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와 금빛 사이 청록의 날개…머무름과 비상이 교차한 2006년
‘기다림’의 나무에서 움직이는 생명체로, 빛·색채 탐구를 품기 시작한 첫 나비

[KtN 박준식기자]한 마리 나비가 붉은 꽃 위에 내려앉았다. 몸은 꽃에 닿아 있지만 두 날개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열려 있다. 왼쪽 날개는 옆으로 뻗고 오른쪽 날개는 위쪽으로 길게 세워졌다. 잠시 머무는 자세 안에 다시 날아오를 움직임이 남아 있다.

나비킴(Navikim·김현정) 작가의 2006년작 ‘첫 만남(First Meeting)’은 이후 20여 년 동안 이어지는 나비 작업의 출발에 놓인 작품이다. 꽃과 나비라는 친숙한 자연의 형상을 다루면서도, 작품 안에서는 이미 구체적인 대상과 풀어진 색면, 정지와 이동, 물성과 빛 사이의 관계가 시작되고 있다.

나비킴(Navikim·김현정), ‘첫 만남(First Meeting)’, 2006, 장지에 분채, 65×53cm. 꽃 위에 내려앉은 나비를 중심으로 황토와 금빛, 청록과 녹색을 겹쳐 구성했다. 김현정의 작업에서 나비가 처음 본격적인 모티프로 등장한 작품이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나비킴(Navikim·김현정), ‘첫 만남(First Meeting)’, 2006, 장지에 분채, 65×53cm. 꽃 위에 내려앉은 나비를 중심으로 황토와 금빛, 청록과 녹색을 겹쳐 구성했다. 김현정의 작업에서 나비가 처음 본격적인 모티프로 등장한 작품이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나비는 작품 한가운데를 비켜 오른쪽에 자리한다. 검은 날개맥은 청록과 녹색, 황색과 주황빛의 작은 색면을 나누며 형태를 붙든다. 반면 나비 바깥에서는 윤곽이 빠르게 느슨해진다. 꽃잎은 붉은색과 주황색의 굵은 선으로 퍼지고, 황토와 금빛이 섞인 바탕은 여러 방향의 붓질과 색층으로 이어진다.

선명한 나비와 유동적인 주변은 서로 다른 밀도로 맞물린다. 날개의 검은 선이 형태를 단단하게 세우는 동안 꽃과 배경에서는 색이 선을 넘어가고, 면과 면 사이의 경계도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는다. 자연의 한 생명체를 묘사하면서도 배경 전체를 사실적인 풍경으로 닫지 않은 구성이다.

왼쪽 위에서 내려오는 굵은 금빛 곡선은 작품의 흐름을 크게 바꾼다. 곡선은 아래쪽으로 휘어지며 나비와 꽃 주변을 감싸고, 하단의 색면과 다시 연결된다. 꽃 위에 머문 나비가 정적인 축을 만든다면 금빛 선과 꽃잎의 방향은 바깥으로 움직인다.

나비의 비상은 날개만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주변을 휘감는 곡선과 사선으로 뻗는 꽃잎, 서로 밀고 들어오는 색면이 날개의 움직임을 이어받는다. 정지한 몸과 이동하는 주변이 맞물리면서 ‘첫 만남’에는 한 순간을 붙잡아 놓은 듯한 긴장이 생긴다.

황토와 금빛이 넓게 자리한 바탕에서는 청록과 녹색의 날개가 또렷하게 떠오른다. 오른쪽 아래의 붉은 꽃은 주황과 적갈색을 더하며 색의 온도를 높인다. 검은 날개맥 사이에 놓인 청록과 황색은 서로 작은 면으로 분절돼 있지만 주변의 금빛과 녹색은 경계를 넘어 이어진다.

색을 하나씩 고립시키기보다 인접한 색과 연결하는 방식은 이후 김현정 작가가 지속적으로 탐구하게 되는 빛과 색의 관계로 이어진다. ‘첫 만남’에서는 아직 실제 광원이 등장하지 않는다. 밝음은 금빛과 황색, 분채의 중첩, 장지의 결이 만들어낸다.

