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방동네 사람들’의 삶과 ‘황진이’의 여백을 잇는 ‘자연스러움’의 연출론
사랑과 소유, 재현과 이해 사이…오늘의 한국영화와 다시 마주한 배창호의 시선
[KtN 박준식·임우경기자] 배창호 감독에게 자연스러운 영화는 현실을 손대지 않고 옮긴 영화가 아니다. 카메라 앞의 사물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일상의 말투를 정밀하게 재현하더라도 인물의 삶까지 저절로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는 현실을 닮게 만드는 기술과 인간을 이해하는 시선이 함께 필요하다. 두 가지는 서로 연결돼 있지만 같은 것은 아니다.
K trendy NEWS와의 인터뷰에서 배 감독은 나무를 그리는 화가를 예로 들었다. 나무 아래 쓰레기와 비닐봉지가 놓여 있다면 화가는 그것을 남길 수도, 덜어낼 수도 있다. 인간이 버린 쓰레기를 이야기하려는 그림이라면 그려 넣어야 한다. 나무와 자연에 집중하려는 그림이라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현실에 무엇이 있었느냐만이 아니라 그 가운데 무엇을 보려 하느냐다.
“자연스럽다는 거하고 사실적이라는 거하고 다릅니다.”
1982년 ‘꼬방동네 사람들’로 데뷔한 감독의 이 말은 사실주의를 부정하는 선언보다 영화가 현실과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한 구분으로 읽힌다. 현실의 외형에 충실한 것과 현실 속 인간에게 충실한 것은 언제나 일치하지 않는다. 배창호의 영화는 그 간격에서 출발한다.
자연스러움은 연출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영화는 카메라가 있고 배우가 있고 다 바뀌어지는 거예요.”
배 감독은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재창조’라고 설명했다. 카메라의 위치를 정하고 배우가 움직이며 편집으로 시간을 연결하는 순간, 현실은 이미 다른 질서 안에 놓인다. 실제 장소에서 촬영했다는 사실도 이러한 개입을 없애지는 못한다. 무엇을 가까이 찍고 무엇을 멀리 둘 것인지, 어느 표정에서 화면을 바꿀 것인지에 따라 관객이 이해하는 인물은 달라진다.
여기서 자연스러움은 연출을 하지 않은 결과가 아니다. 연출의 선택이 인물의 감정과 행동 안에서 납득되는 상태에 가깝다. 실제 생활에서 흔히 듣는 말도 인물의 처지와 관계를 벗어나면 어색해진다. 반대로 일상에서 쉽게 마주치기 어려운 사건도 그 안의 감정이 설득력을 얻으면 관객은 받아들인다.
배 감독이 연기를 이야기하면서 말의 끝맺음과 감정에 따른 억양의 차이를 짚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사는 정보만 전달하지 않는다. 같은 부탁이라도 누구에게 어떤 마음으로 건네는지에 따라 힘과 호흡이 달라진다. 생활의 언어를 옮기는 일과 그 언어에 삶을 부여하는 일은 별개의 작업이다.
다만 나무 아래 쓰레기를 덜어내는 선택이 언제나 정당한 것은 아니다. 보기 좋은 화면을 위해 불편한 현실까지 제거한다면 자연스러움은 미화의 구실이 될 수 있다. 배창호의 연출론은 무엇을 덜어냈는지만큼 무엇을 끝까지 남겼는지를 작품 안에서 살필 때 비로소 구체적인 의미를 얻는다.
가난을 담되, 사람을 가난으로 설명하지 않는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이 등장한 1982년에는 도시 빈민의 생활을 영화에 담는 일 자체가 검열의 대상이었다. 시나리오와 완성된 필름을 각각 심사하던 제도 아래에서 이 작품은 시나리오 단계부터 수십 곳의 수정을 요구받았다. 배창호가 영화의 프레임을 결정하기 전에 국가가 먼저 화면에 들어갈 수 있는 현실을 가르고 있었다.
이런 조건에서 빈민촌을 영화의 중심에 놓은 선택은 단순한 소재의 발견에 그치지 않는다. 경제성장으로 설명되던 시대를 그 성장의 바깥에 놓인 사람들의 생활에서 다시 바라보는 일이었다.
그러나 배창호는 인물들을 사회의 모순을 입증하는 증거로만 배열하지 않았다. ‘꼬방동네 사람들’의 명숙과 주석, 태섭에게는 생계의 고단함뿐 아니라 가족을 향한 집착과 상처, 죄책감과 변화의 가능성이 함께 있다. 가난이 삶의 조건을 결정하지만 인물의 모든 행동을 대신 설명하지는 않는다.
이웃을 돕는 마음과 다투는 마음도 같은 공동체 안에 존재한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언제나 선량한 것은 아니며, 잘못을 저질렀다고 인간적인 면이 모두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배창호의 인물은 불쌍하거나 존경할 만한 존재로 정리되기 전에 모순을 지닌 생활인으로 남는다.
이 지점에서 흔히 배창호 영화에 붙이는 ‘따뜻한 시선’이라는 표현은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따뜻함이 현실의 고통을 누그러뜨리는 정서만을 뜻한다면 작품의 긴장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배창호는 고통을 덜어낸 뒤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잘못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도 인간을 이해하려 한다.
