었다. “무대 스텝이나 조명 쪽을 하다가, 나름대로 어느 정도 나르시즘에 빠져 있었던 때가 있었어요. 배우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했던 작품이 <검정고무신>입니다. 그 작품이 기억에 남아요.”
기술 스태프의 시간은 배우로서의 호흡에도 영향을 줬다. 무대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조명과 동선이 감정을 어떻게 밀어 올리는지 체감해온 사람의 연기에는 ‘현장 감각’이 묻어난다. 심 대표는 “연극 안에서 역할은 계속 바뀐다”고 말한다. 변화는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무대에 남는 일이기도 하다.
“외국 무대에서 우리 정서가 인정받는 건 뿌듯해요”
심성일은 한국 공연예술의 확장에 대한 자부심도 분명히 했다. “뮤지컬도 결국 연극이라는 장르에서 파생된 부분이잖아요. 외국에 나가서 외국 사람들한테 우리의 정서를 인정받은 거죠. 같은 한국인으로서, 같은 예술인으로서 뿌듯해요.”
까치놀의 40년이 개인의 경력으로만 남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역의 삶과 언어를 기반으로 축적한 시간은, 화려하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는 토대가 된다. 실제로 까치놀은 2025년 12월, 한국연극협회가 주최한 제63회 K-Theater Awards에서 공로상을 받으며 지역 기반 극단의 지속성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어디에 계시든, 행복했으면 합니다”
극단의 시간은 늘 ‘남아 있는 사람’만으로 기록되지 않는다. 떠난 사람들까지 포함해 완성된다. 심성일은 마지막으로 동료들을 향한 말을 남겼다. “40년 동안 많은 분들이 지나가고 거쳐갔어요. 어디에 계시든 어떤 일을 하시든 간에, 자기 자신이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 시간을 같이 할 수 있어서 좋았고, 함께한 시간이 소중했어요.”
이제 심성일은 배우로 무대에 서는 것에 더해, 극단의 다음 시간을 책임지는 위치에 선다. 그가 말한 ‘낭만’은 과거의 장식이 아니라, 공동체가 지속하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태도에 가깝다. 풀통과 포스터로 시작된 연극은 그렇게, 다음 10년을 향해 걸어간다.
후원=NH농협 302-1678-6497-21 위대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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