김 작가의 나비가 처음부터 완성된 상징으로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날갯짓하는 나비의 모습에서 데칼코마니 작품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듯한 조형적 인상을 발견했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생명체의 모습에는 자유와 평화, 초월을 향한 감각이 더해졌다. ‘첫 만남’에서 나비는 자연의 관찰 대상에 머물지 않고 작가 자신의 내면과 연결되는 형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나비가 등장하기 전 ‘기다림(Waiting)’에는 나무가 있었다.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는 한 자리에서 위쪽을 향한다. ‘첫 만남’에 이르면 고정된 나무의 자리를 날개를 가진 생명체가 대신한다. 움직일 수 없는 존재에서 공중으로 이동할 수 있는 존재로 형상이 바뀐 것이다.

‘첫 만남’의 두 날개가 완벽한 좌우 대칭을 이루지 않는 점도 이후 작업과 비교해 볼 만하다. 한쪽 날개는 위로 치솟고 다른 날개는 옆으로 열린다. 몸통을 중심으로 양쪽이 정확히 맞물리지 않으면서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살아난다.

후기의 ‘인터스텔라(Interstellar)’에서 원형과 중심축, 방사형 구성이 강해지는 흐름과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첫 만남’에는 나비를 하나의 상징적 도식으로 정리하기 전의 불균형과 생동감이 남아 있다. 꽃에 내려앉은 찰나의 자세가 구성 안에 그대로 스며든다.

장지 위의 표면도 매끈하게 닫히지 않는다. 금빛 곡선에는 거친 결이 남고, 황색과 녹색의 바탕에는 색을 밀고 겹친 흔적이 이어진다. 나비의 날개맥은 비교적 또렷한 반면 주변의 붓질은 자유롭게 풀려 있다. 나비와 배경의 차이는 색상뿐 아니라 표면의 밀도에서도 만들어진다.

김현정 작가가 이후 다루게 되는 ‘빛나는 색채’의 출발도 이 초기 작업과 연결된다. 프라하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하는 빛을 경험한 뒤 그 선명함을 회화에 옮기려 했지만, 안료를 섞을수록 색이 탁해지는 한계와 마주했다. 빛을 더 직접적으로 다루려는 탐구는 이후 투명 재료와 플렉시글라스, LED로 확장됐다.

‘첫 만남’에서는 그런 기술적 매체가 아직 들어오지 않는다. 대신 분채와 장지 안에서 밝음을 만들어낸다. 금빛 바탕에 청록의 나비를 놓고, 검은 선으로 색면을 나누며, 여러 층의 색을 겹치는 방식으로 빛의 감각을 붙잡는다.

나비킴은 작업의 흐름을 되짚는 과정에서 나비보다 먼저 빛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에 매료된 뒤 빛을 그리기 시작했고, 달빛을 거쳐 나비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나비를 그려왔지만 작업을 움직인 출발점에는 빛에 대한 갈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흐름은 이후 작품에서 단계적으로 구체화된다. ‘날으는 빛(Flying Light)’에서는 투명한 재료와 빛의 투과가 본격적으로 실험되고, ‘무한(Infinity)’에서는 LED가 작품 내부에 자리한다. ‘별과 별사이(Interstellar)’에 이르면 나비 내부에서 실제 빛이 나오면서 나비와 광원의 관계도 달라진다.

‘첫 만남’의 나비는 아직 빛을 발산하지 않는다. 황금빛 공간 속에서 주변의 빛과 색을 받아들이는 존재에 가깝다. 꽃 위에 잠시 내려앉았지만 서로 다른 방향으로 열린 날개에는 다음 움직임이 남아 있다.

작품 제목 ‘첫 만남’에는 꽃과 나비의 조우만 담겨 있지 않다. 김현정 작가와 이후 20년 작업을 이어갈 나비 모티프의 만남도 겹친다. 자연의 생명체였던 나비가 자유와 비상, 내면의 회복을 품는 형상으로 이동하고, 다시 빛과 결합해 스스로 발광하는 존재로 바뀌는 긴 과정의 첫 지점이다.

황토와 금빛의 바탕, 붉은 꽃, 청록의 날개가 만난 2006년의 ‘첫 만남’에는 후기 작품의 LED도 우주적 원형도 없다. 대신 한곳에 몸을 붙인 나비와 바깥을 향해 열린 날개가 있다. 머무름과 비상이 한 몸 안에서 교차한 순간부터 김현정 작가의 ‘빛의 나비’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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