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급 대여작과 경매 출품작 한 공간에…홍콩 ‘PSYCHO’, 작품 감상·큐레이션·거래를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

[KtN 임민정기자]홍콩 LANDMARK CHATER의 소더비 메종(Sotheby’s Maison)에 나무 구조물이 들어섰다. 내부에는 수십 점의 드로잉이 빼곡하게 놓였고, 외부 벽면에는 요시토모 나라(Yoshitomo Nara)의 커다란 인물 이미지가 자리한다. 경매 출품작을 차례로 보여주는 프리뷰와는 출발부터 다르다. 작품의 가격과 추정가를 확인하기 전에 관객이 하나의 전시 안으로 들어가도록 공간부터 구성했다.

소더비가 오는 27일까지 선보이는 ‘PSYCHO: Identity Alienation Shadow Duality’는 정체성, 소외, 그림자, 이중성을 중심으로 마크 로스코(Mark Rothko), 요시토모 나라, 테츠야 이시다(Tetsuya Ishida), 야요이 쿠사마(Yayoi Kusama), 한스 벨머(Hans Bellmer), 이불(Lee Bul), 프랭크 아우어바흐(Frank Auerbach), 폴라 레고(Paula Rego) 등의 작업을 한데 묶었다. 미술관급 대여작과 소더비의 9월 현대·컨템퍼러리 미술 경매 출품작이 같은 전시 안에서 만난다.

경매사가 작품을 보여주는 방식도 달라졌다. 판매를 앞두고 실물을 확인하는 데 머물던 프리뷰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제목과 주제, 작품 간 관계, 관람 동선을 갖춘 기획전의 성격을 강화하고 있다. ‘PSYCHO’에서는 작품의 가격보다 정체성과 불안, 소외라는 공통된 맥락이 먼저 제시된다. 작가와 제작연도, 추정가로 작품을 구분하는 경매의 언어 앞에 큐레이션의 언어가 놓인 셈이다.

[전시트렌드①] 소더비, 경매 전에 ‘기획전’을 세웠다…미술시장의 달라진 전시법.  사진=Yoshitomo Nara and Mark Rothko / Sotheby’s Hong Kong,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전시트렌드①] 소더비, 경매 전에 ‘기획전’을 세웠다…미술시장의 달라진 전시법. 사진=Yoshitomo Nara and Mark Rothko / Sotheby’s Hong Kong,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요시토모 나라의 ‘The Crated Room in Iceland / Drawing Room’은 이런 변화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낸다. 15년 넘게 공개되지 않았던 작업으로 이번에 처음 경매에 나오며, 추정가는 4,500만~6,500만 홍콩달러다.

나라가 graf와 협업하던 시기에 제작한 설치에는 97점의 드로잉과 의자, CD 플레이어, 개인적인 물건, 대형 회화가 함께 들어간다. 나무 상자를 연상시키는 구조물 자체가 작품의 일부가 되면서 관람 방식도 달라진다. 한 점의 그림 앞에서 정면으로 멈추는 대신 구조물 주변을 움직이고 내부를 들여다보며 여러 이미지와 사물을 연속해서 접하게 된다.

경매 출품작을 경험시키는 방식에서도 변화가 읽힌다. ‘The Crated Room in Iceland / Drawing Room’은 한 점의 대표 이미지로 압축하기 어려운 작업이다. 드로잉과 사물, 가구, 공간 전체가 연결돼 있어 실제 설치 상태를 경험해야 작품의 성격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소더비는 작품을 판매하기에 앞서 설치 전체가 만드는 작가의 세계를 먼저 전시장 안에 펼쳤다.

나라의 작업 주변에는 로스코의 추상회화와 이시다의 인물화, 이불의 설치가 놓이고 문학 자료까지 들어온다. 브렛 이스턴 엘리스(Bret Easton Ellis)의 ‘American Psycho’ 초판과 로버트 버턴(Robert Burton)의 ‘The Anatomy of Melancholy’ 17세기 판본이 시각예술과 함께 배치되면서 정체성과 소외라는 주제는 회화나 설치의 범위를 넘어선다.

경매사가 작품 사이의 관계를 직접 설계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미술시장의 전통적인 경매에서는 작품 하나하나의 작가, 제작 시기, 출처와 추정가가 거래 판단의 주요 정보였다. 기획전에서는 서로 다른 작품을 어떤 순서와 맥락으로 보여줄지가 또 하나의 가치가 된다. 한 작가의 시장적 위치를 설명하는 것에서 나아가 여러 시대와 매체를 연결해 관객이 작품을 바라보는 방법까지 제안한다.

