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인물과 검은 인물, 멀리 놓인 기마상과 고대 문양…1990년 유화에 담긴 중앙아시아의 자연과 인간, 이동과 정착의 역사
[KtN 박준식기자]광활한 청록색 하늘 아래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다. 왼쪽 인물은 붉은색, 오른쪽 인물은 검은색으로 표현됐다. 두 사람의 얼굴과 몸은 가늘고 길게 늘어났으며, 발끝은 황갈색의 대지에 닿아 있다. 왼편 멀리에는 말을 탄 사람이 지나가고, 뒤쪽에는 두 개의 봉우리가 솟아 있다. 하늘 한가운데에는 작은 노란색의 형상이 떠 있으며, 대지 곳곳에는 원형과 십자형, 식물의 줄기를 닮은 선들이 흩어져 있다.
키르기스스탄 화가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Yuristanbek Shygaev)의 1990년작 ‘여행자들(Travelers)’은 중앙아시아의 풍경과 인간의 이동, 전통적인 기호를 하나의 공간에 결합한 회화다. 넓은 하늘과 낮은 지평선, 두 인물과 기마상은 유목적 생활의 흔적을 떠올리게 한다. 쉬가예프는 풍경과 인물의 구체적인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대지의 표면에 다양한 기호와 색채를 더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상징적인 공간으로 확장했다.
작품의 상단을 차지하는 청록색 하늘은 넓고 고요하다. 짙은 청색과 녹색이 섞인 바탕에는 미세한 붓질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중앙 위쪽에는 노란색의 작은 형상이 놓여 있다. 노란색 주변에는 녹색의 흐릿한 타원형이 펼쳐져 있어 하늘에 떠 있는 빛이나 구름, 멀리 보이는 섬을 연상시킨다. 작은 형상은 넓은 하늘에서 유일하게 뚜렷한 색채의 변화를 만들며 관람자의 시선을 붙잡는다.
하늘 아래에는 황갈색과 녹색의 대지가 길게 펼쳐져 있다. 왼쪽에는 어두운 갈색의 언덕이 낮게 이어지고 중앙 뒤편에는 두 개의 봉우리가 솟아 있다. 봉우리의 표면에는 검은색과 녹색, 황갈색의 짧은 붓질이 겹쳐 있어 거친 바위의 질감을 만든다. 오른쪽에는 낮고 넓은 산등성이가 자리하며 대지의 수평적인 흐름을 이어간다.
두 개의 봉우리는 작품에서 중요한 지형적 요소다. 왼쪽 봉우리는 둥글고 완만한 형태를 지니고 오른쪽 봉우리는 더 가늘고 높게 솟아 있다. 서로 다른 높이의 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중앙의 두 인물과도 시각적인 관계를 맺는다. 산의 수직적인 형태와 인물의 길게 늘어난 신체가 반복되면서 자연의 지형과 인간의 모습 사이에 조형적인 대응이 생긴다.
중앙의 두 인물은 작품의 가장 뚜렷한 형상이다. 왼쪽 인물은 붉은색과 갈색의 작은 흔적이 촘촘하게 겹친 표면을 지니고, 오른쪽 인물은 짙은 검은색과 회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사람 모두 머리와 어깨, 몸통이 간결한 윤곽으로 표현됐으며, 아래로 내려갈수록 신체가 길고 좁아진다. 인물의 팔과 다리는 몸통에 가까이 붙어 있고, 발은 대지의 아래쪽까지 길게 이어진다.
붉은 인물의 얼굴에는 작은 눈과 코, 입을 나타내는 선들이 남아 있다. 머리는 둥글고 목은 가늘게 이어지며 어깨 아래로 몸통이 길게 내려온다. 붉은색의 표면에는 회색과 검은색의 작은 흔적들이 섞여 있어 단순한 색면보다 복합적인 질감을 만든다. 인물의 몸은 하나의 기둥처럼 길게 이어지면서 대지 위에 세워진 조각상을 떠올리게 한다.
