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회복, 공격 경영, 그리고 외교 변수
[KtN 박준식기자]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기류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2024년 하반기부터다. 재고 조정이 마무리되고, 인공지능(AI) 서버 투자가 본격화되면서 메모리 수요가 빠르게 회복됐다. 그러나 업황 반등이 곧바로 기업 실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설비, 기술, 고객, 공급망이 동시에 맞물려야 했기 때문이다. 2025년 4분기 삼성전자 실적은 이 조건들이 한 시점에 수렴했음을 보여준다.
삼성전자는 2025년 4분기 연결기준으로 매출 93조원, 영업이익 20조원의 잠정 실적을 발표했다. 분기 기준 사상 최대치다. 전기 대비 매출은 8.06%, 영업이익은 64.34% 증가했고, 전년 동기 대비로는 매출 22.71%, 영업이익 208.17% 늘었다. 숫자만 놓고 보더라도 시장 예상치를 상당 폭 웃돈다.
다만 이번 실적은 일회성 호조라기보다, 지난 수년간 누적된 선택과 조정의 결과로 읽힌다. 반도체 업황 반등이라는 외부 환경, 고부가 메모리 중심의 내부 구조 전환, 경영 판단의 속도 조절이 한 흐름으로 겹쳤다.
매출보다 이익이 먼저 커진 구조
이번 분기 실적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지점은 매출 증가율보다 영업이익 증가율이 훨씬 가파르다는 점이다. 매출은 한 자릿수 증가에 그쳤지만, 영업이익은 두 자릿수 중반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반도체, 특히 메모리 부문에서 가격, 제품 구성, 가동률이 동시에 개선되며 수익성이 빠르게 확대된 결과로 풀이된다. 2023년 반도체 불황 국면에서 삼성전자는 감산과 투자를 병행했다. 실적은 급격히 악화됐지만, 공급 구조를 정비하고 차세대 공정과 고부가 제품 전환을 준비했다. 그 선택은 업황이 돌아선 이후 이익 레버리지로 작동했다.
2024년 하반기부터 AI 서버를 중심으로 메모리 수요가 빠르게 늘었고, 2025년 들어 DRAM과 NAND 평균판매단가는 본격적인 상승 국면에 진입했다. 여기에 HBM3E를 포함한 고대역폭 메모리 공급이 실적에 반영되면서 이익 구조는 한층 가벼워졌다. 업계에서는 반도체(DS) 부문 4분기 영업이익이 16~17조원 수준으로, 전체 영업이익의 80% 이상을 차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잠정 실적’이 주는 신호
이번 실적은 결산 이전에 공시되는 잠정치다. 사업부별 세부 수치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시장 반응이 빠른 이유는 삼성전자가 잠정 실적을 통해 축적해 온 신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2009년부터 국내 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분기 실적 예상치를 공개했고, 2010년에는 한국채택 국제회계기준(IFRS)을 선제 적용했다. 정보 공개 시점을 앞당기고 기준을 국제 수준에 맞춘 선택이었다. 숫자를 조기에 제시함으로써 실적의 방향과 속도를 함께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번에도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에서 사전 접수된 질문을 중심으로 경영 현황과 주요 쟁점에 대한 설명이 이뤄질 예정이다. 실적이 좋을수록 설명의 밀도를 높이겠다는 방식은 최근 삼성전자가 강조하는 소통 기조와 맞닿아 있다.
연간 실적이 보여주는 변화
2025년 연간 기준 삼성전자는 매출 332조8000억원, 영업이익 43조5000억원을 기록했다. 매출은 사상 최대, 영업이익은 3년 만에 40조원대를 회복했다. 2023년 반도체 불황으로 영업이익이 6조원대까지 내려갔던 시기와 비교하면 실적 구조가 달라졌음이 분명하다.
