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과 협력 사이, 문화 주권을 향한 동남아의 실험

[KtN 증권부]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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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전성진기자]인도네시아 게임 산업은 성장의 정점을 향해 가고 있다. 시장 규모는 2024년 15억 달러를 넘어섰고, 이용자 수는 1억 명에 이른다. 모바일 중심 구조, 젊은 인구 비중, 전자결제의 확산이 결합하며 아시아에서 가장 역동적인 산업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성장에는 두 개의 흐름이 공존한다. 하나는 글로벌 기업이 주도하는 외형적 확장이고, 다른 하나는 현지 창작자와 정부가 추진하는 자립의 시도다. 산업의 방향은 이 두 흐름이 어디에서 균형을 이루는가에 달려 있다.

현재 인도네시아 게임 시장의 절반 이상은 외국 기업이 차지하고 있다. 앱스토어와 구글플레이 같은 글로벌 유통망이 결제와 노출을 통제하며, 현지 개발사는 그 안에서 생존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게임개발자협회(AGI)는 “국내 게임 IP 점유율이 10퍼센트 미만”이라고 분석했다. 해외 플랫폼 의존도가 높은 산업 구조는 수익 배분뿐 아니라 창작 방향에도 영향을 준다. 글로벌 시장에 맞춘 장르와 비주얼이 우선되며, 현지 문화와 언어가 담긴 콘텐츠는 주목받기 어렵다. 이러한 구조는 산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문화적 종속을 심화시킨다.

창조경제청(BEKRAF)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로컬 IP 100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프로젝트의 목표는 2030년까지 자국 창작 기반의 게임 100개를 상용화하는 것이다. 정부는 개발비 지원, 글로벌 마케팅, 수출용 번역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BEKRAF 관계자는 “게임은 문화 주권의 핵심이며, 자국 IP 확보가 국가 경쟁력으로 직결된다”고 말했다. 이미 자카르타와 반둥, 욕야카르타를 중심으로 인디 개발 스튜디오가 증가하고 있으며, 지역별 창작 허브가 형성되고 있다. 정부의 정책은 단순한 지원을 넘어, 산업 생태계의 균형을 회복하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시장 내부에서는 협력형 모델이 새로운 해법으로 주목받고 있다. 한국, 일본, 싱가포르 기업과 현지 개발사가 공동 제작하는 형태가 늘고 있으며, 기술·스토리·IP를 공유하는 프로젝트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2024년 넷마블은 인도네시아 대학생 개발팀과 공동으로 신화 기반 RPG ‘Garuda Saga’를 제작했다. 이 게임은 발리 전설과 자바 신화를 소재로 삼아, 현지 문화 자원을 디지털 서사로 전환한 사례로 평가받았다. 공동 개발은 단순한 기술 교류를 넘어 문화적 협업으로 확장되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관계자는 “한국이 가진 제작 시스템과 인도네시아가 가진 문화 원형이 결합되면 세계 시장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콘텐츠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산업 자립의 또 다른 핵심은 인재 양성이다. 인도네시아 주요 대학은 최근 게임 디자인, 프로그래밍, 비즈니스 과정을 신설하며 교육 구조를 확장했다. 빈누스대학교 게임학과장은 “산업의 성장 속도를 맞추려면 현지 인력의 질적 향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밝혔다. 정부는 ‘디지털 크리에이터 육성 프로젝트’를 통해 전국 15개 대학에 게임 관련 교육과정을 확대하고 있다. 또한 교육부는 2026년까지 전국 10만 명의 청년 개발자를 양성하는 목표를 제시했다. 인재 양성은 산업의 자립을 뒷받침하는 가장 현실적인 전략으로 평가된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인도네시아 게임 시장의 국내 투자 비중은 2019년 20퍼센트에서 2024년 35퍼센트로 늘었다. 현지 벤처캐피털 기업 Kejora Capital과 Alpha JWC Ventures는 게임 스타트업에 적극 투자하고 있으며, 정부도 세금 감면 정책을 통해 투자 유인을 확대하고 있다. 자국 자본이 시장에 머물기 시작한 것이다. 금융 전문가 다니엘 수디르만은 “투자가 늘어난다는 것은 산업의 신뢰가 회복되고 있다는 신호”라고 말했다. 이러한 흐름은 향후 글로벌 자본에 대한 협상력 강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산업의 성장과 함께 사회적 과제도 커지고 있다. 게임 과몰입, 미성년자 결제 문제, 노동 착취형 스트리밍 등 부작용이 드러나고 있다. 자카르타대 사회학과 연구팀은 “산업의 속도가 사회 제도보다 빠르다”고 분석했다. 정부는 청소년 보호 기준 강화, 노동시간 제한, 스트리머 수익 신고 의무화 등을 포함한 법안을 준비 중이다. 산업의 지속 가능성은 기술보다 제도적 기반에 달려 있다는 경고가 이어지고 있다.

인도네시아가 향후 10년 동안 맞이할 최대 과제는 ‘균형’이다. 외국 자본과 기술을 흡수하면서도, 문화적 주권과 산업 자율성을 지키는 일이다. 완전한 자급은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선택적 협력과 전략적 분업은 가능하다. 게임 산업은 이미 국가 경제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했으며, 앞으로의 방향은 ‘누가 시장을 소유하느냐’보다 ‘어떤 가치로 성장하느냐’가 핵심이 될 것이다.

한국의 경험은 인도네시아가 이 균형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참고할 만한 모델로 평가된다. 한국은 2000년대 초반 외국 게임 수입 의존 구조에서 벗어나 자국 IP 중심의 산업으로 전환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인도네시아도 그와 비슷한 경로를 밟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글로벌협력센터는 “인도네시아는 단순한 시장이 아니라 새로운 파트너”라며 “문화 교류형 산업 모델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다”고 밝혔다.

인도네시아 게임 산업의 미래는 단일한 방향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정부의 정책, 기업의 전략, 이용자의 문화가 교차하며 복합적인 경로를 만든다. 확실한 것은, 게임이 더 이상 오락의 한계를 넘어 사회·경제·문화의 전면에 서게 되었다는 점이다. 산업의 다음 단계는 ‘규모의 성장’이 아니라 ‘가치의 성장’이다. 창작자와 이용자가 함께 이익을 공유하고, 국가와 기업이 공정한 시스템을 구축할 때, 인도네시아는 진정한 의미의 디지털 강국으로 자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