검은 인물은 붉은 인물보다 더욱 단순한 윤곽을 지닌다. 머리는 짙은 검은색으로 표현됐고 얼굴의 세부는 작은 선으로 정리됐다. 어깨와 몸통은 각진 형태로 이어지며 허리 부근에서 한 차례 꺾인다. 아래로 내려가는 몸은 가늘고 긴 직사각형에 가까워진다. 검은색의 표면에는 회색과 갈색의 거친 흔적이 남아 있어 붉은 인물과 질감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두 인물은 비슷한 높이와 자세로 서 있다. 붉은 인물은 왼쪽에, 검은 인물은 오른쪽에 자리하며 서로 가까운 거리를 유지한다. 몸의 방향은 정면에 가깝지만 얼굴의 표현과 신체의 윤곽에는 차이가 있다. 같은 대지 위에 서 있는 두 존재가 서로 다른 색채와 형태를 지니면서 작품 중앙에 강한 대비를 만든다.
두 인물 사이에는 밝은 녹색과 노란색의 좁은 영역이 놓여 있다. 붉은색과 검은색 사이에서 밝게 드러나는 색채는 두 형상의 경계를 강조한다. 두 사람의 몸이 서로 가까이 놓여 있어도 색채의 차이는 분명하다. 쉬가예프는 같은 공간에 서 있는 인물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으면서도 각각의 존재를 독립적인 형상으로 표현했다.
왼쪽 멀리에는 말을 탄 인물이 등장한다. 말은 붉은 갈색으로 표현됐고 몸통과 네 다리는 짧은 선으로 구분된다. 기수는 청록색의 작은 몸과 머리를 지니며 말 위에 앉아 있다. 말과 사람의 형태는 간결하지만 기마상의 기본적인 구조가 분명해 넓은 대지 안에서 이동하는 존재로 읽힌다.
기마상은 중앙의 두 인물과 다른 움직임을 만든다. 두 사람은 대지 위에 곧게 서 있는 반면 말과 기수는 옆을 향한 자세로 놓여 있다. 중앙의 수직적인 인물과 왼쪽의 수평적인 기마상이 대비를 이루면서 작품 안에 정지와 이동의 관계가 형성된다. 넓은 하늘과 산, 대지의 구성은 이러한 차이를 더욱 강조한다.
키르기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유목문화에서 말은 생활과 이동을 연결하는 중요한 동물이었다. 쉬가예프의 초기 판화에서도 말은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구성하는 주요 소재로 등장했다. 1986년 ‘비둘기를 든 소녀’에서는 말이 소녀와 함께 서 있었고, 사람과 동물의 관계가 구체적인 모습으로 표현됐다. ‘여행자들’에서는 말과 기수가 먼 곳에 작게 배치돼 대지의 넓이와 이동의 감각을 드러낸다.
작품의 아래쪽에는 자연의 풍경과 다른 기호들이 밀집한다. 왼쪽에는 원형과 십자형이 반복되는 가느다란 곡선이 이어지고, 그 주변에는 노란색과 녹색의 짧은 선들이 흩어져 있다. 중앙 아래에는 길게 뻗은 식물의 줄기를 닮은 형태와 작은 원들이 놓여 있으며, 오른쪽에는 물고기나 동물의 일부를 연상시키는 형상과 둥근 기호들이 나타난다.
왼쪽 아래의 곡선은 검은색과 녹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줄기처럼 휘어진 선을 따라 여러 개의 원형이 놓이고, 원 안에는 십자형의 작은 선들이 들어 있다. 같은 기호가 반복되면서 하나의 장식적인 문양을 이루지만 곡선의 방향과 원형의 간격은 일정하지 않다. 자연의 식물과 기하학적 기호가 결합한 형태다.
그 아래에는 붉은색과 분홍색의 둥근 형상이 자리한다. 중심에는 밝은 원이 있고 주변에는 붉은색과 자주색이 겹쳐 있다. 곡선과 원형이 반복되면서 대지의 표면에 여러 층의 이미지가 쌓인다. 쉬가예프는 작은 기호와 색채의 반복을 통해 작품 아래쪽에 독립적인 조형적 공간을 만들었다.
