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의 본질이 ‘상품’에서 ‘시스템’으로 이동한 시대, 발망이 남긴 경제 모델

Balmain (발망).  사진=예림출판사(Yelim Publishing),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Balmain (발망). 사진=예림출판사(Yelim Publishing),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임우경기자]발망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올리비에 루스테잉은 패션 산업의 언어를 ‘경제의 구조’로 번역한 인물로 평가된다. 2011년 임명 당시 3천만 유로 수준에 불과하던 발망의 연매출은 2024년 3억 유로를 돌파했다. 14년 만에 10배 성장이라는 수치는 단순한 디자인 성공이 아니라, 럭셔리 하우스의 경제 구조 자체를 혁신한 결과였다. 루스테잉 체제의 발망은 패션 브랜드가 하나의 ‘콘텐츠 기업’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발망의 수익 구조는 세 가지 축으로 구성됐다. 첫째, 전통적인 고가 컬렉션 판매. 둘째, 라이선스 및 협업 사업. 셋째, 디지털 콘텐츠 기반의 브랜드 수익.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른 시장을 대상으로 하지만, 루스테잉은 이를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브랜드 전체의 매출을 견인했다. 전통적인 오뜨 꾸뛰르 중심 수익 모델에 디지털 네트워크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구조였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협업 비즈니스’의 폭발적 성장이다. 루스테잉은 럭셔리 브랜드가 매스마켓과 협업하는 방식으로 인식 전환을 주도했다. 2015년 H&M과 진행한 협업 컬렉션은 런칭 당일 완판을 기록했다. 한정된 생산 물량은 빠르게 소진됐고, 발망의 브랜드 검색량은 24시간 만에 2,000% 이상 증가했다. 협업의 직접 수익보다도 장기적인 브랜드 자산 가치 상승이 훨씬 더 큰 경제적 효과를 낳았다. 이 협업을 계기로 발망은 글로벌 소비자 인지도에서 ‘니치 럭셔리’에서 ‘메인스트림 하이엔드’로 도약했다.

루스테잉 체제의 또 다른 핵심은 ‘디지털 자본화’였다. 발망은 SNS와 자체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브랜드 노출을 극대화하면서 광고비를 대폭 절감했다. 인플루언서와 셀러브리티를 중심으로 한 ‘발망 아미’ 네트워크가 자연스러운 바이럴 효과를 발생시켰다. 브랜드 홍보 예산의 40% 이상을 차지하던 전통적 광고비가 절반 이하로 줄었고, 대신 디지털 콘텐츠 제작과 커뮤니티 관리 비용으로 전환됐다.

이 변화는 수익 구조의 효율성을 근본적으로 높였다. 루스테잉은 브랜드의 고정비를 줄이는 대신, 디지털 자산을 생산비로 전환했다. 발망은 하나의 패션 하우스이자 미디어 기업처럼 작동했다. 콘텐츠가 상품의 전 단계가 되고, 상품이 콘텐츠를 재생산하는 순환 구조가 완성됐다. 패션 산업에서 ‘상품 중심의 매출 구조’가 ‘콘텐츠 중심의 순환 구조’로 이동한 사례로 꼽힌다.

24세 흑인 디자이너가 바꾼 파리, 올리비에 루스테잉과 발망의 시대. 사진=olivier_rousteingOlivier Rousteing 인스타 갈무리
24세 흑인 디자이너가 바꾼 파리, 올리비에 루스테잉과 발망의 시대. 사진=olivier_rousteingOlivier Rousteing 인스타 갈무리

라이선스 사업 역시 성장의 큰 축이었다. 루스테잉은 의류 외에도 향수, 액세서리, 아이웨어, 스포츠웨어 등으로 제품군을 확장했다. 메이훌라 자본의 투자 이후, 발망은 아시아 시장과 중동 시장에서의 매출 비중을 확대했다. 특히 중국과 한국, UAE에서의 온라인 매출 증가율이 두드러졌다. 럭셔리 소비가 디지털 전환을 본격화하던 시점과 맞물리며, 발망의 해외 라이선스 매출은 5년 만에 두 배 이상 증가했다.