소더비 메종의 운영 방식도 이런 변화를 뒷받침한다. ‘PSYCHO’는 일회성 경매 프리뷰가 아니라 반기 단위의 큐레이티드 전시로 구성됐다. 경매 참여자가 아니더라도 공간을 찾고 작품을 관람할 수 있으며, 거래 대상인 작품과 판매되지 않는 대여작이 하나의 전시 서사 안에서 함께 움직인다.

경매사의 역할이 작품을 접수하고 평가해 판매하는 기능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다. 작품을 어떤 맥락에 놓을지 결정하고, 다른 작가의 작업과 관계를 만들고, 문학과 공간 연출까지 동원해 전시 전체의 해석 구조를 만든다.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익숙했던 큐레이션이 경매사의 공간 운영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고 있다.

[전시트렌드①] 소더비, 경매 전에 ‘기획전’을 세웠다…미술시장의 달라진 전시법.  사진=Yoshitomo Nara and Mark Rothko / Sotheby’s Hong Kong,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전시트렌드①] 소더비, 경매 전에 ‘기획전’을 세웠다…미술시장의 달라진 전시법. 사진=Yoshitomo Nara and Mark Rothko / Sotheby’s Hong Kong,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마크 로스코의 1964년작 ‘Untitled (Plum and Dark Brown)’은 전시와 거래가 맞물리는 구조를 압축해 보여준다. 높이 2m에 이르는 작품은 28일 열리는 현대·컨템퍼러리 이브닝 경매에 출품되며 추정가는 7,800만~1억2,800만 홍콩달러다.

플럼과 짙은 브라운으로 제한된 색, 절제된 구성, 큰 캔버스가 만드는 밀도는 ‘PSYCHO’가 다루는 내면의 긴장과 연결된다. 구체적인 인물이나 사건 없이 색면만으로 관람자의 감각을 끌어들이는 로스코의 회화는 나라의 드로잉이 밀집된 방이나 이시다의 구체적인 인물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시 주제에 접근한다.

같은 작품은 전시가 끝난 다음 날 경매라는 또 다른 문맥에 들어간다. 전시장에서는 정체성과 소외, 인간 내면을 다루는 여러 작품 가운데 하나로 읽히지만 경매가 시작되면 추정가와 응찰, 낙찰 결과가 새로운 정보를 더한다. 소더비는 두 과정을 분리하기보다 연속된 일정 안에 배치했다.

‘PSYCHO’는 27일까지 이어지고 현대·컨템퍼러리 이브닝 경매는 28일, 데이 경매는 29일 열린다. 전시를 충분히 경험한 직후 주요 작품이 시장으로 이동하는 일정이다. 관객의 감상과 작품에 대한 해석, 시장의 평가가 짧은 시간 안에 차례로 이어진다.

전시와 경매가 가까워졌다고 해서 미술관과 경매사의 기능이 같아진 것은 아니다. 미술관은 소장과 연구, 보존, 공공적 전시를 중심에 두고 상업 경매사는 거래라는 분명한 기능을 가진다. 다만 ‘PSYCHO’에서는 작품을 판매하는 공간도 거래 이전에 작품을 해석하고 관객과 관계를 만드는 데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다는 변화가 나타난다.

관객의 위치도 함께 달라진다. 경매 프리뷰에서 구매 가능성이 있는 작품을 확인하던 방문객은 기획전 안에서는 먼저 전시 관람객이 된다. 작품의 소유 가능성과 관계없이 공간을 찾고, 서로 다른 작업의 관계를 읽고, 이후 일부 작품이 경매에 등장하는 과정을 접한다. 거래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관객까지 경매사의 문화 공간 안으로 들어오는 구조다.

로스코와 나라가 이번 전시의 중심을 차지하면서 동시에 9월 경매의 주요 출품작이라는 사실은 소더비가 선택한 방식의 성격을 선명하게 만든다. 작품을 경매 직전에 노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가의 작업 세계와 다른 작품과의 관계를 먼저 경험하게 한 뒤 시장의 시간으로 넘긴다.

홍콩 ‘PSYCHO’에서 작품의 감상과 거래 사이에는 별도의 벽이 세워지지 않았다. 나라의 방을 걷고, 로스코의 색면을 바라보고, 문학과 다른 작가들의 작업을 따라가던 관람 경험이 28~29일 경매로 이어진다. 경매사가 작품을 보여주는 공간에 독립적인 전시 서사를 더하면서, 프리뷰와 기획전 사이에 놓였던 구분도 이전보다 옅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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