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샤르트르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공모 선정…푸른 유리와 원형에 ‘빛·생명·사랑·기쁨·평화’
2019년 세르누치, 2024~2025년 퐁피두, 2026년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이어진 방혜자 재조명

[KtN 박준식기자]프랑스 샤르트르 대성당(Cathédrale Notre-Dame de Chartres) 생피아 예배당(Chapelle Saint-Piat) 참사회실에는 방혜자의 원이 유리 위에 떠 있다. 깊은 청색과 청록을 바탕으로 주황과 노랑, 흰색이 중심에서 번지고, 다른 창에서는 푸른 원 안으로 작은 색의 입자가 모인다. 종이와 천연안료에서 오랫동안 다뤄온 원형과 방사형 구조가 투명한 유리 위에서 새로운 깊이를 얻었다. 햇빛이 들어오면 색은 유리를 지나 실내의 벽과 바닥까지 이어진다. 평생 종이와 안료, 흙과 천의 성질을 바꾸며 빛이 태어나는 조건을 찾아온 방혜자의 작업은 생애 후반 실제 자연광을 통과시키는 스테인드글라스와 만났다.

프랑스 샤르트르 대성당 생피아 예배당 참사회실에 설치된 방혜자의 스테인드글라스. 청색을 중심으로 원형과 방사형 구조를 구성한 네 창에는 ‘빛은 생명, 생명은 사랑, 사랑은 기쁨, 기쁨은 평화’로 이어지는 메시지가 담겼다. 2018년 공모를 통해 방혜자와 독일 파더보른의 페터스 스테인드글라스 공방(Glasmalerei Peters) 협업안이 선정됐으며, 작품은 2022년 설치됐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프랑스 샤르트르 대성당 생피아 예배당 참사회실에 설치된 방혜자의 스테인드글라스. 청색을 중심으로 원형과 방사형 구조를 구성한 네 창에는 ‘빛은 생명, 생명은 사랑, 사랑은 기쁨, 기쁨은 평화’로 이어지는 메시지가 담겼다. 2018년 공모를 통해 방혜자와 독일 파더보른의 페터스 스테인드글라스 공방(Glasmalerei Peters) 협업안이 선정됐으며, 작품은 2022년 설치됐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샤르트르와 방혜자의 인연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1년 프랑스로 건너간 방혜자는 학생 시절 순례길에서 샤르트르 대성당을 찾았고, 먼 길을 걸어 도착한 성당에서 중세 스테인드글라스와 빛이 만들어내는 색을 경험했다.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프레스코를 공부하고 이콘화와 판화, 스테인드글라스 등 여러 재료와 기법을 접하던 시기였다. 종이와 안료로 빛을 탐구하기 이전부터 색유리를 통과한 자연광의 경험이 방혜자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흐른 뒤 샤르트르에서 직접 창을 만들 기회가 찾아왔다. 생피아 예배당 복원과 대성당 보물실 재개관 사업을 진행하던 프랑스 상트르발드루아르 지역문화국(DRAC Centre-Val de Loire)은 2017년 참사회실의 현대식 마름모 유리 네 곳을 새로운 스테인드글라스로 교체하는 공모를 시작했다. 2018년 심사에서는 약 30개 제안 가운데 방혜자와 독일 파더보른의 페터스 스테인드글라스 공방이 함께 제출한 안이 선정됐다.

방혜자, 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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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트르의 오랜 스테인드글라스 전통을 품은 청색은 네 창의 중심색이 됐다. 그 위에는 방혜자가 1970년대 이후 발전시켜온 원형과 추상적인 선, 중심에서 주변으로 번지는 색의 흐름이 들어갔다. 중세 성당의 도상을 재현하기보다 오랫동안 자신의 회화에서 다듬어온 조형 언어를 유리로 옮겼다. ‘빛은 생명, 생명은 사랑, 사랑은 기쁨, 기쁨은 평화’로 이어지는 문장은 네 창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다.

회화에서 유리로 옮겨가면서 빛이 생기는 방식도 달라졌다. 1961년 ‘지심’에서는 유화 물감의 밝고 어두운 층이 빛의 깊이를 만들었고, 한지와 천연안료 작업에서는 색이 종이 섬유에 스며들며 안쪽에서 밝음이 올라왔다. 부직포를 활용한 작업에서는 앞뒤를 오가는 안료와 배채법이 색의 투과를 넓혔다. 샤르트르에서는 자연광 자체가 청색과 주황, 노랑의 유리를 통과한다. 종이와 안료 안에서 만들어지던 빛의 감각이 시간과 날씨에 따라 실제로 변하는 건축 공간으로 확장된 것이다.

방혜자, 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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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과 청색, 중심에서 주변으로 퍼지는 에너지는 방혜자의 회화에서 이어졌고, 이를 담는 물질은 유리로 바뀌었다. 작품은 벽에 걸린 독립적인 평면에서 벗어나 중세 건축과 자연광, 관람자의 이동이 함께 작동하는 공간의 일부가 됐다. 해의 위치와 날씨가 달라질 때마다 유리를 통과하는 색의 농도와 실내에 번지는 빛도 변한다. 빛을 표현해온 회화가 실제 빛과 함께 매 순간 달라지는 작업으로 넓어진 셈이다.