안성기와의 작업을 설명할 때도 배 감독은 인물이 악한 행동을 하는 배경과 어떤 역할에서도 드러나는 인간적인 면을 이야기했다. 배우의 얼굴에서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고독을 읽었다. 선한 인상만을 찾은 것이 아니라 행동과 표정 사이에 남아 있는 사정을 보려 했다는 뜻이다.
이해는 면죄와 다르다. 행동의 배경을 살핀다고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꼬방동네 사람들’에서 태섭의 변화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일과 연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배창호의 휴머니즘은 인간의 선함을 미리 보증하기보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어떻게 책임을 받아들이는지까지 따라간다.
사랑을 말하는 감독이 욕망을 응시한 이유
배 감독은 인터뷰에서 사랑과 반대되는 감정만이 아니라 사랑으로 오인되는 욕망을 함께 이야기했다. 상대에게 집착하고 소유하려 하며 질투하는 마음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혼동이다. 사랑을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영화가 인간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어떤 관계가 만들어지는지까지 살펴야 한다.
‘깊고 푸른 밤’(1985)은 이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미국에서 성공하려는 욕망과 남녀의 관계가 얽히면서 다른 사람은 함께 살아갈 상대인 동시에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된다. 성공을 향한 절박함이 커질수록 타인의 삶을 헤아릴 자리는 좁아진다.
‘꼬방동네 사람들’과 ‘깊고 푸른 밤’은 가난과 성공이라는 서로 다른 조건에서 인간관계의 가능성과 붕괴를 다룬다. 한쪽에서는 불완전한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받아들일 여지가 생긴다. 다른 한쪽에서는 원하는 삶을 얻으려는 욕망이 관계를 파괴한다. 배창호의 관심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가르는 일보다 인간이 타인을 동료로 대하다가 수단으로 바꾸는 과정에 놓여 있다.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가 다루는 해고와 생존 경쟁도 이 대목에서 함께 읽을 수 있다. 가족과 집을 지키려는 가장의 절박함은 블랙코미디와 범죄극을 거치며 타인을 제거하는 논리로 변한다. 일상을 지키겠다는 명분이 다른 사람의 일상을 무너뜨리는 역설이다.
두 감독의 형식과 정서는 다르다. 그럼에도 생존과 사랑이라는 말이 인간의 행동을 어디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지 살핀다는 점에서는 비교의 여지가 있다. 배창호의 영화 역시 절박한 사정을 이해하는 일과 그 절박함이 낳은 폭력을 받아들이는 일을 구분한다.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시선은 판단을 포기하는 시선이 아니다.
‘황진이’의 여백, 인간을 서둘러 해석하지 않는 시간
배창호의 리얼리즘을 소재와 인물에만 한정하면 ‘황진이’(1986)의 형식적 변화는 별개의 시도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자연스러움을 현실의 복제가 아닌 재창조로 이해하면, 도시 빈민의 생활을 다룬 데뷔작과 절제된 롱테이크를 택한 ‘황진이’ 사이의 연결이 드러난다.
파나비전 카메라로 촬영한 ‘황진이’에서 정일성 촬영감독은 인물을 화면 한쪽에 배치하고 주변 공간을 넓게 남겼다. 배창호는 사건을 빠르게 연결하는 대신 인물과 공간이 함께 존재하는 시간을 늘렸다. 인물의 표정만으로 감정을 설명하지 않고 주변의 거리와 여백까지 감정의 일부로 삼은 것이다.
이때 여백은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덧붙이는 장식에 머물지 않는다. 얼굴을 가까이 찍으면 관객은 특정한 감정에 집중하게 된다. 인물과 주변을 함께 오래 바라보게 하면 감정이 놓인 상황까지 살필 수 있다. 화면을 오래 유지하는 선택은 관객에게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동시에 해석할 여지를 남긴다.
롱테이크라고 언제나 현실에 충실한 것은 아니다. 느린 호흡 역시 감독이 만든 형식이다. 배창호의 선택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그 시간 동안 무엇을 보게 하는지다. 사건의 결과만 전달하지 않고 인물이 시간을 견디는 감각까지 영화 안에 남기는 방식이다.
최근 한국영화의 스펙터클과도 여기서 대화가 가능하다. 나홍진 감독의 ‘호프’는 외딴 항구를 무대로 익숙한 생활의 질감과 정체불명의 존재를 결합한다. 현실에 없는 세계가 설득력을 얻으려면 그 안의 몸과 공간, 공포의 반응이 관객에게 실감돼야 한다.
배창호의 ‘자연스러움’은 이런 장르적 상상력을 배제하는 기준이 아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것을 찍었는지보다 선택한 세계 안에서 인간의 반응과 관계가 살아 있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황진이’의 절제와 ‘호프’의 격렬한 운동은 서로 다른 형식이지만, 화면의 설득력이 외형의 사실성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문제를 공유한다.
