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색·청록의 여러 겹 사이 응축된 따뜻한 중심…가는 선이 사방으로 이어지는 2020년작
‘하늘의 땅’의 거대한 원에서 사각 캔버스 안의 빛으로…60년 탐구가 모인 후기 대표작

[KtN 박준식기자]방혜자의 2020년작 ‘빛의 기쁨 I’은 사각형의 한가운데에서 시작한다. 따뜻한 주황빛이 중심에 응축되고, 그 주위를 남색과 청록 계열의 원이 여러 겹 감싼다. 중심과 둘레 사이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가느다란 선이 이어진다. 각각의 선은 미세하게 방향과 간격을 달리하며 바깥으로 퍼지고, 125.3×125㎝의 정사각형 안에 빛의 파동과 같은 움직임을 만든다.

방혜자, ‘빛의 기쁨 I’, 2020, 캔버스에 닥지·천연안료, 125.3×125㎝,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퐁피두센터 소장. 주황빛 중심을 남색과 청록의 원이 여러 겹 감싸고 가느다란 선이 둘레로 뻗으며 빛의 파동을 만든다. 2024년 방혜자재단 기증을 통해 퐁피두센터 컬렉션에 편입된 후기 대표작이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방혜자, ‘빛의 기쁨 I’, 2020, 캔버스에 닥지·천연안료, 125.3×125㎝,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퐁피두센터 소장. 주황빛 중심을 남색과 청록의 원이 여러 겹 감싸고 가느다란 선이 둘레로 뻗으며 빛의 파동을 만든다. 2024년 방혜자재단 기증을 통해 퐁피두센터 컬렉션에 편입된 후기 대표작이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작품의 시선은 가장 안쪽의 주황빛에 먼저 머문다. 중심은 밝고 따뜻하다. 노란빛과 주황빛이 서로 겹치면서 작은 태양이나 뜨겁게 응축된 생명의 씨앗을 연상시키고, 그 주변으로 색의 온도가 서서히 달라진다. 짙은 남색과 청록이 겹겹이 이어지면서 중심의 밝음은 한층 깊어진다.

색은 명확한 선 하나로 구획되기보다 여러 층을 거치며 바뀐다. 따뜻한 중심에서 짙은 청색으로 이동하고, 다시 청록과 푸른색이 겹치며 둘레를 형성한다. 하나의 원 안에서도 밝음과 어둠, 따뜻함과 차가움이 여러 단계로 나뉜다. 색의 이동 자체가 작품의 깊이를 만든다.

가느다란 선은 이 색층에 생명력을 더한다. 중심 가까이에서 시작한 선들은 사방으로 길게 이어지고, 일부는 촘촘하게 모이며 다른 부분에서는 간격이 넓어진다. 일정한 굵기와 간격으로 반복되는 기하학적 패턴보다 손의 리듬이 살아 있는 구조다. 미세한 차이가 원 전체에 떨림을 만들고, 고정된 동심원에 끊임없이 움직이는 감각을 더한다.

그래서 ‘빛의 기쁨 I’의 원은 단단하게 닫힌 형태보다 계속 진동하는 원에 가깝다. 중심은 하나지만 수많은 선이 바깥을 향하고, 색도 하나의 띠에서 다음 띠로 이동한다. 시선은 안쪽에 모였다가 가는 선을 따라 바깥으로 나아가고, 다시 짙은 청록의 둘레를 지나 중심으로 돌아온다.

정사각형과 원의 관계도 작품의 긴장을 만든다. 캔버스의 외곽은 네 변으로 안정된 구조를 이루고, 내부의 원은 시작과 끝이 이어지는 순환의 형태를 만든다. 사각은 작품을 붙잡고 원은 그 안에서 움직인다. 서로 다른 두 기하학적 구조가 겹치면서 중심으로 모이는 힘과 바깥으로 퍼지는 힘이 동시에 살아난다.

방혜자는 오래전부터 원을 중요한 조형언어로 다뤘다. 1993년 ‘정관묘오(靜觀妙悟)’에서는 작은 정사각형 안에 적갈색 원과 서체를 배치해 내면의 집중을 만들었다. 당시의 원은 고요한 응시와 사유가 머무는 장소에 가까웠다.

2011년 ‘하늘의 땅’에서는 원이 작품 내부의 형상을 넘어 지름 179㎝의 지지체 전체로 커졌다. 밝은 중심을 둘러싸고 주황·적색과 청록의 색띠가 겹쳤으며 가느다란 선이 둘레를 향해 퍼졌다. 관람자의 몸과 마주할 정도로 커진 원은 하늘과 땅, 우주와 생명의 에너지를 하나의 순환 구조로 끌어안았다.