2024년이 회복의 해였다면, 2025년은 구조 변화의 해로 평가된다. 메모리 가격 반등에 기대는 방식에서 벗어나, 고부가 제품 비중을 높이며 이익의 질을 바꿨다. AI 서버용 메모리, HBM, 고용량 SSD 확대가 이를 뒷받침했다.
이 과정에서 설비투자도 이어졌다. 2025년 설비투자 규모는 약 47조원으로, 상당 부분이 반도체에 집중됐다. 단기 실적보다 기술 격차 유지와 차세대 수요 대응에 무게를 둔 선택으로 해석된다.
파운드리·전장, 남아 있는 과제
메모리 호황이 실적을 끌어올린 것은 분명하지만, 시장의 시선은 이미 다음 단계로 이동하고 있다. 반도체 사이클은 변동성을 동반한다. 실적의 지속성을 확보하려면 파운드리와 시스템 반도체, 전장 사업이 함께 성장 궤도에 올라야 한다.
파운드리 부문에서는 테슬라와의 장기 공급 계약이 상징적 사건으로 꼽힌다. 165억 달러 규모로 알려진 이 계약은 미국 텍사스 테일러 공장에서 AI 칩을 생산하는 내용이다. 그동안 수율과 고객 확보 문제로 부담이 컸던 테일러 공장에 명확한 역할이 부여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추가 고객 확보와 수율 안정이라는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전장 사업에서는 하만을 중심으로 포트폴리오 확장이 이어지고 있다. ZF의 ADAS 사업 인수를 통해 차량 전자 구조 전반을 아우를 수 있는 기술 기반을 확보했다. 단일 부품 공급을 넘어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 흐름에 대응하려는 전략이지만, 실질적인 수익 기여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평가도 함께 나온다.
이재용 회장 체제의 선택
실적 반등과 함께 경영 기조 변화도 감지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2025년 하반기 사법 리스크 해소 이후 글로벌 현장 행보를 늘렸다. 중국, 미국, 일본을 오가며 주요 고객사와 협력 가능성을 점검했고, 대형 투자와 인수·합병 논의에도 관여하는 흐름이 나타났다.
중국 방문에서는 계약 체결보다 반도체, 배터리, 전장 공급망 전반을 점검하는 데 무게가 실렸다. 불확실성이 커진 글로벌 환경에서 선택지를 넓히려는 성격이 강했다. 공격 경영으로의 전환이 속도보다 방향과 리스크 관리에 초점을 둔 형태라는 해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외교 환경이 만든 여지
이번 실적 국면은 기업 내부 요인만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최근 한국의 외교 환경 변화도 간접적인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주요국과의 관계 복원, 경제 협력 중심의 실리 외교 기조가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을 낮췄다는 시각이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외교 무대에서 산업과 경제가 전면에 배치되는 장면이 늘었다. 반도체와 배터리, 전장 산업은 외교와 분리되기 어렵다. 공급망과 투자, 규제 환경이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외교적 안정성은 기업 전략의 선택 폭을 넓히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숫자 이후를 읽는 시점
이번 4분기 실적은 삼성전자가 분기 영업이익 20조원대에 다시 올라섰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동시에 이 성과가 단기간에 만들어진 결과만은 아니라는 점도 함께 드러낸다. 한동안 위축됐던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다시 살아나고, 가격도 함께 오르는 흐름 속에서 제품 구성의 변화와 경영 판단, 대외 환경이 겹쳐 작용했다.
실적의 향방을 가를 기준도 점차 또렷해지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일시적인 가격 반등에 그치지 않고 고부가 제품 중심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가 먼저 관건이다. 파운드리 부문은 추가 고객을 확보하며 신뢰를 회복하는 단계로 들어설 수 있을지가 시험대에 올랐다. 전장 사업 역시 자동차 전자 분야에서 쌓아온 기반이 실적에 얼마나 반영될 수 있을지 지켜볼 대목이다.
이번 실적은 하나의 결론이라기보다 흐름이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에 가깝다. 숫자가 가리키는 방향은 확인됐다. 이 흐름이 이어질지는 다음 실적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