발망의 재무 전략은 철저히 장기적 구조를 기반으로 했다. 루스테잉은 단기 매출보다 브랜드 자산 가치를 우선시했다. SNS 노출, 협업, 셀럽 파트너십, 팬덤 구축을 통한 브랜드 인지도 향상이 실제 매출로 전환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장기적으로 강력한 소비자 충성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발망은 단순히 옷을 판매하는 기업이 아니라, ‘디지털 문화 자산’을 관리하는 브랜드로 변모했다.

025년 봄/여름 시즌, 올리비에 루스테잉(Olivier Rousteing)은 발망(Balmain)을 통해 패션과 예술, 그리고 인간성을 직조해냈다. / 사진= Balmain,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025년 봄/여름 시즌, 올리비에 루스테잉(Olivier Rousteing)은 발망(Balmain)을 통해 패션과 예술, 그리고 인간성을 직조해냈다. / 사진= Balmain,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매출의 질적 변화도 주목된다. 루스테잉 체제 초반에는 여성복 중심 매출이 전체의 80% 이상을 차지했으나, 최근에는 남성복과 액세서리 비중이 40% 이상으로 확대됐다. 럭셔리 남성복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는 흐름을 발빠르게 포착한 결과였다. 또한 발망은 고가 핸드백 라인과 향수 컬렉션을 강화하면서, 반복 구매 가능한 상품군을 확보했다. 일회성 소비에서 구독형 소비로의 전환을 시도한 셈이다.

루스테잉 체제의 발망은 이익률 구조에서도 독특한 특징을 보였다. 하이패션 브랜드 평균 영업이익률이 15~18% 수준인 반면, 발망은 20%대를 유지했다. 낮은 광고비, 효율적 협업 전략, 그리고 디지털 기반 직판 구조가 원인이었다. 특히 루스테잉이 도입한 ‘런웨이 직판 모델’은 생산–홍보–판매의 시간을 단축시켰다. 쇼가 끝나자마자 온라인 스토어에서 동일 제품을 구매할 수 있는 구조는 발망의 회전율을 크게 높였다.

루스테잉이 제시한 경제 모델은 패션 산업 전체로 확산됐다. 브랜드가 콘텐츠를 생산하고, 소비자는 그 콘텐츠를 재유통하며, 그 과정에서 수익이 발생하는 구조는 ‘패션 미디어 이코노미’로 불린다. 럭셔리 브랜드는 이제 예술성과 상업성, 디지털과 전통을 병행해야 하는 복합적 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발망은 이 전환의 선두에 있었다.

그러나 고속 성장에는 구조적 리스크도 존재했다. 루스테잉이 구축한 경제 시스템은 스타 디자이너 개인의 영향력에 의존하는 면이 강했다. 브랜드의 문화 자본이 한 개인의 정체성과 결합될 경우, 후임 체제에서 동일한 경제 효율을 유지하기 어렵다. 실제로 발망은 루스테잉 퇴임 이후 단기적 매출 변동 가능성이 존재한다. 메이훌라와 경영진은 브랜드의 자산 구조를 안정화하기 위해 ‘크리에이티브 조직 중심 체제’로의 전환을 추진 중이다.

발망의 사례는 패션이 더 이상 예술 산업에 머물 수 없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현대 럭셔리는 문화 산업과 금융 산업의 경계에서 작동한다. 루스테잉 체제의 발망은 감각적 미학을 자본의 언어로 바꾸는 데 성공한 드문 사례다. 디자인이 매출로, 팬덤이 수익으로, SNS가 자산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디지털 시대 럭셔리 경제의 전형을 제시했다.

루스테잉이 떠난 이후 발망은 새로운 시스템 구축 단계에 들어섰다. 브랜드는 루스테잉이 남긴 자산, 즉 글로벌 인지도와 디지털 네트워크, 충성 고객층을 기반으로 지속 가능한 수익 구조를 설계하고 있다. 전통적인 오뜨 꾸뛰르 감성과 기술 기반 혁신을 결합한 하이테크 럭셔리, 그리고 순환형 패션 모델이 다음 단계의 키워드로 부상하고 있다.

발망의 3억 유로 매출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루스테잉의 경영 철학, 디지털 플랫폼의 확장, 팬덤 중심의 브랜드 전략이 결합된 결과다. 럭셔리 산업이 예술적 가치만으로 생존할 수 없는 시대에, 발망은 새로운 경제 질서를 실험한 하우스로 남게 됐다. 루스테잉의 시대는 끝났지만, 그가 설계한 경제 모델은 패션 산업의 미래 지형을 결정하는 참고서로 작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