2020년 ‘빛의 기쁨 I’에서는 원이 다시 사각형 안으로 들어온다. 크기가 줄어든 대신 중심의 밀도는 더욱 강해진다. 지지체 전체를 원으로 만들었던 ‘하늘의 땅’과 달리 정사각형 내부에 원을 집중시키면서 밝은 중심과 짙은 외곽의 관계가 더욱 또렷해진다.

2014년 ‘빛에서 빛으로’와의 차이도 크다. ‘빛에서 빛으로’에서는 넓은 푸른 영역 사이로 짙은 세로 띠가 이어졌고, 그 안에 주황과 붉은색의 작은 입자들이 수없이 흩어졌다. 거대한 하나의 빛보다 작은 밝음들이 모여 세로의 흐름을 만들었다.

‘빛의 기쁨 I’에서는 흩어졌던 빛이 다시 중심을 얻는다. 작은 입자들은 원의 안쪽으로 모이고, 밝음은 주황빛 핵으로 응축된다. 2014년 작품에서 세로로 이어지던 에너지가 2020년에는 중심과 둘레를 오가는 파동으로 바뀐 셈이다.

방혜자의 후기 회화가 원형 하나를 반복한 작업과 다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늘의 땅’에서는 원 자체가 작품의 몸이 됐고, ‘빛에서 빛으로’에서는 수직의 흐름과 작은 입자가 중심이 됐다. ‘빛의 기쁨 I’에서는 다시 원을 가져오면서 중심의 밝음과 색의 밀도를 한층 세밀하게 나눴다. 같은 빛을 다루면서 작품마다 빛이 모이고 퍼지는 방식이 달라졌다.

닥지와 천연안료는 이런 변화 속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방혜자는 1970년대부터 한지의 물성을 깊게 탐구했고 1990년대부터 천연안료를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종이는 안료를 표면에만 붙잡는 바탕보다 색을 섬유 안으로 받아들이는 재료가 됐다.

방혜자, ‘빛의 기쁨 I’, 2020, 캔버스에 닥지·천연안료, 125.3×125㎝,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퐁피두센터 소장. 주황빛 중심을 남색과 청록의 원이 여러 겹 감싸고 가느다란 선이 둘레로 뻗는다. 중심의 밝음과 색의 파동을 사각의 공간 안에 응축한 방혜자의 후기 대표작으로, 2024년 방혜자재단 기증을 통해 퐁피두센터 컬렉션에 들어갔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방혜자, ‘빛의 기쁨 I’, 2020, 캔버스에 닥지·천연안료, 125.3×125㎝,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퐁피두센터 소장. 주황빛 중심을 남색과 청록의 원이 여러 겹 감싸고 가느다란 선이 둘레로 뻗는다. 중심의 밝음과 색의 파동을 사각의 공간 안에 응축한 방혜자의 후기 대표작으로, 2024년 방혜자재단 기증을 통해 퐁피두센터 컬렉션에 들어갔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빛의 기쁨 I’에서도 닥지는 여러 색을 품는다. 청록과 남색은 종이 위에서 균일하게 평평해지기보다 미세한 농담을 만들고, 안료가 짙게 머문 부분과 옅게 스민 부분에서 서로 다른 깊이가 생긴다. 가느다란 선 사이로 종이와 색층의 밝음이 드러나면서 원 전체에 미세한 광감이 형성된다.

천연안료의 성질은 중심의 주황빛에서도 작동한다. 선명한 한 가지 주황으로 닫히기보다 노랑과 적색, 주황의 여러 농도가 서로 겹친다. 색 자체가 안쪽에서 따뜻하게 밝아지는 듯한 깊이를 갖는다.

방혜자의 빛은 오랜 시간 재료와 함께 변했다. 1961년 ‘지심’에서는 거칠고 짙은 유화의 마티에르 사이에서 밝은 부분이 올라왔다. 1970년대 이후 닥지를 만나면서 색은 종이 안으로 스며들었고, 1990년대 천연안료와 흙의 입자는 색의 깊이를 넓혔다. 2000년대 부직포 작업에서는 안료와 섬유가 만나며 빛이 넓은 공간으로 퍼졌다.

‘빛의 기쁨 I’에서는 그 오랜 물질 탐구가 중심과 둘레의 관계 속에 압축된다. 종이와 안료, 가는 선, 여러 겹의 색이 모두 한가운데의 밝음을 향해 모이고 다시 바깥으로 퍼진다. 빛을 하나의 색으로 칠하는 방식보다 작품 전체의 구조가 밝음을 만들어낸다.

