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청색의 산과 따뜻한 건축물, 번지는 수면과 넓은 여백…자연의 규모와 인간의 생활을 함께 담은 수채화
[KtN 박준식기자]짙은 푸른 산이 마을 뒤편을 크게 감싸고, 호수는 작품 아래쪽으로 넓게 펼쳐진다. 물가를 따라 이어진 집들과 교회 첨탑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완만하게 내려가고, 거대한 산의 능선은 마을 전체를 둘러싼다. 조운호의 수채화 ‘할슈타트(Hallstatt) 마을’은 오스트리아의 호숫가 풍경을 산과 물, 건축물의 크기와 색의 차이로 풀어낸 작품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연과 마을의 비율이다. 오른쪽에는 노란 외벽과 푸른 지붕을 얹은 건물이 가까이 자리하고, 중앙에는 가늘고 높은 교회 첨탑이 솟아 있다. 뒤편 산은 건축물보다 훨씬 넓은 면적을 차지한다. 사람의 생활 공간은 분명하게 남아 있지만 자연의 규모를 밀어내지 않는다.
마을을 살리면 산이 죽고, 산을 살리면 마을이 묻히는 긴장은 작품 전체의 구도에 스며 있다. 가까운 건물의 형태를 살리면서도 뒤편 산의 크기를 줄이지 않았고, 산의 존재감을 키우면서도 물가의 집과 교회를 작은 부속물처럼 밀어내지 않았다. 자연과 생활 공간의 균형은 설명보다 화면 안의 비율과 거리에서 드러난다.
색은 청색과 녹색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산에는 남청과 푸른색, 보랏빛이 겹치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청록과 녹색의 비중이 커진다. 호수에서는 다시 옅은 청색과 회청색이 넓게 번진다. 같은 푸른 계열을 반복하면서도 농도와 붓질을 달리해 산과 물, 하늘의 성질을 나눴다.
산 정상과 암벽에는 종이의 흰색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밝은 부분을 흰 물감으로 덮기보다 색을 비워두면서 눈과 바위의 빛을 만들었다. 짙은 청색은 능선과 골짜기를 따라 끊어지듯 내려오고, 일부에서는 붓질의 경계가 물과 함께 풀린다.
왼쪽 뒤편의 보랏빛 산은 중심의 큰 산보다 색이 옅고 윤곽도 부드럽다. 가까운 건물과 호수, 중간의 숲, 뒤편 산이 서로 다른 농도로 겹치면서 자연스럽게 깊이가 생긴다. 원근을 선으로 설명하기보다 색의 밀도 차이로 거리를 만드는 방식이다.
마을로 내려오면 색의 온도가 달라진다. 노란 외벽과 갈색 목조 건물, 붉은 지붕과 푸른 지붕이 차가운 산색과 대비된다. 따뜻한 색은 건물군과 물가 주변에 집중되고 산의 청색까지 번지지 않는다. 자연과 건축물의 영역이 색으로도 분리된다.
교회 첨탑은 호수의 수평선과 산의 사선 사이에서 또렷한 수직선을 만든다. 낮게 이어지는 집들 사이에서 가늘게 솟은 첨탑은 마을의 중심을 잡지만 산의 높이와 경쟁하지 않는다. 거대한 자연 속에서 사람이 만든 구조물이 차지하는 크기가 그대로 유지된다.
오른쪽의 건물들은 가까운 거리만큼 형태가 비교적 구체적이다. 창문과 발코니, 지붕선이 확인되지만 세부를 끝까지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건축물의 특징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에서 선을 정리하고, 주변 숲과 물의 번짐으로 다시 연결한다.
호수에 이르면 붓질의 성격이 달라진다. 산과 건물은 수면에서 정확한 형태로 반복되지 않는다. 청색과 녹색, 노란빛이 아래로 번지면서 경계가 풀리고, 일부는 넓은 여백 속에서 거의 사라진다. 물 위의 반사는 대상을 그대로 복제하기보다 색과 빛이 흔들리는 상태에 가깝다.
호수 왼쪽과 아래쪽에는 흰 부분이 넓게 남아 있다. 색을 채우지 않은 자리가 수면의 밝기와 고요를 만들고, 주변으로 옅은 청색과 녹색이 스며든다. 건물과 색이 밀집한 오른쪽과 달리 왼쪽 수면은 충분히 비워져 있다. 밀도 높은 마을과 넓은 물 사이의 차이가 작품 전체의 호흡을 조절한다.
산과 하늘, 물과 마을은 서로 분리된 덩어리로 머물지 않는다. 산에서는 청색이 깊게 겹치고, 숲에서는 녹색과 황색이 섞이며, 호수에 이르면 농도가 옅어지면서 경계가 풀린다. 번지고 스며드는 수채화의 성질이 네 영역을 하나의 풍경으로 이어준다.
선명한 색과 부드러운 여백의 대비도 또렷하다. 마을의 지붕과 벽은 비교적 분명한 색을 유지하는 반면 호수와 하늘은 느슨하게 풀린다. 건축물은 여행지에서 남은 구체적인 기억에 가깝고, 물과 공기는 시간이 지나며 희미해지는 감각처럼 퍼져 있다.
조운호의 자연 수채화에서 산과 물은 반복적으로 등장해왔다. 설악산과 아이거봉, 브리엔츠호, 블레드 호수에서는 자연의 규모와 수면의 번짐, 빛에 따라 달라지는 색을 다뤘다. 할슈타트에서는 자연만큼이나 사람이 머무는 공간이 전면에 들어온다.
마테호른 작업에서 설원을 지나는 철도와 열차가 이동을 보여줬다면 할슈타트에서는 집과 교회가 물가를 따라 자리를 잡는다. 움직임보다 정주가 앞서는 풍경이다. 산 아래로 이어진 집들은 자연을 가로지르지 않고 호수의 가장자리를 따라 놓여 있다.
블레드 호수와 비교해도 차이가 있다. 블레드에서는 설산과 호수, 섬과 종탑이 비교적 넓은 간격으로 놓였다. 할슈타트에서는 건축물이 오른쪽에 밀집해 있고 산은 그 뒤를 크게 감싼다. 자연과 사람이 함께 있다는 공통점은 유지되지만, 할슈타트에서는 생활 공간의 밀도가 훨씬 높다.
산은 크지만 뒤에 있고, 마을은 작지만 가까이 있다. 호수는 두 영역 사이를 넓게 비우면서 자연과 인간의 공간을 함께 받아들인다. 한쪽을 강조해 다른 쪽을 약화시키기보다 크기와 거리, 색의 밀도를 달리해 서로 다른 존재감을 유지했다.
관광지의 아름다움을 세밀하게 기록하는 방식에서도 한 걸음 비켜선다. 할슈타트의 건축물을 하나하나 정밀하게 묘사하기보다 푸른 산과 호수, 따뜻한 색의 마을이 만들어내는 관계를 앞세웠다. 여행지의 구체적인 모습과 머물렀던 시간의 인상이 한 작품 안에서 겹친다.
‘할슈타트 마을’은 차가운 산과 따뜻한 건축물, 또렷한 형태와 번지는 수면, 밀집된 오른쪽과 비워둔 왼쪽이 서로 균형을 이루는 수채화다. 산은 배경 장식으로 밀려나지 않고, 마을 역시 거대한 자연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조운호는 자연과 사람이 한 장소를 나눠 가진 풍경을 색의 농도와 여백, 크기의 차이로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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