카메라의 선의까지 돌아보는 리얼리즘
현실을 선택하고 재구성한다는 배창호의 설명을 더 밀고 나가면 카메라를 든 사람의 책임에 닿는다. 감독은 누군가의 삶을 이해하려 하지만, 이해한 내용을 자신의 영화로 조직하는 사람도 감독이다. 인물을 대변하려는 의도와 인물의 삶을 작품에 이용하는 행위는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
이창동 감독의 ‘가능한 사랑’은 해고 노동자 부부와 이들을 촬영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부부의 관계를 통해 이 문제를 서사 안으로 끌어들인다. 카메라 앞의 사람에게는 자신의 생활인 것이 카메라 뒤의 사람에게는 작품의 소재가 된다. 서로 가까워지고 선의를 나누더라도 촬영하고 편집하는 권한의 차이는 남는다.
이는 배창호의 연출론을 오늘의 영화와 함께 읽을 때 생기는 중요한 긴장이다. 현실을 재창조할 수 있다는 말은 현실을 마음대로 바꿔도 된다는 허가가 아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덜어냈는지에 따라 한 인간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배창호의 작품에서 그 책임을 살필 수 있는 대목은 인물이 감독의 생각을 얼마나 충실히 전달하는지가 아니라, 하나의 설명으로 정리되지 않는 모습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다. 명숙에게는 가난을 견디는 어머니라는 설명만으로 담을 수 없는 감정이 있고, 태섭에게는 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는 규정만으로 끝나지 않는 변화가 있다.
인물을 존중하는 영화는 반드시 인물을 좋게 그리는 영화가 아니다. 불편한 면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을 하나의 결함이나 역할로 소진하지 않는 영화다. 이러한 의미에서 배창호의 리얼리즘은 현실의 재현을 넘어 인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관한 태도로 읽힌다.
감독의 ‘매장량’, 기술로 단축할 수 없는 시간
배 감독은 젊은 창작자의 역량을 이야기하면서 ‘매장량’이라는 표현을 썼다.
“매장량이 자기만 가지고 있는 게 있어요.”
오랫동안 당구를 친 사람이라면 당구라는 세계의 세부를 누구보다 잘 표현할 수 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그러나 소재에 익숙한 것과 여러 작품을 통해 인생과 인간을 바라보는 힘을 갖추는 것은 다르다. 후자의 축적에는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감독이 그 시간 동안 계속 작업할 수 있는 환경도 함께 언급했다.
이 발언은 경력이 길수록 좋은 영화를 만든다는 단순한 연륜론과 구별된다. 한 분야에 대한 지식은 작품의 정확성을 높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깊이까지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익숙한 경험을 되풀이하는 것과 경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배창호 자신도 어린 시절 영화로 인생을 대리 경험했다고 회고했다. 사랑과 용서, 희생을 배웠지만 영화가 관객에게 값싼 꿈을 팔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영화에서 배운 것을 그대로 믿는 단계에서 벗어나 영화가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돌아본 셈이다.
배창호의 자연스러움은 이 성찰과 떨어져 있지 않다. 관객이 쉽게 몰입한다고 해서 그 감정이 언제나 정직한 것은 아니다. 사랑처럼 느껴지는 소유욕이 있고, 위로처럼 받아들여지는 도피가 있다. 영화는 감정을 만들어내는 능력만큼 그 감정의 성격을 살피는 능력도 필요하다.
한국영화의 세계적 주목을 이야기할 때 배 감독이 덧붙인 말도 같은 방향을 향한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라는 것은 맞는 이야기인데 한국적인 어떤 것이냐가 중요한 것 같은데.”
이 말은 한국적인 외형을 갖추는 일과 한국인의 삶에서 길어 올린 감각을 영화의 형식으로 만드는 일을 구분하게 한다. 전통적인 소재나 지명을 가져오는 것만으로 고유한 영화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말의 호흡과 사람 사이의 거리, 사랑과 욕망을 받아들이는 방식까지 작품 안에서 설득력을 얻어야 한다.
배창호가 말하는 자연스러움은 결국 쉽게 얻어지는 편안함이 아니다. 무엇을 남길지 결정하기 위해 현실을 오래 살펴야 하고,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판단도 돌아봐야 한다. 기술적으로 정교한 화면과 인간적으로 깊은 영화 사이에는 그 시간이 놓여 있다.
배창호의 리얼리즘을 과거의 따뜻한 영화라는 말로 정리하기 어려운 이유다. ‘꼬방동네 사람들’의 거친 생활과 ‘깊고 푸른 밤’의 욕망, ‘황진이’의 절제된 시간은 서로 다른 형식으로 인간에게 다가간다. 현실을 얼마나 닮았는지에 앞서 그 안의 사람을 얼마나 충분히 바라봤는지가 세 작품을 잇는 기준이다.
카메라는 사람의 얼굴을 정확하게 기록하면서도 그 사람을 잘못 이해하게 만들 수 있다. 배창호가 사실성과 자연스러움 사이에 남겨둔 거리는 바로 그 가능성을 돌아보게 한다. 좋은 영화의 진실은 현실과 닮은 화면만이 아니라, 그 화면을 통해 한 인간을 성급히 다 안다고 여기지 않게 되는 데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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