작품 제목에 들어간 ‘기쁨’도 색과 구성에서 구체적인 감각을 얻는다. 주황빛 중심에는 따뜻한 온도가 있고, 주변을 둘러싼 청록과 남색은 그 밝음을 깊이 받아낸다. 강한 흰빛보다 여러 색을 통과해 나온 밝음이 중심에 자리한다.

그 밝음은 고요하면서 동시에 움직인다. 원의 중심은 안정돼 있지만 수많은 가는 선은 끊임없이 바깥으로 향한다. 한곳에 응축된 에너지와 확산하는 에너지가 동시에 존재하면서 작품에는 정적인 명상과 생동하는 리듬이 겹친다.

방혜자의 후기 작품에서 빛은 생명과도 긴밀하게 연결됐다. 원형과 사선, 불꽃과 날개를 연상시키는 형태를 통해 빛과 생명의 에너지를 압축했고, 우주의 광대한 밝음에서 작은 빛의 입자까지 크기를 자유롭게 오갔다. ‘빛의 기쁨 I’에서는 작은 중심이 거대한 원의 질서를 만들면서 극미의 밝음과 넓은 우주적 공간이 함께 느껴진다.

중앙의 주황빛을 생명의 씨앗처럼 읽을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주 작은 중심에서 수많은 선이 시작되고, 색의 파동은 점점 넓어진다. 하나의 밝음이 주변으로 에너지를 전달하고 다시 전체 원을 형성하는 구조가 생명의 생성과 확장에 가까운 리듬을 만든다.

작품은 우주를 구체적인 천체나 풍경으로 묘사하는 대신 원과 색, 선만으로 공간을 넓힌다. 짙은 남색은 깊이를 만들고, 청록은 중심과 외곽을 이어주며, 주황빛은 가장 안쪽의 에너지를 붙잡는다. 색 자체가 우주의 거리와 온도를 대신한다.

‘하늘의 땅’과 함께 놓으면 방혜자의 원형이 지나온 9년의 변화가 더욱 또렷하다. 2011년 작품에서는 원의 가장자리까지 색과 선이 넓게 퍼지면서 지지체 전체가 우주처럼 열렸다. 2020년에는 사각형 안에 원을 다시 넣고 중심과 둘레의 관계를 한층 촘촘하게 조직한다.

이 변화에는 방혜자의 작업이 말년까지 계속 움직였다는 사실이 담겨 있다. 오랫동안 사용한 원과 닥지, 천연안료를 유지하면서도 작품의 구조와 색의 밀도를 계속 바꾸었다. 원은 반복되는 표식보다 매번 다른 빛의 상태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기능했다.

‘빛의 기쁨 I’은 2024년 방혜자재단의 기증을 통해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퐁피두센터 컬렉션에 들어갔다. 1972년 ‘부활의 노래’를 비롯해 여러 시기의 작품과 함께 편입되면서 퐁피두센터 안에서도 방혜자의 초기와 중기, 후기 작업을 연결할 수 있는 작품군이 형성됐다. ‘빛의 기쁨 I’은 그 가운데 말년의 원형과 천연안료 작업을 보여주는 중요한 위치에 놓인다.

2020년이라는 제작 시점도 작품의 무게를 더한다. 방혜자는 1937년 태어나 202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60년 넘게 빛을 다뤘다. ‘빛의 기쁨 I’에는 젊은 시절의 거친 유화에서 한지, 천연안료, 흙과 부직포를 거쳐 축적된 재료의 시간이 함께 들어 있다.

초기의 빛이 어둠 속에서 발견되는 밝음에 가까웠다면 후기의 빛은 작품 전체의 질서를 만든다. 중심은 빛을 품고, 원은 그 빛을 감싸며, 가는 선은 에너지를 바깥으로 전달한다. 종이와 안료의 물성까지 그 흐름에 참여한다.

1961년 ‘지심’의 짙은 갈색과 청색 사이에서 시작된 밝음은 약 60년 뒤 ‘빛의 기쁨 I’에서 작품의 중심으로 이동한다. 거친 물감의 틈에서 모습을 드러내던 빛이 이제 색과 선, 원 전체를 조직하는 핵이 된 것이다.

방혜자가 평생 붙들었던 빛은 이 작품에서 따뜻한 중심과 깊은 청록, 수많은 가는 선의 파동으로 응축된다. 주황빛의 작은 핵에서 시작한 에너지가 남색과 청록의 여러 겹을 지나 사방으로 퍼지고, 다시 원의 중심으로 시선을 불러들인다. ‘빛의 기쁨 I’은 빛을 바라보는 회화를 넘어 빛이 작품 전체의 질서와 호흡을 만드는 단계에 도달한 방혜자 후기 회화의 한 정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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