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키 공동창업자 부부, 모교에 종합 공립대 사상 최대 규모 기부
바이오엔지니어링에서 학부 공학교육까지 확대…교수·학생·산업 연결 구조 재편
한국 대학도 장학·연구 목적 고액 기부 축적…‘건물 기부’ 넘어 교육 시스템 투자 주목
[KtN 임우경기자]나이키 공동창업자 필 나이트(Phil Knight)와 페니 나이트(Penny Knight) 부부가 미국 오리건대학교(University of Oregon)에 10억달러를 기부한다. 기부금이 향하는 곳은 운동장이나 기념시설이 아니다. 오리건대가 지금까지 갖추지 못했던 종합적인 공학교육 체계를 새로 만드는 데 투입된다. 대학은 ‘나이트 공과대학(Knight College of Engineering)’ 설립을 추진하고 바이오엔지니어링 중심의 대학원 교육을 학부 공학교육과 응용과학으로 넓힐 계획이다. 종합 공립대학에 들어온 단일 기부로는 사상 최대 규모다.
10억달러라는 숫자보다 주목할 대목은 돈의 사용 방식이다. 기존 건물 하나를 짓거나 특정 장학재단을 만드는 방식에서 더 나아가 학과와 학위 과정, 교수진, 학생, 연구시설, 산업협력까지 하나의 교육 체계로 묶는다. 공학대학과 새로운 학위 과정은 주정부와 대학 내부 승인 절차를 거쳐 단계적으로 만들어진다. 바이오엔지니어링을 중심으로 기초과학과 데이터과학, 의학을 연결하고 기술창업과 산업 현장을 교육 과정에 접목하는 구상도 포함됐다.
오리건대에서 공학은 비교적 새로운 분야다. 2016년 필 나이트 부부가 5억달러를 약정하면서 ‘Phil and Penny Knight Campus for Accelerating Scientific Impact’가 출범했고, 오리건대 최초의 공학 학과가 만들어졌다. 2021년에는 다시 5억달러가 투입됐다. 바이오엔지니어링을 중심으로 시작한 나이트 캠퍼스는 현재 17개 연구실을 두고 매년 500명이 넘는 학생과 연구인력이 참여하는 연구 거점으로 커졌다. 200곳이 넘는 기업과 협력하고 학생·교수가 참여한 스타트업도 10여 곳 이상 배출했다.
2026년 10억달러가 추가되면서 나이트 캠퍼스를 향한 세 차례 기부는 20억달러에 이르렀다. 한 차례의 거액 기부로 대학에 이름을 남긴 뒤 관계가 끝나는 구조와도 다르다. 2016년에는 연구 기반을 만들었고, 2021년에는 연구 규모를 확장했으며, 2026년에는 별도의 공학대학을 세우는 단계로 들어갔다. 10년에 걸쳐 한 기부자가 대학의 새로운 학문 분야가 자리를 잡는 과정을 지속적으로 지원한 셈이다.
필 나이트와 오리건대의 인연은 기업가와 대학의 후원 관계보다 오래됐다. 나이트는 오리건대에서 육상선수로 뛰었고 1959년 졸업했다. 육상팀 코치였던 빌 바워먼(Bill Bowerman)과 1964년 나이키의 전신 블루리본스포츠(Blue Ribbon Sports)를 공동 창업했다. 일본산 러닝화를 수입해 판매하던 작은 사업은 이후 자체 운동화를 만들기 시작했고, 1970년대 나이키라는 이름을 앞세운 글로벌 스포츠 기업으로 성장했다. 대학에서 선수와 코치로 만난 관계가 기업 창업으로 이어졌고, 기업에서 축적한 자본이 다시 대학의 공학교육 기반으로 들어오는 순환 구조가 만들어졌다.