네 작품은 2022년 3월 샤르트르 대성당에 설치됐다. 방혜자는 같은 해 9월 15일 프랑스 오브나(Aubenas)에서 세상을 떠났다. 복원된 생피아 예배당과 대성당 보물실은 2024년 9월 21일 다시 문을 열었고, 방혜자의 네 창도 중세 성당의 오랜 역사와 현대미술이 만나는 공간에서 관람객을 맞기 시작했다.

방혜자, 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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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트르에 이르기 전 프랑스 미술계에서는 방혜자의 60년에 가까운 작업을 재료와 빛의 관계를 중심으로 다시 살피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파리 세르누치박물관(Musée Cernuschi)은 2019년 ‘Et la matière devint lumière: Bang Hai Ja’를 열어 초기 유화에서 종이와 천연안료, 후기 작업과 스테인드글라스 모형에 이르는 흐름을 한자리에 놓았다. 제목인 ‘그리고 물질은 빛이 되었다’는 방혜자가 평생 이어온 재료 탐구를 압축한다.

세르누치박물관에서 바라본 방혜자는 한국과 프랑스의 현대미술이 교차하는 위치에 있다. 1950년대 한국 현대미술이 형성되던 시기에 초기 추상을 시작했고, 1961년 파리 정착 이후 에콜 드 파리(École de Paris)의 미술환경과 만났다. 1968년부터 1976년까지 한국에 머문 시기에는 한지와 한국의 재료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고, 다시 프랑스로 건너간 뒤에도 종이와 천연안료를 작업의 중요한 축으로 이어갔다.

바닥에 작업을 펼쳐놓고 안료를 다루는 방혜자. 후기에는 종이와 부직포를 수평으로 놓고 천연안료가 섬유에 스며들고 번지는 과정을 회화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파리 세르누치박물관은 2019년 ‘Et la matière devint lumière: Bang Hai Ja’를 통해 약 60년에 걸친 재료 연구와 빛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바닥에 작업을 펼쳐놓고 안료를 다루는 방혜자. 후기에는 종이와 부직포를 수평으로 놓고 천연안료가 섬유에 스며들고 번지는 과정을 회화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파리 세르누치박물관은 2019년 ‘Et la matière devint lumière: Bang Hai Ja’를 통해 약 60년에 걸친 재료 연구와 빛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한국에서의 작업은 당시 단색화 작가들이 다루던 물성과 반복, 종이에 대한 관심과 일부 접점을 만들었다. 방혜자의 회화는 이후 천연안료와 루시용의 흙, 부직포, 원형과 우주의 이미지까지 영역을 넓히며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구축했다. 파리와 서울이라는 두 미술환경은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관계보다 재료와 기술, 미감이 계속 축적되는 토대가 됐다.

방혜자가 세상을 떠난 뒤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퐁피두센터(Centre Pompidou)의 소장과 전시는 작업사의 또 다른 축을 만들었다. 현재 퐁피두센터 소장품 데이터베이스에는 방혜자 작품 14점이 등록돼 있다. 1960년 ‘Au coeur de la Terre II’를 시작으로 1962년 ‘무제’, 1970년 ‘무제’, 1972년 ‘부활의 노래’, 1975년 ‘Cérémonie du dragon divin’, 1989년 ‘Univers’, 2000년 ‘Envols 2’, 2009년 ‘Lumière de la terre’, 2020년 ‘빛의 기쁨 I’과 ‘Naissance de lumière’까지 반세기를 넘는 시간이 한 컬렉션 안에 이어진다.

방혜자, 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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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점은 모두 2024년 퐁피두센터 컬렉션에 편입됐다. 이 가운데 13점은 방혜자재단 기증으로, 2020년 ‘Naissance de lumière’는 구입을 통해 소장됐다. 초기 추상과 종이, 천연안료와 부직포, 후기의 원형까지 한 작가의 재료와 빛이 변화해온 과정을 프랑스 국립 컬렉션 안에서 연속적으로 살필 수 있는 구성이 만들어졌다.

2024년 6월 25일부터 2025년 3월 10일까지 열린 ‘Bang Hai Ja au Centre Pompidou’는 소장 작품을 중심으로 방혜자의 작업을 다시 연결했다. 1960년 초기 추상에서 2020년 작품까지 반세기가 넘는 변화가 한 공간에 놓였고, 전시에 맞춰 발간된 도록에는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과 세르누치박물관 연구진의 글이 함께 실렸다.

방혜자, 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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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피두센터 소장품은 이후 다시 여러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1988년 제작한 ‘무제’ 3폭화는 현재 상하이 웨스트번드미술관(West Bund Museum)의 ‘Reinventing Landscape: Highlights of the Centre Pompidou Collection’에 출품돼 있으며 전시는 2026년 10월 18일까지 이어진다. 퐁피두센터 컬렉션에 들어간 방혜자의 작품이 파리의 소장고에 머무르지 않고 중국과 한국의 전시공간으로 이동하면서 사후의 작업사는 국제적인 공공 컬렉션의 순환 안에서 새롭게 이어지고 있다.