중앙 아래에는 가늘고 긴 황갈색의 줄기가 위로 뻗어 있다. 식물의 줄기를 닮은 형태는 여러 갈래로 나뉘고 주변에는 작은 원형과 짧은 선이 붙어 있다. 인물의 길게 늘어난 신체와 비슷한 수직적인 구조를 지니면서도 더욱 유연한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의 생명체를 연상시키는 형태와 인물의 기둥 같은 몸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대지 위에 놓인다.
오른쪽 아래에는 더욱 복잡한 형상들이 등장한다. 밝은 노란색과 녹색의 바탕 위에 원형과 십자형, 붉은색과 청색의 작은 선들이 겹쳐 있다.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푸른색의 동물 머리를 연상시키는 형상이 나타나고, 그 아래에는 둥근 눈처럼 보이는 원형이 놓여 있다. 주변에는 흰색과 노란색의 곡선이 길게 이어져 자연의 줄기나 뿌리를 떠올리게 한다.
대지의 아래쪽에 놓인 기호들은 작품 상단의 넓고 단순한 하늘과 강한 대비를 이룬다. 하늘은 청록색의 넓은 면으로 펼쳐지고 대지는 여러 색채와 작은 형상들로 채워져 있다. 쉬가예프는 상단의 여백과 하단의 밀도 높은 구성을 통해 자연의 넓이와 인간의 기억, 기호가 쌓인 공간을 구분했다.
‘여행자들’의 색채는 청록색과 황갈색, 붉은색과 검은색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하늘의 청록색은 넓고 차분한 분위기를 만들고, 대지의 황갈색은 따뜻한 색조로 이어진다. 중앙의 붉은 인물과 검은 인물은 주변의 자연색과 대비되며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아래쪽의 노란색과 분홍색, 녹색과 청색은 작은 기호와 결합해 작품 전체에 색채의 변화를 더한다.
쉬가예프는 인물과 산, 기마상에는 비교적 분명한 윤곽을 사용하면서도 대지의 아래쪽에는 자유로운 선과 작은 기호를 배치했다. 현실의 풍경을 연상시키는 형태와 추상적인 문양이 한 작품에 공존한다. 산과 말, 인물은 중앙아시아의 자연과 생활을 떠올리게 하고, 원형과 십자형, 식물의 줄기를 닮은 선들은 그 공간에 상징적인 성격을 더한다.
1980년대 초 쉬가예프의 색채 판화에서는 산과 집, 말과 사람의 형태가 뚜렷했다. ‘햇빛 비친 집’에서는 집의 지붕과 산의 능선, 말의 몸이 분명하게 구분됐고, ‘비둘기를 든 소녀’에서는 소녀와 말, 비둘기가 하나의 공간에 배치됐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관찰한 결과가 구체적인 풍경과 인물로 표현됐다.
1980년대 후반의 유화에서는 자연의 형상이 더욱 자유롭게 변형됐다. 1986년 ‘수중 세계’에서는 물고기와 수초, 둥근 기호가 짙푸른 공간에 함께 등장했고, 1987년 ‘납치’에서는 붉은 짐승의 몸과 바퀴, 원형과 기호가 결합했다. 1989년 ‘호숫가’에서는 자연의 형상이 붉은 덩어리와 청록색의 생명체, 원형과 십자형의 기호로 재구성됐다.
1990년 ‘여행자들’에서는 이러한 조형적 변화가 풍경과 인물의 관계 속에서 다시 정리됐다. 산과 대지, 말과 사람은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남아 있고, 그 주변에는 원형과 십자형, 동물과 식물을 연상시키는 기호들이 놓여 있다. 구체적인 풍경과 상징적인 형상이 함께 등장하면서 자연의 관찰과 신화적 상상력이 하나의 공간에 결합됐다.
같은 해의 ‘매의 위엄’과 ‘산책’, ‘만남’에서도 쉬가예프는 인간과 동물, 기호의 관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탐색했다. ‘매의 위엄’에서는 높은 언덕에 앉은 매와 빛의 기둥, 거대한 원형과 문양이 함께 등장했고, ‘산책’에서는 여성과 뿔을 닮은 머리를 가진 검은 형상이 보랏빛 공간에 나란히 서 있었다. ‘만남’에서는 붉은 바탕 위에 뿔을 닮은 검은 형상을 간결하게 배치했다.