오리건주의 산업 수요도 공학대학 신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오리건대가 제시한 전망에 따르면 주에서는 매년 약 2500개의 공학 관련 일자리가 발생한다. 바이오테크놀로지와 생명과학뿐 아니라 반도체, 첨단소재, 제조업, 스포츠 퍼포먼스, 인공지능까지 엔지니어 수요가 이어지고 있다. 미국 반도체 인력의 약 10%가 오리건주에서 일하지만 산업 규모에 비해 관련 인력 양성은 부족하다는 것이 대학 측 설명이다.
학생 모집 환경도 달라지고 있다. 오리건대는 2026~2027학년도 신입생이 전년보다 약 500명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고, 감소 인원의 대부분을 등록금이 높은 타주 출신 학생이 차지했다. 대학 교육·일반회계에는 약 6500만달러 규모의 적자가 발생했다. 10억달러 기부금은 공학과 과학 연구에 용도가 지정돼 있어 일반 운영비와 분리된다. 대신 대학은 공학 교육 분야를 넓혀 기존에 오리건대를 선택하지 않았던 학생층까지 모집할 수 있는 전공 구조를 마련하려 하고 있다.
교육에 대한 기부는 한국 대학에도 낯선 방식이 아니다. 장학금과 연구기금, 건물 건립, 석좌교수 지원을 위한 발전기금이 오랫동안 대학 재정의 한 축을 맡아왔다. KAIST에서는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이 세 차례에 걸쳐 총 766억원을 기부했다. 2020년 출연한 676억원 상당의 재산은 과학교육재단을 만들고 장기간 연구할 교수를 지원하는 데 목적을 뒀다. KAIST는 2024년 12월 기준 이광형 총장 취임 이후 약정된 발전기금이 2599억원에 이른다고 집계했다.
학생의 교육 기회를 직접 넓히는 기부도 이어져 왔다. 연세대에는 2012년 김순전 기부자가 100억원대로 평가된 부동산과 예금을 내놓으며 경제적 형편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는 학생을 위한 장학금 조성을 요청했다. 국내 대학의 발전기금 역시 장학 지원에서 특정 연구 분야 육성까지 사용 범위가 확대돼 왔다.
오리건대의 10억달러 기부는 규모에서 한국 대학과 직접 비교하기 어렵다. 차이는 금액에만 있지 않다. 대학이 앞으로 필요로 하는 전공을 새로 만들고, 교수 채용과 학생 교육, 연구시설과 기업 협력을 동시에 확대하도록 장기간 자본을 배치했다는 데 특징이 있다. 기부자가 특정 건물이나 시설을 남기는 방식보다 대학의 교육 역량 자체를 확장하는 데 자금이 들어간다.
한국 고등교육에서도 대학 재정과 인재 양성의 연결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대학알리미는 대학 회계와 함께 발전기금회계와 기부금 현황을 별도 공시하고 있으며, 2026년 국내 대학의 학생 1인당 교육비는 평균 2172만원 수준이다. 정부 재정지원과 등록금, 산학협력뿐 아니라 민간 기부가 교육과 연구에 들어가는 구조 역시 대학 재원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필 나이트 부부의 기부는 대학과 기부자가 교육을 바라보는 시간의 길이도 보여준다. 2016년 처음 투입한 5억달러가 공학 연구의 출발점이었다면 10년 뒤의 10억달러는 학부생까지 교육하는 단과대학으로 범위를 넓힌다. 연구자 몇 명이나 건물 몇 동을 지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대학이 어떤 분야의 학생을 받아 어떤 인재를 길러낼지를 바꾸는 단계로 넘어갔다.
오리건대는 앞으로 주정부와 학내 절차를 거쳐 나이트 공과대학과 학위 과정을 설립하고 교수진과 학생 규모를 확대할 계획이다. 추가 공학 시설과 학생 장학금도 기부금 사용 계획에 포함돼 있다. 1950년대 오리건대 트랙을 달렸던 한 학생이 만든 기업에서 나온 자본이 70여 년 뒤 모교의 새로운 전공과 교육 체계를 만드는 자금으로 돌아왔다. 대학 기부가 남기는 것은 기부자의 이름만이 아니라, 이후 수십 년 동안 대학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누구를 길러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교육 기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흐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