2026년 4월 24일부터 9월 27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에서 열린 ‘방혜자―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도 초기부터 말년까지의 작업을 다시 연결했다. ‘지심’, ‘햇님 나들이’, ‘정관묘오’, ‘우주의 빛’, ‘하늘의 땅’ 등을 비롯해 주요 작품 67점과 아카이브 자료 200여 점이 전시에 나왔다. 한불수교 140주년을 맞아 프랑스에 있던 작품들도 함께 들어오면서 초기 추상, 한지와 천연안료, 부직포와 후기 원형을 하나의 작업사 안에서 살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2026년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에서 열린 ‘방혜자-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 전시 전경. 초기 추상에서 한지와 천연안료, 부직포와 후기의 빛 작업까지 주요 작품 67점과 아카이브 자료 200여 점을 통해 방혜자의 작업 세계를 조명했다. 전시는 2026년 4월 24일부터 9월 27일까지 열렸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2026년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에서 열린 ‘방혜자-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 전시 전경. 초기 추상에서 한지와 천연안료, 부직포와 후기의 빛 작업까지 주요 작품 67점과 아카이브 자료 200여 점을 통해 방혜자의 작업 세계를 조명했다. 전시는 2026년 4월 24일부터 9월 27일까지 열렸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빛의 화가’라는 수식은 방혜자의 긴 작업을 여는 입구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빛은 하나의 주제를 넘어 재료를 선택하고 제작방식을 바꾸는 원리로 작동해왔다. 유화와 사포가 만든 초기의 거친 표면, 한국에서 만난 닥지, 천연안료와 루시용의 흙, 부직포와 배채법, 원형과 미세한 빛의 입자, 마지막에는 자연광을 통과시키는 유리까지 재료와 형식이 계속 이동했다.

한국과 프랑스의 관계도 방혜자의 재료 안에서 구체화된다. 1961년 파리로 건너간 뒤 새로운 미술환경과 기술을 접했고, 한국에 머물며 닥지를 작업에 들였으며, 다시 프랑스로 돌아간 뒤에도 종이의 물성을 계속 발전시켰다. 프랑스 남부 루시용의 흙은 닥지와 만났고, 유럽 중세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오랫동안 다뤄온 원형과 우주의 구조가 들어갔다. 두 지역에서 얻은 물질과 경험은 서로 겹치며 방혜자만의 빛으로 변했다.

힐리언스 선마을의 명상공간에 설치된 방혜자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자연과 미술이 만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힐리언스 선마을의 명상공간에 설치된 방혜자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자연과 미술이 만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한국 현대미술 초기 추상에서 활동한 여성 미술가라는 위치도 작업사의 중요한 축이다. 1937년 태어난 방혜자는 한국 추상미술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던 시기에 ‘지심’을 제작했고 1961년 파리로 건너가 활동영역을 넓혔다. 2026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에서 방혜자를 한국 현대미술의 초기 추상을 전개한 주요 여성 작가로 다시 조명한 것도 당시 미술계의 지형과 작가의 위치를 함께 살피는 계기가 됐다.

2019년 세르누치박물관, 2022년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설치, 2024~2025년 퐁피두센터 전시와 소장, 2026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은 서로 다른 장소에 흩어져 있던 작품과 기록을 공공 컬렉션과 연구, 전시 안에서 다시 연결해왔다. 방혜자는 1960년대부터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60년 넘게 작업했고, 최근의 전시와 소장은 그 긴 시간을 한 작가의 작업사로 보다 촘촘하게 구성하는 과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방혜자, 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방혜자, 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샤르트르의 네 창은 이 긴 시간의 끝자락에서 다시 빛을 통과시킨다. 1961년 ‘지심’에서는 짙은 유화 물감 사이로 밝음이 떠올랐고, 한지와 천연안료를 거치면서 색은 종이의 섬유 안으로 스며들었다. 부직포에서는 안료가 앞뒤를 오갔고 후기의 원에서는 중심에서 둘레로 빛이 퍼졌다. 샤르트르에서는 태양빛이 청색과 주황, 노랑의 유리를 직접 지나 건축 내부로 들어온다.

방혜자가 평생 다룬 빛은 물감에서 종이로, 흙에서 천으로, 다시 유리로 이동하며 매번 다른 물성을 얻었다. 샤르트르의 창과 퐁피두센터·세르누치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에 남은 작품들은 한 작가가 빛을 어떻게 그렸는지를 넘어 빛이 생겨나는 조건을 어떻게 바꾸어왔는지를 보여준다. 한국 초기 추상에서 시작해 프랑스와 한국의 재료와 미학을 오가며 쌓아온 60여 년의 작업은 마지막까지 하나의 형식에 머물지 않고, 빛을 받아들이고 통과시키는 새로운 물질을 향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