‘여행자들’은 이러한 작품들과 비교할 때 자연의 풍경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넓은 하늘과 낮은 산, 황갈색의 대지가 작품의 기본 구조를 이루고 그 안에 두 인물과 기마상, 작은 기호들이 놓여 있다. 쉬가예프는 자연의 지형을 유지하면서 인간과 동물, 전통적인 문양을 결합해 중앙아시아의 생활과 기억을 회화적으로 구성했다.
작품 제목인 ‘여행자들’은 중앙의 두 인물과 왼쪽의 기마상을 연결한다. 두 인물은 대지 위에 서 있고 기마상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한다. 넓은 하늘과 산, 대지는 이동의 공간을 이루며 작은 기호들은 그 위에 남은 기억의 흔적처럼 나타난다. 쉬가예프는 여행의 구체적인 경로를 묘사하기보다 이동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넓은 풍경 속에 배치했다.
두 인물의 길게 늘어난 신체는 작품에서 중요한 조형적 특징이다. 붉은 인물과 검은 인물은 기둥처럼 서 있으며 주변의 산과 식물의 줄기, 작은 기호들과 수직적인 관계를 맺는다. 두 사람의 몸은 서로 다른 색채로 표현됐지만 비슷한 자세와 비례를 지니고 있어 하나의 집단처럼 나타난다. 인간의 모습이 자연의 지형과 함께 작품의 구조를 이루는 방식이다.
왼쪽의 기마상은 두 인물과 거리를 두고 배치돼 있다. 작은 말과 기수는 넓은 대지 속에서 움직이는 존재로 나타나며 중앙의 두 인물과 다른 방향의 흐름을 만든다. 정지한 인물과 이동하는 기마상의 대비는 작품 제목과 연결되면서 여행의 감각을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하늘에 떠 있는 노란색의 작은 형상도 작품 전체의 균형을 이루는 요소다. 넓은 청록색의 공간에서 노란색은 강한 대비를 만들고, 아래쪽의 황갈색 대지와 색채의 관계를 맺는다. 주변의 흐릿한 녹색 타원형은 노란색을 감싸며 하늘의 한 부분을 독립적인 공간처럼 만든다. 넓은 하늘에 놓인 작은 형상과 대지 위에 선 두 인물은 서로 다른 크기와 위치에서 작품의 중심을 나눈다.
쉬가예프의 회화에서 자연은 인간과 동물, 기호가 함께 존재하는 공간으로 확장됐다. ‘여행자들’에서는 산과 대지, 말과 사람의 구체적인 모습이 유지되는 가운데 원형과 십자형, 식물과 동물을 연상시키는 형상들이 대지의 표면에 흩어져 있다. 자연의 풍경과 상징적인 기호가 겹치면서 현실의 장소와 기억의 공간이 함께 형성된다.
1990년 ‘여행자들’은 쉬가예프가 초기 판화에서 발전시킨 자연 관찰과 후기 회화의 신화적 조형언어를 연결하는 작품이다. 산과 말, 사람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배치했던 초기 작업의 특징이 남아 있고, 그 주변에는 기호와 문양을 결합하는 새로운 구성이 나타난다. 넓은 청록색 하늘과 황갈색 대지, 붉은 인물과 검은 인물이 이루는 강한 대비는 작품의 기본 구조를 만들고, 아래쪽의 작은 기호들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더욱 풍부하게 한다.
‘여행자들’의 두 인물은 넓은 대지 위에 나란히 서 있다. 멀리에는 말을 탄 사람이 지나가고 두 개의 봉우리가 솟아 있으며, 하늘에는 노란색의 작은 형상이 떠 있다. 대지 아래쪽에는 원형과 십자형, 식물과 동물을 연상시키는 기호들이 흩어져 있다. 쉬가예프는 자연의 풍경과 인간의 이동, 전통적인 문양을 결합해 중앙아시아의 기억을 회화로 구성했다. ‘여행자들’은 구체적인 풍경과 신화적 상상력이 함께 놓인 작품으로, 쉬가예프가 1990년 전후 발전시킨 조형적 변화가 자연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드러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